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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위논문/한산의 시세계 연구 ㅣ 선시이해 (禪詩理解) |
2006-06-04 오후 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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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 士 學 位 論 文 寒山의 詩世界 硏究 ― 禪文學的 입장에서 李 日 宰 ( 慈 明 ) 東國大學校 大學院 1 9 9 3 指導敎授 李 智 冠 이 論文을 哲學博士 學位論文으로 提出 함 李 日 宰 (慈明)의 哲學博士 學位論文을 認准 함 1993 년 월 일 目 次 Ⅰ. 序 論 1. 硏 究 目 的 2. 硏 究 方 法 3. 硏 究 資 料 1)板本의 問題 2)旣存의 硏究 成果 Ⅱ. 禪文學의 脈絡 1. 佛敎文學의 範疇 2. 禪文學의 意味 3. 偈 頌 文 學 4. 語 錄 5. 頌 古 文 學 Ⅲ. 寒山詩의 形成背景 1. 傳記 및 人間關係 1)閭丘胤 序文 2)交遊關係 2. 天台山의 環境 3. 佛敎思想的 背景 4. 隱 逸 思 想 Ⅳ. 寒山詩의 分類 1. 禪詩의 分類方法 1)一般文學의 分類方式 2)禪家의 立場 2. 寒山의 禪詩 類型 1)悟道詩 2)示法詩 3)臨終詩 4)山居詩 3. 僧伽 批判의 詩 4. 社會 批判의 詩 Ⅴ. 寒山詩의 禪思想 1. 南宗禪과의 關係 2. 靑山 白雲의 象徵構造 3. 體·用의 構 造 4. 任 運 思 想 5. 自 然 觀 Ⅵ. 寒山詩의 特徵 1. 格 外 2. 直 觀 3. 詩 禪 一 如 Ⅶ. 後代 寒山詩의 受容 1. 中 國 2. 韓 國 3. 日 本 4. 美 國 5. 寒山詩와 禪畵 Ⅷ. 結 論 參 考 文 獻 Summary Ⅰ.序 論 1. 硏 究 目 的 宗敎的 가치의 세계와 文學的 가치의 세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兩者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文化를 형성하여 왔다. ` 종교에서 文學의 역할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마도 종교에서 文學의 역할이 배제 되었다면 과연 오늘날 종교가 그토록 널리 大衆性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佛敎에 있어서도 文學의 역할은 막대하였다. 佛敎文學의 연원은 멀리 佛陀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타의 설법중에 이미 文學的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니 散文과 韻文을 함께 사용하여 설법을 하고 比喩와 因緣, 象徵등의 여러가지 文學的 방법을 이용하였다. 불타가 입멸한 후 3藏 12分敎가 結集을 통하여 이룩되고 이어서 인도 佛敎文學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佛所行讚』(Buddhacarita)이 馬鳴(Asvaghosha)에 의하여 나왔다. 佛敎文學중에 가장 비중 있는 분야는 역시 禪文學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곧 禪詩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禪詩는 보편화 된 佛敎文學의 형식이다. 禪文學이 크게 일어나게 되는데에는 禪宗이 시작 되던 시대인 唐의 문화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禪文學은 뿌리를 내리고 선가의 많은 語錄이 나왔으며 宗門第一書라고 불리는『碧巖錄』이 園悟克勤에 의해 나오게 되어 최고봉을 이루게 된다. 禪文學의 역사에서 寒山子는 비교적 초기에 속하며 유일하게『寒山子 詩集』이 전해지고 있다. 寒山은 생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인물이지만 寒山詩는 禪文學 硏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寒山은 禪宗이 성립되던 역사적 공간 속에서 禪과 詩를 함께 수용하면서 天台山에서 은둔했던 禪詩人이었다. 그의 시집으로 전해지는『寒山子詩集』은 禪文學의 중요한 古典이라 할 수 있다. 寒山詩는 禪詩 속에, 禪詩는 禪文學에, 禪文學은 佛敎文學에 내포되고 佛敎文學은 佛敎學 속에 포섭된다. 우리는 佛敎文學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佛敎文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佛敎文學의 場을 좀 더 개방적으로 열어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시각은 다양한 세계를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열려져 있을 때 참다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佛敎文學은 다만 佛敎文學의 모습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禪文學에 있어서도 그 자체로서 이해 해야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을 보고 이해하는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시각이 나올 수 있으며 이런 열려진 다양성 속에서 佛敎文學 硏究는 성숙되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寒山에 대한 硏究는 종래에 국내의 경우 주로 中國文學의 분야에서 약간 이루어졌을 뿐이며 佛敎學界에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寒山詩뿐 아니라 佛敎文學에 대한 인식이 아직 열려 있지 않고 또 필요성도 별로 느끼고 있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몰이해 속에 소외당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진정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하여는 불교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中國佛敎의 특성으로 지적 할 수 있는 것으로 宗派佛敎를 들 수 있다.이런 宗派佛敎의 가장 중국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 禪宗이다. 禪宗은 가장 중국화 된 옷을 입고 역사에 등장하였다. 중국적인 宗派佛敎로서 최후에 나온 禪宗이 중국적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중 하나가 禪과 詩의 결합을 통하여 매우 새롭고 독특한 文學이 전개되어간 것이다. 어느 종파보다도 禪宗은 文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많은 文學作品을 남겼다. 그래서 佛敎文學의 분야에서 단연 禪文學이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이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禪宗의 독특한 진리 인식의 방법이 直觀的인 論理를 존중하는 점과 또 禪과 詩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禪宗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唐代이다. 이러한 선의 中國化의 역할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慧能이다. 慧能이 출현함으로 하여 비로소 禪은 중국적인 옷을 입고 역사위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禪의 연원은 붓다에서부터 비롯되고 達磨 이전에 일찍부터 중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達磨 이전의 禪과 이후의 禪은 역사상 매우 체질을 달리 하여 전개되었다. 詩 또한 오랜 역사의 흐름을 거쳐 唐代에 가장 精緻하게 다듬어진 文學樣式으로 자리 잡게 된다. 唐의 王朝는 文學을 숭상하고 특히 詩를 政治에 끌어들여 와서 과거의 기준을 삼고 그 결과로 많은 시인과 문인들이 배출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禪과 詩는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고 새로운 文學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禪宗의 출발 시기인 당의 문화가 佛敎的인 사상을 바탕으로 이룩된 문화이고 당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의 특색으로 唐詩를 빼놓을 수 없는 점과 관계가 깊다. 선이 不立文字를 표방하면서 언어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역설적으로 禪家만큼 많은 語錄과 文集을 남기고 있는 경우도 드물다. 禪과 文學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寒山詩를 통하여, 또 그 후대의 禪家의 많은 경향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寒山은 그의 삶의 신비성으로 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天台山의 寒巖이라는 바위 굴속에서 완전히 은둔자로 삶을 살면서 오로지 자신의 전 존재를 시에 담아 표출한 불세출의 詩人이자 禪者이다. 그러나 자유분방하면서도 활달하며 禪의 깊은 세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그의 시는 일찍부터 禪家에서 애송되어 왔고 민중들 사이에서 많이 읽혀져 왔다. 