제17교구본사 모악산 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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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 대적광전


금산사(金山寺)는 전라북도 김제시 모악산(母岳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다.
모악산의 김제의 명산으로 산이 깊고 넓어 비경을 많이 감추고 있다. 모악산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금산사로, 예로부터 호남 사경(四景)을 말할 때 금산사를 가장 먼저 꼽는 것도 바로 영산인 모악산에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제 지역을 포함한 일대를 품 안에 안고 있는 산이 모악산이며 그러한 모악산의 정기를 듬뿍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금산사인 것이다.
599년에 창건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진표(眞表) 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진표 율사는 숭제 법사의 법을 이어받아 수행하였고, 그 뒤 변산의 불사의방에서 17년이나 극한적 고행 수도인 망신참(亡身懺)을 하여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법을 인가받았다는 표지인 간자(簡子)를 건네 받은 이야기는 불교사상 유명하다. 그 뒤 왕실의 후원을 받아 762년부터 766년 동안 금산사를 대찰로 중창하였다.
후삼국시대인 935년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된 것으로 보아 여전히 이 지역 최대의 사찰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는 1097년 혜덕왕사가 중창을 하였는데, 이때가 금산사 역사상 가장 큰 규모를 이루었던 시기다. 가람배치도 대사구, 봉천원, 광교원 등으로 구획되어 86동의 건물과 43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금산사의 전성기라고 할 만하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뇌묵 처영 스님이 이끄는 의승병의 거점이 되어 호국에 앞장섰으나 정유재란 때 왜구의 주공격 대상이 되어 가람이 불타 버렸다.
그 뒤 수문(守文) 대사가 대사구 지역을 복구하면서 중창을 이루었다. 금산사의 명성은 이어져 1725년 환성 지안 스님이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전국에서 1,4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할 정도였다.
근래에는 1961년 월주(月珠) 스님이 중창을 시작하여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교, 극락교, 향적당, 적묵당, 보현당, 설법전, 요사채, 나한전, 조사전, 전통찻집, 보제루 등을 새로 짓고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상서전 등을 해체 복원하였다. 아울러 방등계단 성역화 불사를 마무리하여 대사구를 완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금산사에는 그야말로 숱한 문화재가 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금산사를 아끼고 사랑했던 대중들의 불심과 노력의 결정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지정문화재만 들더라도 오층석탑(보물 제25호), 방등계단(보물 제2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노주(보물 제22호), 석등(보물 제828호), 혜덕왕사 진응탑비(보물 제24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석련대(보물 제23호) 등이 있다.

[자료제공 : 사찰문화연구원, 현대불교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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