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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 땐 그것을 몰랐을까" [2006년 2월 8일(수) 오후 3:43 [프레시안] ㅣ 마지막 단식 왜!!! |
2006-04-07 오전 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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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2월 8일(수) 오후 3:43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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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 땐 그것을 몰랐을까" |
프레시안 강석원/<삶이 보이는 창> 전 기획위원] 지율 스님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와 이 글을 쓰는 마음이 한결 가볍다. 스님을 걱정하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하리라 믿는다. 내가 지율스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녹색평론〉에 실린 글을 통해서였다. 당시 지율 스님은 천성사의 내원사 비구니 스님들과 '천성산 살리기' 국토 순례에 나서는 중이었다. 그 때 그 글을 통해 내가 받았던 지율 스님의 인상은 두 가지였다고 기억한다. 천성산을 포함한 자연과 생명 사랑이 남다른 분이라는 것과 그분이 가진 자연 사랑의 진정성이었다. 그것은 '생명의 대안은 없다'라는 글 제목으로 요약된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대체할 수 없다는 주장은 당연한 주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 다른 대안 노선을 주장한 사패산의 예를 보듯,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이곳에 있든 저곳에 있든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경중 없이 소중하다는 것, 대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주장에 나는 스님의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율 스님 때문에 떠올린 유년 시절의 삽화 오래 전의 그 글은 잠시나마 내가 경험했던 유년 시절의 삽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다. 나의 유년 시절, 박정희가 흑백 TV에 나와 주창했던 구호를 기억하고 있다. '사람은 자연 보호, 자연은 사람 보호'라는 표어다.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한동안 그 표어가 전국의 산하에 그리고 도시의 거리에 현수막으로 여기저기 내걸렸다. 나는 그 표어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과 자연이 서로 보호하는, 말하자면 서로 하나로 상생하자는 뜻의, 단순하지만 새겨 볼 만한 문구였다. 나는 그 표어를 오랫동안 마음속에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는 자연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실감이 없었던 한 착한 어린이의 허구적인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자연과 생명과의 특별한 인연이나 삶의 체험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교육받은 그대로 충실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따르는 관념적 구호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개발 독재시절에 그런 자연보호 운동이 벌어졌다는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다. 당시의 어린 나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모든 사람들, 아니 요즘 사람들의 자연보호 구호도 그저 형식적이며 상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경제성장이나 개발이 최우선 순위이고 자연이나 생태보전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또 하나, 한 친구가 떠오른다. 그 친구는 땅에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나 날파리 같은 것도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였다. 우리 친구들의 대부분은 그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잔인하게 만지고 비비고 죽이기까지 했는데, 그 친구는 저들도 살아 있는 생명체인데 감히 살생을 한다면서 우리들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의 질책이 어딘지 낯설고 불편하다는 느낌의 반감을 가졌다. 저 친구는 하찮은 벌레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당시의 나는 그가 믿어지지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도저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색다른 친구로 인식되었다. 그 친구는 나중에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렇게 계집아이처럼 남달리 유난을 떨더니 자기 심성에 딱 맞는 대학에 갔네 하며 속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했었다. 유년시절의 내 속을 지금 다시 들여다보면, 서로 모순된 두 가지 면모가 동시에 자리 잡고 있었던 듯하다. 마음에 드는 자연보호 표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마치 한바탕 그럴 듯한 꿈을 꾸는 낭만적인 모습과 작은 미물을 향한 폭력성을 지닌 악동적인 모습이 동시에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의 저 깊은 원형의 모습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곤 했다. 지율 스님이 내리친 '소리 없는 죽비' 그 동안 지율 스님의 몇 차례의 단식과 천성산에 관한 소식도 단편적으로 접했을 뿐 민감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결과를 예단하여 국가 권력이 추구하는 개발 정책의 행보를 어쩔 수 없는 대세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율 스님이 아무도 모르게 단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중에 세상에 알려졌고 그 정도가 한 생명을 앗아갈 정도의 심각한 단계에 있다는 소식에 이른 것이다. 지율 스님은 자연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보호, 생명 가치에 대한 큰 안목을 그대로 몸소 체현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깊어 잠들어 있는 나의 의식을 향해 소리 없는 죽비를 내려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율 스님의 일련의 행보들은 나로 하여금 나의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럴 듯한 표어를 수학 공식처럼 외우고만 다녔던 시절과 작고 힘없는 벌레를 애틋하게 생각했던 친구를 비아냥거리고 무시해 버리고 지나쳤던 나의 과거들. 지율 스님의 단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유년 시절의 경험을 되새겨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자연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채로 되뇌고 다닌 관념의 허구성을 나부터 철저히 반성하고 깨우쳐야 하며 친구의 자연 사랑을 마음으로 공감하고 그와 일체가 되는 마음이 되어야 진정으로 지율스님을 이해할 수 있겠다, 라는 자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생명의 가치를 알아보는 인간 본연의 양심 일반적으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물질 지상주의, 경제 성장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다고 비판을 받지만 사실 생명의 가치나 존엄성을 절실하게 마음깊이 통감하는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감성이 예민하거나 섬세한 사람이야 그것이 가능할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속진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나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일지도 모른다. 자연을 사랑하던 친구와 나 사이의 서먹한 관계처럼 지율 스님과 스님의 단식을 바라보는 일반적 여론과의 간극과 의식의 차이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정체가 무엇일까. 나는 생각해 본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생명의 가치를 알아보는 마음의 눈과 자신의 저 밑에서 울려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유년 시절의 친구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오랫동안 그것을 기억하면서 반추하는 이면에는 내가 가지지 못한 진실에 대한 작은 부끄러움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로서는 차마 행동에는 옮기지 못했던 친구의 생명 사랑에 대한 보이지 않는 선망 심리가 담겨져 있지나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곧,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람의 양심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아닐까. 지율 스님의 참 뜻을 공명하기 시작하는 자리는 바로 여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시하고 불편해하고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자리에, 역설적이게도 바로 같은 자리에 바른 길과 정의와 생명의 가치를 알아보는 인간 본연의 양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율 스님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양심의 소리를 어서 들으라고, 저 앞에 보이는 자연을 마음으로 달려가 안겨보라고, 그렇게 나직이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강석원/<삶이 보이는 창> 전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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