그의 시세계는 靑山과 白雲으로 표상되는 바 이는 體와 用의 동양적 사유의 틀에 뿌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불교의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는 任運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寒山의 詩世界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지 살펴보고 나아가 佛敎文學의 새로운 길은 무엇인지를 알아 보고자 한다. 역사의 이면에 숨어 隱士로서 살다 간 禪詩人 寒山子의 詩世界의 硏究를 통하여 역사 밖에 있으면서도 역사를 투철히 통찰하고 자연 속에서 더불어 심성을 가을 달과 같이 맑게 살았던 그의 시세계를 다시 조명해보고, 그의 선사상과 시세계의 특징등을 살펴보고 나아가 禪文學의 가능성을 열어가고자 함이 본 논문의 목적하는 바라 하겠다. 2. 硏 究 方 法 佛敎文學의 硏究方法으로는 文獻學的인 방법과 解釋學的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두 분야가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서 두 방법이 잘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완전한 硏究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文獻的인 硏究는 집의 기초공사와 같아 기초가 튼튼해야 집을 잘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정확한 문헌의 기초를 마련해야만 훌륭한 硏究를 이루어 낼 수 있게 된다. 또 길을 닦는 것에 비유를 할 수 도 있겠다.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기 위해서는 우선 길이 먼저 닦여야 하는 것과 같다. 解釋學的인 硏究는 매우 폭이 넓다. 어떤 해석적 입장을 견지하느냐에 따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이 매우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해석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언어의 의미 분석을 통한 접근 방법도 가능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寒山의 詩世界를 살피는 방법적인 면에서는 文獻學的인 접근과 아울러 解釋學的인 새로운 시각을 갖고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寒山의 歷史的 사실성에 대하여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점을 다시 살펴보고, 寒山詩의 분석을 통하여 그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해나가고자 한다. 寒山詩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의 문제는 오늘의 나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과도 무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寒山은 主體的으로 투철하게 자기 삶의 의미를 묻고 치열하게 살다 갔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8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장에서는 이 논문의 目的과 方法論과 資料的인 면을 다루고져 했다. 자료적인 면에서 기존의 硏究성과와 寒山詩 板本의 문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둘째 장에서는 禪文學의 맥락을 알아 보고져 한다. 寒山詩 이전의 중국에서의 맥락을 살펴보는 것은 寒山詩를 이해함에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禪의 시발은 멀리 인도의 불타의 가르침에서 비롯 되었으나 중국에 와서 唐詩와 접합되면서 禪文學으로 독특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는 中國文學 속에서 자리한 특수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禪宗이 출발하던 시기에 살았던 寒山은 그의 독특한 시의 세계로 禪을 수용하고 표현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寒山은 중국의 佛敎文學의 새로운 길을 열어놓은 중요한 인물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장에서는 寒山詩의 形成背景과 그에 따른 여러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寒山의 生涯는 현재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철저하게 隱遁의 삶을 살았기에 출생과 죽음의 시기조차 분명하지가 않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편린이나마 그의 人間關係와 詩를 통하여 삶의 일부라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寒山의 사상적 뿌리를 이루고 있는 佛敎思想의 배경과 그가 왜 은둔적인 삶을 살았는가에 대하여, 그리고 중국의 전통적인 隱逸思想에 대하여 寒山詩와의 관계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넷째장에서는 硏究方法論에 있어서 禪詩의 分類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일반文學에서 禪 詩를 어떻게 분류하는지를 살펴보고 또 선가나 佛敎文學的 입장에서 寒山詩의 분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이가를 알아보겠다. 그리고 寒山이 매우 준열하게 비판하고 있는 비판시를 통하여 승가의 진정한 出家精神을 일깨우고 있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섯째 장에서는 寒山詩의 禪思想을 살펴보겠다. 寒山이 살았던 시대는 南宗禪이 크게 일어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寒山詩와 南宗禪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고 그의 禪思想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寒山詩의 정신적 바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靑山과 白雲의 象徵的 구조의 분석을 통하여 體와 用의 사상에 뿌리하고 있음을 살펴 보려고 한다. 體·用의 구조는 동양의 독특한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體와 用이 둘이며 동시에 하나인 통합의 틀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서구의 二分法的인 二元論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한 틀 속에서 寒山詩가 드러내주는 세계를 분석하여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또 그의 自然觀에 대하여도 살펴보려고 한다. 여섯째 장에서는 寒山詩의 特徵을 살펴보겠다. 禪이 갖는 특징중에 파격적인 태도는 格外라고 할 수 있다. 格外야말로 일상성을 깨뜨리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끄는 破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는 바로 우리의 平常心을 떠나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언어를 떠나서 달리 본질을 들어내줄 수 없기에 철저히 일상적 차원으로 돌아가기를 가르치는 선의 태도에서 잘 알 수 있듯이 平常心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로 禪·詩 一如의 경지로까지 나아가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곱째 장에서는 후대 寒山詩가 어떻게 受容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中國 뿐 아니라 韓國, 日本, 美國에 이르기까지 寒山은 이미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 있어서 禪家에서 寒山詩가 어떻게 전승되어 왔으며 詩僧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韓國과 日本과 美國에서 寒山詩가 어떻게 읽혀왔고 수용되어 왔는지를 알아보겠다. 그리고 禪과 그림의 만남의 장이라 할 수 있는 禪畵로서 변형된 寒山 拾得圖를 살펴보고 結論을 맺을 것이다. 모든 학문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佛敎學 특히 佛敎文學에 있어서도 硏究方法論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이런 점에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입장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문헌분석을 통한 사상의 해석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寒山詩의 세계를 분석하여 해석해 보고져 한다. 인간의 언어에 대한 이해는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고 이러한 언어에 대한 열려 있는 존재로서 解釋學의 方法論은 접근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3. 硏 究 資 料 학문 硏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資料이다. 정확하고 풍부한 자료를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가 좋은 논문을 쓰는 관건이 된다고 본다. 硏究資料는 일차자료와 이차자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寒山詩에 있어 일차자료는『寒山子詩集』의 板本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차자료는 이제까지의 寒山詩에 대한 硏究성과와 그 밖에 여러 분야의 보조적 硏究資料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판본부터 살펴보자. 1)板本의 問題 고전에 관한 硏究에서는 판본에 대한 硏究는 매우 중요하다. 寒山詩에 있어서도 宋代 이후 많은 板本이 전해지고 있다. 최근 寒山詩의 板本硏究로 論文이 나와서 이 방면의 다양하게 흩어졌던 硏究들이 하나로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위 논문에 따르면 판본은 크게 여섯 계통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唐代刊本 계통 둘째는 宋刻本 계통 셋째는 吳明春本 계통 넷째는 郭宅紙鋪本 계통 다섯째는 寶祐本 계통 여섯째는 國淸禪寺本 계통 위와 같이 여섯 계통중에 본 논문의 저본으로 삼고 있는 奉恩寺本은 郭宅紙鋪本 계통이다. 奉恩寺本은 우리나라에서 판각 된 것으로 郭宅紙鋪本 계통에 속하며 高麗信女本과 같은 계통이다. 이는 또한 四部叢刊影玉峰本과도 같은 계통이기도 하다. 初刊은 宋 成宗 元貞 2年 (1296)에 간행되었다.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寒山詩』도 奉恩寺本에 의한 것이다. 奉恩寺 판본의 체제는 머리에 閭丘胤의 寒山子詩集序가 있고 寒山子詩와 豊干詩와 拾得詩를 함께 싣고 있으며 책 뒤에 사문 南志의 天台國淸禪寺三隱集記가 있고 부록으로「慈受懷深和尙擬寒山詩」가 있다. 刊記는 咸豊 六年 丙辰 秋 廣州 奉恩寺刊版으로 되어 있다. 刊者는 信女 妙月心이 父 全州李氏와 母 密陽朴氏의 靈嘉를 위해 施主 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東國大學校 및 高麗大學校 도서관에도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소장돼 있다. 본래 寒山詩集은 三隱集, 또는 三隱詩라는 이름으로 寒山, 拾得, 豊干의 시가 함께 간행되었는데 宋代의 刊本이 가장 오래 되었다. 간행년대가 오래 된 것으로는 서기 1189년 國淸寺의 志南이 간행한 것으로 일본 宮內廳 書陵部에 소장되어 있는 것도 이에 속한다. 이는 뒤에 四部叢刊으로 나와 建德周本이 되었다. 다음의 宋本은 明末의 고명한 장서가 毛晋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영인되어 역시 중국고전 전집 四部叢刊의 後印本이 되었다. 또 다음으로는 四部叢刊의 初印本으로 영인되어 元代의 刊本을 1529년에 조선에서 판각한 것을 저본으로 삼고 있으며 원간본은 宋刊本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1130년에 慈受懷深이 한산시를 모방하여 지은 시 148수가 付刻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봉은사본과 일치한다. 판본마다 시의 배열이 다르고 약간의 자구의 출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본 논문은 奉恩寺 板本에 의거하여 硏究하였고 시에 제목이 없는 관계로 편의상 시에 번호를 단 것은 金達鎭 역『寒山詩』(세계사,1991)에 따랐음을 밝힌다. 2) 旣存의 硏究 成果 寒山詩에 대한 근대적인 硏究의 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胡適이다. 그는 근대적인 文獻學의 방법으로 寒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寒山의 생애에 대하여 이제까지 유일한 자료로 내려오는 寒山詩集 서문의 작자로 알려진 閭丘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문헌학적인 관점에서 사실성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胡適에 의하여 근대적인 寒山의 硏究는 막이 올랐다고 할 수 있다. 胡適은 근대적인 학문에 대한 눈을 일찍 뜬 사람으로 그의 문헌학적으로 역사에 대한 事實的 접근 노력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胡適 이후 비교적 다수의 寒山에 대한 논문과 저술들이 中國, 韓國, 日本에서 나왔지만 대부분이 문헌학적 혹은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거나, 中國文學의 입장에서 硏究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硏究를 살펴보면 우선 胡適의『白話文學史』를 들수 있다. 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의 口語文學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 역저로 여기서 그는 寒山의 神話的인 부분을 비판하고 역사적인 사실의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또한 王梵志의 시를 최초로 역사위에 떠 올리고 寒山과의 관계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그의 硏究에 힘입어 그후 여러 사람의 硏究가 나왔으니 錢穆의『讀寒山詩』, 趙滋蕃의 『寒山的 時代精神』, 黃博仁의『寒山及其詩』, 陳慧劍의 『寒山子 硏究』등에 의해 寒山의 硏究는 많은 진전을 보았다. 學位論文으로도 몇편의 논문이 나와 있다. 韓國에서는 硏究論文으로 몇 편이 나와 있으며 또 몇 편의 碩士論文도 나와 있다. 일본의 경우는 寒山詩의 번역과 비평이 많이 이루 어져 있다. 그 중에서 괄목할만한 것으로 入矢義高의 硏究성과를 들수 있다. 그는 중국 고대의 俗語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禪學의 俗語에 대한 해설은 매우 뛰어나고 정확한 것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밖에 미국에서도 박사학위 논문이 나와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寒山詩는 주로 역사적인 관점에 의한 사실적 硏究와 文學的 입장에서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寒山詩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가장 깊이 몸 담았던 禪에 대한 硏究와 함께 이루어져야만 온전하게 다 파악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禪文學的 입장의 硏究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人間에 대한 理解의 길은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해석의 통로 또한 항상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寒山詩의 세계는 새롭게 조명 되어야 할줄 안다. 이같이 佛敎文學으로서의 禪文學적 입장을 통하여 한산시의 세계를 새롭게 평가하고 이해하고자 함이 본 논문의 지향하는 바라고 하겠다. Ⅱ. 禪文學의 脈絡 한산의 시세계에 대하여 살펴보기 전에 우선 한산시가 위치한 역사적 맥락을 훑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은 佛敎文學의 範疇를 살펴보고 禪文學의 意味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偈頌文學과 語錄文學과 頌古文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佛敎文學의 範疇 佛敎와 佛敎文學과 文學과의 관계를 살펴 보자. 『韓國佛敎文學論』에서 홍기삼교수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만들어 佛敎文學을 설명하고 있다. 佛敎文學 c b 佛敎 a 文學 a형과 b형과 c형으로 佛敎와 文學과 佛敎文學의 관계를 나누어 佛敎文學을 생각할 때 文學에서 보는 佛敎文學과 佛敎에서 보는 佛敎文學은 많은 차이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a형은 佛敎와 文學이 평행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佛敎文學이 될 것이고, b형의 佛敎文學은 文學에서 받아들이는 佛敎文學이 될 것이고, c형 佛敎文學은 佛敎的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佛敎文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佛敎文學에 대한 논의는 b형 佛敎文學이 훨씬 많이 행해져 왔다고 보여진다. 본 논문에서 취하는 방향은 c형의 佛敎文學이 될 것이다. 佛敎에서 이루어지는 佛敎文學이라고 할 수 있다. 홍기삼 교수의 위 논문은 이제까지의 佛敎文學에 대한 논의를 한 단계 끌어 올린 탁월한 논문으로 평가 받을만 하다. 그러한 평가에 값할 수 있으려면 佛敎에 대한 탄탄한 認識과 世界觀 내지 價値觀을 제대로 제시하고 있어야 할 줄 안다. 과연 그러한가? 그러나 아직은 佛敎的 가치를 佛敎文學으로 심어주기에는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佛敎學과 文學 내지 佛敎文學을 똑같은 자리에 놓고 등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佛敎的 인식이 얼마나 열려 있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佛敎文學이라고 해서 꼭 佛敎的 지식이나 신념을 주장 할 필요는 없으나 佛敎的 인식을 바탕하지 않고 佛敎文學이라고 이름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근래 佛敎學에서 佛敎文學 硏究의 길을 먼저 열어 놓은 金雲學 교수에 따르면『佛敎文學의 理論』에서 佛敎文學을 여러가지 입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佛敎文學이 佛敎의 어느 한 부분이거나 혹은 經,律,論 삼장의 전부로 혼용되어 왔다고 지적하면서 <佛敎의 文學>, <佛敎와 文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佛敎의 文學>에 있어서 佛敎에 의한 文學이 될 수 도 있고, 佛敎를 위한 文學일 수 도 있는 것이다. 佛敎를 위한 文學은 불타의 생애와 佛敎敎理를 전하기 위해 창작된 文學으로 이해되고, 佛敎的 文學은 佛敎的 사상이나 신앙이 스며진 文學에 가깝게 이해된다고 말하고 있다. <佛敎와 文學>에 있어서도 佛敎 전체를 文學으로 생각할 수 있고 佛敎的인 인생을 文學的으로 그릴 수도 있으며 佛敎와 文學과의 관계를 찾을 수도 있는 광범위한 것이다. 그는 佛敎와 文學의 독립된 이미지를 최대한 인정하면서 佛敎文學을 보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佛敎文學을“宗敎文學, 즉 佛敎라는 종교와 文學이 원리적 바탕에 있어 심층적으로 합일되는 통일적인 경우를 가장 차원 높은 佛敎文學이라고 할 수 있다.” 고 말하며 佛敎文學은 어디까지나 佛敎文學이지 佛敎의 文學이거나 佛敎的 文學일 수 없다는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그러면 佛敎學에서 이루어지는 佛敎文學에 대하여 佛敎文學을 硏究하는 文學분야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홍기삼 교수는『韓國佛敎文學論』에서 佛敎文學에 있어서 그 개념에 대해 철저한 範疇化와 비판적 검토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佛敎文學의 개념에 대한 비평적 관점이 성숙되지 못한 점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개념이 유동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그 잘못의 원인중 하나로 經·律·論 三藏 十二分敎가 모두 佛敎文學이라는 주장이 개념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이로 인해 佛敎文學에 대한 비평적 성장이 완전히 차단된 폐쇄개념으로 고정 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위의 佛敎文學의 입장은“文學硏究의 본래의 태도와 구분되어야 할 것이며 文學을 위한 과학적 노력과도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文學을 위한 과학적 노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밝혀내고 있지는 않다. 그의 佛敎文學에 대한 견해는 ① 佛敎의 經典 및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계되는 著作物 모두가 佛敎文學이라는 주장. ② 佛敎經典, 佛敎에 관한 문헌 및 佛敎的인 것을 表現한 文學 일체. ③ 佛敎的인 관심을 文學형식으로 創作해 낸 文學 등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으며 첫번째 견해로는 불타의 가르침 일체인 經,律,論 三藏 전부와 여러 나라의 모든 언어문자에 의한 佛敎에 관한 저작을 포함시키고 있는 견해를 말한다. 두번째의 견해는 佛敎經典과 佛敎에 관한 문헌 또 佛敎的인 것을 표현한 文學 일체라고 말하는 부류이다. 이들 중에 金芿石과 金雲學을 포함시키고 있다. 세번째 견해로는 佛敎的인 관심을 표현한 文學으로 山邊習學의 경우와 같이 “佛敎의 사상 또는 신념을 文學的으로 표현한 것 ”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표적인 것이 될 것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佛敎文學과 좁은 의미로서의 佛敎文學으로 나누어 살펴본다면 전자의 경우는 일체 경전을 다 포함하여 개인적인 창작 文學까지를 일컬을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佛敎가 일정한 文學的 樣式으로 담겨 질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佛敎文學의 전반적인 면을 갈래지어 밝히면서 각 견해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내 보이고 있다. 그가 佛敎經典이 文學이라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佛敎와 文學의 한계가 증발하는데 대한 대응논리가 성립되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佛敎文學이라는 것은 佛敎硏究의 한 분야가 아니라 文學硏究의 한 갈래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佛敎文學을 文學에 예속시키려는 태도는 자칫 佛敎文學의 성격을 변화 시킬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佛敎的 認識의 바탕 없이 佛敎文學의 이름만 빌린다면 佛敎와는 상관 없는 文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佛敎文學인 한 佛敎와의 관련은 어떤 형태로든 끊을 수 없으며 佛敎學으로서 佛敎文學의 成立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佛敎文學은 佛敎的 뿌리와 文學的 형식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며 文學의 영역에만 묶여질 때 오는 한계성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관습적이고 당연히 명명된 佛敎文學이라는 개념이 文學圈 내의 요구에 따라 확정된 개념이 아니라 文學圈 이외의 아마츄어적인 지적 한담의 결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사정이다.”라고 佛敎文學의 文學 외적인 관심에서 출발했던 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文學의 영역을 확장하는 발전적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홍교수는 다시 文學 →韓國文學 →宗敎文學 →佛敎文學이라는 범주의 논리적 순서와 세분 화를 거쳐 가면서 이루어진 佛敎文學의 논의와 달리 참으로 우리에게 무익 한 논리로 당혹감을 안겨주는 것이 佛敎經典=佛敎文學이라는 등식이고 이 런 법칙성과 결정론적 태도야말로‘체계적 지식구조를 세우는데 도움이 못 되는 文學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다. 라고 신앙과 학문의 미분화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불경의 신성함을 주장한다고 해서 학문이나 文學이 성숙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十二分敎가 곧 文學이라는 비논리적 명제를 극복할 수 있을 때 佛敎文學에 대한 발전적 논의는 더욱 촉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위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일견 바른 지적이라고 생각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편 생각하면 根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말에만 매달릴 때 오는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佛敎文學에서 경전에 바탕한 바른 佛敎思想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경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경우든 根本主義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나 앞에서의 지적처럼 근본주의가 자기편애적인 속성을 드러낸다면 이는 극복되어야 옳다고 할 것이다. 위의 도식에서 韓國文學 속에 宗敎文學을 포함 시키고 있는데 이 점에서 논자는 홍교수와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韓國文學은 文學속에 포함될 수 있으나, 宗敎文學은 韓國文學 범주 안에 완전히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韓國文學속에는 얼마든지 비한국적 宗敎文學이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佛敎文學의 발생적 입장에서 볼 때 佛敎가 主가 되고 文學이 補助的인 입장이었다고 굳이 잘못 되었다거나 非文學的이라고 지적 받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상 살펴본바와 같이 佛敎學에서 받아들이는 佛敎文學과 文學에서 받아들이는 佛敎文學과의 차이는 현격하게 시야를 달리 하여 있다. 일단은 시각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견해를 달리하는 점을 지적하여 두고져 한다. 경전을 文學이라고 보는 태도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대하여 시각을 달리하여 생각하면 바로 그것은 文學쪽에서 이해하려는 佛敎文學의 한계라고 생각된다. 그는“佛敎文學이라는 용어가 학술적 論理를 전제로 한다면, 당연히 佛敎를 硏究하기 위한 분류의 방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文學의 한 특수분야로서 佛敎文學이거나 또는 그 나라 文學史를 온전하게 파악하고 기술하기 위해 탐구되는 精神史적 思想史적인 硏究태도의 하나라고 보는 것이 옳다. 만약 佛敎를 硏究하기 위해 굳이 편의적 용법으로 佛敎文學이라는 분야를 설정하고 논의한다면 그것은 佛敎學의 硏究문제이지 이미 文學분야의 硏究과제는 아니다.”라고 佛敎文學과 文學의 關係와 限界를 못 박고 있다. 이점은 佛敎文學인 한 어디까지나 佛敎思想을 포기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예 佛敎를 포기하든지 文學을 포기하든지 해야 할 것이라는 佛敎的 시각과 극명하게 구분되는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가 내리는‘文學이란 본질적으로 世俗적인 것’이라던가, 혹은‘타락된 사회에서 타락된 형태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 탐구의 한 방식’이라는 규정에 대하여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文學을 꼭 세속적이이야만 한다는 울타리로 묶어두는 것 또한 대단히 독단적인 태도라고 본다. 文學의 다양한 방식중에는 얼마던지 깨달음의 세 계도 담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佛敎는 어디까지나 모든 인간의 영역에서 중생과 부처를 함께 아우르며 이룩하는 세계이지 붓다의 언어가, 혹은 어느 禪師의 悟道頌이 결코 복에 겨운 소리만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佛敎의 가치관에 대한 결여에서 오는 佛敎文學의 태도에 대한 한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佛敎文學이 서야 할 입장은 진정한 佛敎로 돌아가는 것이 佛敎文學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본다. 참다운 佛敎的 바탕 없이 佛敎文學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다. 이상에서 우리는 佛敎文學에 대한 포괄적인 範疇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佛敎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佛敎文學과 文學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佛敎文學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佛敎文學을 정의한다면 佛敎思想을 바탕으로 佛敎的 認識을 통하여 佛敎的 價値를 추구하는 文學이라고 할 수 있겠다. 佛敎文學은 佛敎의 가치관과 인식체계를 갖고 佛敎와 文學이 고도의 융합적 관계속에서 통합을 이룰 때 진정한 佛敎文學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禪文學의 意味 禪文學이라는 말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입장이 있다. 선은 不立文字이기에 禪에 文學이라는 말로 수식하는 것이 語不成說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 언어는 부정되고 배제 될 수 있는가? 선가의 그 많은 語錄과 文集과 法語集들은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不立文字의 진의를 표피적으로만 알고 그 말의 자취만을 쫓아 오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 不立文字의 정신은 不離文字를 통하여 의미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不立文字와 不離文字는 존재의 양면성이다. 김운학은『佛敎文學의 理論』에서 禪文學을 悟道文學으로 규정하고 있다. 直觀的인 悟道文學이야말고 禪文學의 본령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우선 禪의 淵源부터 살펴보자. 禪이란 원래 산스크리트어 dhyana, 팔리어 jhana 의 語源을 갖고 있으며 한역으로는 음사하여 禪那라고 하고 약하여 禪이라고 한다. 서북 인도에서 실크로드까지의 속어로 jhan 이라고 발음하는 것에 연관지어 말하기도 한다. 원래 禪이란 한자는 天子가 하늘과 땅의 신에 제사 지내고 封禪하는 의미가 있으며 佛敎에서 뒤에 음사하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Ch'an 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Zen 이라고 한다. 국제적으로는 일본식의 발음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禪이 한자로는 靜慮, 思悠修 등으로 번역 되며 三昧(samadhi)와도 함께 쓰이고 禪定, 또는 禪觀이라 하기도 한다. 먼저 붓다의 시대부터 禪定의 실천을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자. 붓다의 선정의 근본사상은 초기에 鹿野園에서 설법한 初轉法輪에 이미 들어있다. 4諦 8正道의 道諦속에 正定은 바로 붓다의 초기의 선정에 대한 가르침이며 이것이 바탕이 되어 선정에 대한 가르침은 부처님의 말씀중 초기부터 나온다. 초기 경전인『수타니파다』 919 나 69 혹은『法句經』 372에서도 智慧와 禪定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禪定에는 止(Samadhi) 와 觀(Vipassana)이 아울러 갖춰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禪定思想은 부처님의 교설중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 3學으로 요약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3學으로 귀결되는 것은 마치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붓다의 교설이 3學으로 모아지게 됨은 3학이 일체 불법의 총체적인 귀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불법이 3學으로 모아지는 것을 일체 강물이 흘러 바다에 들어가 모아지는 비유는 경에 무수히 반복 되어 나온다. 禪修行의 바탕은 戒, 定, 慧, 3學을 근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3學과 8正道를 고루 갖춰 수행함으로서 깨달음의 언어가 나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말씀은 여러 경전을 통하여 볼 수 있고 普照에 의해서도 거듭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定과 慧를 함께 갖춰야 함은 普照도 강조하여 말 하기를 “모든 과거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戒 定 慧 三學을 벗어난 것이 없다” 고『定慧結社文』에서 밝히고 있다.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바른 知見이 나오고 바른 智慧에 의하여 바른 언어가 나올 때 바른 禪文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禪宗의 형성과 아울러 당의 詩가 성황을 이루고 그에 따라 선가에서는 무수히 많은 작품이 나왔다. 唐代의 선종의 성립의 사상적 근거는 선종에서 표방하는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四句偈야말로 선종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詩는 盛唐의 시대에 극성하였지만 禪은 中唐 내지 晩唐에 접어들면서 크게 성함을 보이고 있다. 唐代의 훌륭한 禪僧들이 보여준 많은 선의 偈頌을 보면 비할 수 없을만큼 탁월한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禪文學의 공로는 당연히 중국의 선가의 많은 선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禪文學의 가장 중요한 분야는 禪詩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偈頌으로 이루어진 시를 그 정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偈頌은 독자적으로 중국에서 발현되었다고 볼 수 도 있으나 그 뿌리는 역시 불타의 경전과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禪文學은 바로 중국적인 文化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 매우 뛰어난 불교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禪文學이 어떻게 이해되고 문헌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그 방식을 알아보자. 『禪學大辭典』의 禪籍 분류방식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禪學大辭典』에서는 佛敎문헌을 크게 總記, 經律論, 禪籍 과 같이 3부로 나누고 있으며, 선적을 다시 8 분야로 나누고 있으니, 1.宗義, 2.宗論, 3.史傳, 4.語綠, 5.銘·箴·歌 頌, 6.頌古文學, 7.禪文學, 8.淸規 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禪學大辭典』에서의 禪文學의 영역을 매우 좁혀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협의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역을 넓혀서 4.語綠, 5.銘·箴·歌頌, 6.頌古文學, 7.禪文學 까지로 확장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된다. 왜냐하면 禪文學에서 語錄이나 頌古文學이나 歌頌의 역할과 의미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세부로 들어가서『禪學大辭典』에서 禪文學을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 살펴보자. 세분해서 中國과 日本과 詩文評으로 나누고 다시 각각 別集, 總集, 尺牘으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別集은 각 개인의 시집과 문집을 말하고, 總集은 여러 사람의 작품을 하나로 묶어 낸 것이고, 尺牘은 서간문을 말한다. 詩文評에는 偈頌과 그 밖의 시에 관한 평을 묶고 있다. 禪文學중에서 중국의 別集을 보면 王梵志 시집을 처음 들고 있으며 이어서 寒山詩를 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또 유의해 볼 것은 寒山詩의 주석서가 많이 나열되어 있고 擬寒山詩集이 和寒山詩集과 아울러 많은 양이 열거되고 있음을 볼 때 寒山詩가 禪文學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3. 偈 頌 文 學 禪文學을 悟道文學이라고 할 때 이러한 悟道文學의 형식으로 偈頌文學이 가장 적합하다고 김운학은『佛敎文學의 理論』에서 밝히고 있다. 禪文學의 형식중에서 禪詩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김운학은 이에 대하여“禪에서는 直觀을 중시하고 언어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 초월된 언어가 상징적으로 나타날 경우 이것이 곧 文學이 되고 이런 경우 선승의 偈는 곧 詩文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文學에서 가장 중요한 象徵이 직절하고 차원있게 나타나는 것은 이같이 언어가 초월한 데서 오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불경의 文學的 形式의 3대 장르로 比喩, 說話, 詠頌을 꼽고 있으며 불경을 나누는 형식으로 3藏으로 나누고 있으며 9分敎 혹은 12分敎를 들고 있다. 가타는 孤起頌이라고도 하며 韻文의 형식을 띤 단독의 싯귀를 말 한다. 최초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담마파다』(Dhammapada)와『수타니파타』(Suttanipada)의 일부 그리고『長老偈』,『長老尼偈』,『우다나』등의 초기 경전들의 모두가 이같은 가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偈頌은 유명한 無常偈나 七佛通偈처럼 경전에서 유래된 것이다.『法句經』은 붓다의 偈頌이며 테라가타는 비구들의 노래이고 테리가타는 비구니의 노래이다. 偈頌의 연원은 바로 불경의 가타文學에서 비롯된 것이다. 言語는 文學에서뿐 아니라 佛敎에서도 文字 般若로 衆生救濟의 方便으로서 훌륭한 도구임을 이미 인정하고 있다. 경전의 성립은 불타 在世時와 入滅後 얼마까지는 合誦으로 구전되어 오다가 경전이 언제쯤 이루어졌는가는 확연히 말 할 수는 없지만 대략 아쇼카왕 전후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불타는 청중들이 기억하기 쉽게 韻文의 형식을 갖춘 偈頌으로 설법을 하셨다. 3藏 12分敎라고 하면 經·律·論 3장과 契經, 應頌, 記別, 諷頌, 無問自說, 因緣, 因緣, 本事, 本生, 方廣, 未曾有法, 論議의 12분류를 말한다. 종래에 9分敎였던 것을 뒤에 12分敎로 나눈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을 볼 때 佛敎의 경전이 대단히 文學性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禪文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韻文의 형식을 하고 있는 應頌과 諷頌을 들수 있다. 뒤에 중국에 와서 禪宗이 일어나면서 많은 語錄이 만들어지고 偈頌이 생겨나는 뿌리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比喩와 說話와 詠頌중에서 韻文 文學과 禪文學은 가장 인연이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偈頌文學의 초기 형태를 알아보기 위해 초기의 경전을 살펴보면 가장 초기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경전으로 수타니파타(Stta-nipatha), 담마파다(Dhammapada), 테라가타(Theragatha), 테리가타(Therigatha)등 경전이 모두 가타의 형식을 띄고 있음은 偈頌의 연원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법구경』은 남방과 북방에 모두 전승되고 있는 경전으로 가장 초기의 경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 423편의 偈頌으로 되어 있으며 그때 그때 불타께서 설하신 말씀을 담고 있는 것이다. 팔리어의 경명으로 담마란 진리를 빠다란 길을 의미한다. 5세기 경 붓다고사(Buddhaghosa)가 주석을 붙였다. 『수타니파타』는 북방에는 전하지 않고 오직 일부가「義足品」으로 漢譯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偈頌으로 되어 있어「詩品」이라고도 한다. 모두 蛇品, 小品, 大品, 義品, 彼岸度品의 5장으로 되어 있으며 佛陀의 가장 初期의 言語들을 담고 있다. 특히 제 4장 義品과 5장 彼岸度品이 더욱 오래 된 것으로 전해진다. 『長老偈』와『長老尼偈』는 불타 당시부터의 제자인 많은 비구 비구니들의 偈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는 불타의 偈頌도 들어 있다. 불타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전중에 특히 伽陀의 형식을 하고 있는 것이나 重頌의 경우 운문의 시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러한 운문적인 형식이 뒤에 선가에 내려와 偈頌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처음 偈頌이라는 말이 보이는 것은 王維의 六祖能禪師碑酩幷序에서이다. 여기에서 시를 偈頌으로 말하고 있다. 중국에서 흔히 偈頌의 가장 오래된 모습으로 傅大士와 寶誌公 和尙의 작품을 꼽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唐의 어느 때에 兩者에 가탁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僧璨의『信心銘』도 僧璨의 전기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진위를 알수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僧璨의 친작으로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信心銘』이 僧璨의 작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百丈廣錄』에 이르러서이고『歷代法寶記』나『寶林傳』에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宗鏡錄』에 牛頭法融의 신심명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心銘이라고 하는 것이며『信心銘』과 『心銘』은 유사성이 있어『信心銘』은『心銘』의 別行本인 정치본이었다고 논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禪의 偈頌文學이 왕성하게 일어난 것은 石頭 문하에서이다. 그리고 동시에 馬祖문하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하여 南泉, 위山 아래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온전히 잘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傳燈錄』과『祖堂集』을 빼놓을 수가 없다. 偈頌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偈와 頌이 달리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偈는 가타에서 유래되었으며 頌은 중국의 전통적인 시 형식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詩經』에는 6義가 있으니 興, 賦, 比, 風, 雅, 頌으로 頌은 聖王의 聖德을 송양하는 시문체라 하며 종묘제를 위한 가사체의 시문이라고도 한다. 頌은 형식상으로는 漢詩의 律格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내용면으로 보면 頌은 문자를 빌려 문자 밖의 소식을 읊어 敎外別傳 不立文字의 宗旨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때문에 그 격조와 기운과 함축이 독특하다. 『傳燈錄』과『祖堂集』에 수록된 偈頌의 작자들중에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禪師로 馬祖문하에 長沙景岑, 龜山正原, 香嚴智閑을 들 수 있으며 石頭문하에 石頭希遷, 丹霞天然, 三平義忠, 夾山善會, 洞山良价, 樂普元安, 龍牙居遁, 曹山本寂, 同安常察, 雪峰義存, 雲門文偃, 南嶽惟勁, 翠巖令參, 玄沙師備, 鏡淸, 臨谿龍脫, 淸凉文益등을 꼽고 있다. 중국에 있어서 본격적인 禪詩의 창작은 五祖 弘忍에서 六祖 慧能과 神秀의 南北宗으로 갈릴 당시 선가에서 悟境의 표현이나 傳法時에 詩偈를 사용하면서 비롯되었고 그 후 南宗이 五派로 나뉘고 다시 臨濟와 曹洞의 二宗으로 통일 되면서 더욱 확고한 禪詩文學의 토대를 굳혀 갔다. 특히 唐의 近體詩가 성행될 때 불전적인 偈頌이 近體詩의 押韻과 格調를 따르게 되면서 일반 詩文學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의 禪詩人들로는 唐의 寒山, 拾得, 豊干, 皎然 등과 宋의 雪竇重顯, 天童正覺, 園悟克勤 등의 대가들이 있다. 다음은 선가에서 偈頌을 통하여 法을 전함에 중요하게 쓰였던 양식으로 傳法偈를 살펴보자. 선가의 전통중에서 법을 전하는 전통은 생명이기에 법을 단절됨이 없도록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새삼 강조를 요하지 않는다. 법을 전한다는 것은 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에 傳法偈는 일찍부터 선가에서 偈頌의 형식을 빌려 자리 잡아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偈頌文學의 비중은 매우 크다. 傳法偈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六祖壇經』에서이다. 그 후 傳燈史書에서 법맥을 이어가고 법등을 밝히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하여 傳法偈를 창작하게 되니『寶林傳』에서 그 원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六祖壇經에는 達磨로부터 慧能까지 東土 6代의 傳衣付法頌을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이 傳衣付法頌을 誦出하고 있다. 가사는 이제 전하지 않는다. 자 들어라 나는 그대를 위하여 전의부법송을 송출하리라. 노래로 말씀하였다. 달마대사의 송에 말씀하기를 내가 본시 당국에 와서 가르침을 전하고 미정을 구하노니 꽃 한 송이에 다섯 잎이 열리어 그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이라고 하고 이어서 6조에 이르기까지 조사들의 傳法偈를 송출하고 있으며 별도로 慧能의 偈頌을 읊고 있다. 慧能이 전법의 신표로 가사를 받았다는 것은 神會의 창출임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傳法偈를 처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燉煌本『六祖壇經』의 특징의 하나가 그러한 傳衣說 대신에 傳法偈의 創始를 보여주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燉煌本 이외의 유통되는 단경에는 達磨에서 五祖까지의 傳法偈를 생략하고 慧能의 傳法偈만 싣고 있음을 볼 때 敦煌本 壇經은 가장 오래 된 원형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慧能의 傳法偈를 보자. 심지는 정종을 머금어 법우에 곧 꽃을 피운다. 스스로 법의 정종을 깨달으니 보리의 결과는 저절로 이루어지도다. 心地含情種 法雨卽花生 自悟花情種 菩提葉自成 이러한 傳衣付法頌은 達磨의 예언처럼 慧能의 출현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달마의 傳法偈는 慧能의 전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창안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傳法偈의 출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慧能과 神秀와의 心偈는 傳法偈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神秀와 慧能의 心偈를 대비시켜 비교하여 보자. 이는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悟道頌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神秀의 偈頌을 보자.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이와 같이 神秀가 偈頌을 지어 벽에 붙이자 慧能은 자신의 心偈를 쓰게 하여 그 옆에 붙여놓은 것이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心是菩提樹 身爲明鏡臺 明鏡本淸淨 何處染塵埃 앞의 偈頌은 神秀의 偈頌이고 뒤의 두 偈頌은 慧能의 偈頌이다.『壇經』은 여러 本이 있는데 현재 가장 오래 된 본으로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는 敦煌本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유통본에 실려 있는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 라는 귀절은 敦煌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위 偈頌에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우리의 心性을 점차로 닦아야 하는가 아니면 몰록 깨달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神秀는 점점 닦아야 한다고 말하고 慧能은 몰록 깨달아야 한다로 말하고 있어 이것이 南頓北漸으로 갈라지게 된 근본 입장의 차이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나타내는 귀절은 神秀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라는데 대하여 慧能은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라고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神秀는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고 하는 반면 慧能은 본래 청정하여 닦을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언제든지 慧能의 心偈는 神秀의 게와 대비되어 그 진의를 더욱 잘 알수 있게 된다. 이러한 傳法偈의 역할은 뒤에 傳燈史書가 이루어질 때 중요하게 되었다. 그래서『寶林傳』과『傳燈錄』에서 과거 7佛부터 이어지는 傳法偈가 실리게 되었다. 이후로는 선가에서 필수적으로 법을 인가함에 傳法偈로 그 신표를 삼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禪家의 語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4. 語 錄 語錄은 구어체의 문장으로 스승이나 禪師의 行蹟, 言行, 가르침, 法聞등을 담고 있는 것을 말한다. 語錄에는 반드시 작자가 따로 있는 것이다. 語錄이 출현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은 선종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祖師禪의 시대에 선승들의 일상생활의 대화나 행적을 기록한 語錄이라는 독특한 문헌이 출현하게 된 것은 佛敎가 인간의 평범한 생활종교로서 정착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語錄의 출현은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語錄은 주로 馬祖系의 祖師禪에서 나왔으며 선가의 독특한 인간에 대한 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선종語錄의 특징중의 하나가 師資間의 문답과 평상시의 대화를 회화체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소위 口語(俗語,蜚語)의 佛敎인 것이다. 이는 구어文學인 白話文學의 성립과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선의 語錄의 대부분은 일상생활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지만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의미없는 대화가 아니라 위대한 종교적 체험을 갖는 살아 있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바로 현실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지혜이며 깨달음의 생활체험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깨달음을 향해 무한히 도전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의지의 소산이며 인간승리의 노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인간관을 초래케 하였으며 인간의 말을 기록한 語錄의 출현은 새로운 인간의 종교의 시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語錄의 역할 또한 祖師禪의 출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禪文學의 가장 중요한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바로 語錄은 인간적인 佛敎의 출현을 예고하였으며 인간신뢰의 시대로서 인간성의 자각과 회복을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선문답이라는 특수한 정형적 문답형식이 이러한 語錄의 출현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선문답은 제자와 스승간에 살아 있는 언어로 법을 묻고 답하는 대화로서 선종이 성립되면서 독특하게 생겨난 家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 속에서 평상시에 이야기한 직설을 시자나 제자가 수시로 필록한 것으로 語錄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어 저술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반드시 제 3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당대 주지의 上堂說法과 示衆의 말을 기록한 것이며 일종의 聖典으로서의 의미를 갖음과 동시에 평상시 일상생활의 대화나 행적을 수식하지 않고 충실히 그대로 꾸밈없이 들은대로 기록한 것이기에 저속한 말이 많다. 語錄은 필연적으로 제 3자에 의하여 쓰여지게 마련이다. 평상시의 선사의 언행과 행위를 제자들이 모아서 내는 것이며 그 속에는 禪問答과 上堂說法, 訓示등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語錄은 특별한 요건 속에서 태어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선사들의 語錄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이러한 語錄은 佛敎文學의 성립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니 白話文學과도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또한 俗文學과의 관계도 많이 있다. 語錄은 당시 어디서 그 어떤 사람과의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간과의 육성의 대화이며 현실생활에 밀착된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단순한 일상생활의 무의미한 대화가 아니라 위대한 개성을 발휘한 어느 宗敎家의 전체적인 생활체험에서 발현된 말이며 지혜로서 관철된 불법의 정신을 일상생활에서 전개한 것이도 하다. 이처럼 당대의 祖師禪에서 인간의 대화집인 語錄이 출현하자 隋,唐代에까지 많이 만들어졌던 僞疑經의 생산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僞疑는 사람이 만든 경인데 이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佛敎觀이나 宗敎觀을 주장하고 싶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권위주의와 인간불신의 시대이기에 붓다의 입을 빌려 佛說의 권위에 의지하여 인간이 만든 경전을 말한다. 이러한 語錄의 의미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고 主體的인 삶을 살아가도록 일깨웠던 것이다. 口語體 文學은 기존의 인간의 형식적 틀을 깨고 자유롭고 활달하게 열어준 면에서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 佛敎의 역할은 지대하였고 특히 佛敎文學으로서 매우 괄목할만한 것이다. 이런 구어文學의 맥락에서 變文 또한 중요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語錄과 같은 口語文學에 속하며 佛敎의 譯經의 과정에서 태어난 變文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실 語錄의 성립 근저에는 이러한 變文과 口語로 된 白話文學의 뿌리를 제대로 알아야만 理解가 가능한 것이다. 變文이란 變相이란 말과 대칭되는 말로 문체의 명칭으로 합당하다고 본다. 變文은 佛敎의 중국화 과정에서 대중에 접근하기 위하여 쉬운 문체로 바꾸어 주는 과정에서 태어났으며, 인도문체의 영향으로 운문과 산문의 혼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變文과 白話詩의 관계는 중국고전 소설에서 볼 수 있으며 한편 白話詩의 연원은 變文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보여진다. 오히려 白話詩文學과 變文과의 관계는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中國文學의 역사상 흐름에 결정적인 변화를 준 사건은 佛經의 飜譯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경번역은 이제까지의 중국언어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變文과 白話文學과 俗文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中國文學的 맥락은 특히 禪語錄의 발생에 많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인도의 언어와 중국의 언어는 체계와 어순과 문자까지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인도佛敎를 10세기 이상 줄기차게 받아들이며 번역사업을 꾸준히 해왔다. 불경의 번역은 中國文學史上 단순한 번역文學의 성립에서 그치지 않고 중국문체와 어법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音韻學의 성립에도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佛敎弘法을 위하여 민중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강술한 律師의 법문이나 講師의 禪談과 禪師들의 일상語錄들은 불경번역을 통하여 이루어진 중요한 변화이다. 불경번역과 아울러 俗文學의 일종으로 變文의 탄생은 語錄文學과 매우 밀접한 관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다고 보여진다. 다음은 變文의 발현과 俗文學과의 관계를 알아보자. 중국 서북방 敦煌의 千佛洞에서 많은 고문서가 1907년에 발견 되었다. 그 중에 變文이 출현하였던 것이니 中國文學史에 큰 변화를 끼친 사건이었다. 中國文學에서 중요한 變文은 바로 佛敎의 문체이고 佛敎를 전파시키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으로 시작 되었다. 당의 吳道子는 地獄變(變相을 약칭하여 變이라 함)을 잘 그리는 화가였다. 이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벽화로 바꾸었다는 의미로 변상이라 하였다. 변상과 같이 불경의 내용을 이야기체로 바꾸어 쓴 문장을 變文이라 했다고 본다. 또한 산문과 운문이 혼합된 講唱文學을 變文이라고 하였다. 이런 變文의 시작은 당대 스님들의 俗講이 처음 효시였다고 본다. 그 유행의 시기에 대하여 吳代 王定保의 撫言에 一則의 張枯와 白居易(772~846)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目蓮變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 變文은 늦어도 中唐시대 이전에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變文과 變相은 동시에 유행한 것으로 보이며 늦어도 7세기 말엔 變文을 俗講하는 행사가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變文의 내용은 물론 스님들이 佛敎홍법을 위해 講唱을 하였던만큼 佛敎의 경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차차 청중들의 흥미에 맞추어 더 많은 청중을 끌기 위하여 민간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變文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變文중 佛敎的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다. 太子成道經, 太子成道變文, 八相錄, 降魔變文, 金剛般若波羅密經變文, 佛說阿彌陀經講經文, 妙法蓮花經講 經文, 維摩詰經講經文, 目蓮緣起 등이 있었다. 중국 俗文學과 禪과 깊은 인연이 맺어지게 된 것은 白話文學에 의해서이다. 白話文學은 白話詩로 대표되는데 오늘날의 백화문인 구어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俗文學의 연원에 대하여 “唐代 이래 선승이 자기의 깨달은 바를 偈頌에 나타내고, 俗講에 쓰인 俗文學의 종류는 俗文學의 한 연원이 되었다.”는 견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살펴봄으로 해서 俗文學과 佛敎文學과의 관계 내지 白話文學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俗文學은 그 발생적인 입장에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여야 옳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이다. 禪文學의 형식으로서 선가의 가풍을 가장 폭 넓게 담고 있는 것은 역시 語錄이며 이러한 語錄은 선가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문헌 편집의 방법으로 語錄文學이 갖는 의미 또한 매우 큰 것이다. 일반文學과 구별되는 두드러진 특징을 語錄文學은 잘 보여주고 있다. 語錄 중에 가장 뛰어난 것으로『臨濟錄』『趙州錄』『雲門錄』등 이 모든 語錄들이 금자탑을 이루고 있음을 볼 때 語錄文學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語錄文學은 그 뿌리는 白話詩와 관련을 갖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王梵志를 계승하여 白話詩를 많이 남겼던 寒山詩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이라 할 수 있다. 5. 頌 古 文 學 禪文學의 여러 양식중에서 그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으로 또한 頌古文學을 들 수 있다. 頌古의 시작은 臨濟宗의 汾陽善昭(947~1024)에서 비롯되었다.『傳燈錄』100則의 기연을 뽑아내어 여기에 頌과 拈을 첨가하여 先賢一百則과 大別一百則과 스스로 만든 公案 一百則을 모아 頌古大別三百則을 편집하였다. 이것이 百則頌古의 최초이다. 雲門宗의 4세인 雪竇重顯(980~1052)은 天成年間(1023~1031)에 明州雪竇山을 중심으로 교화를 펼치면서『頌古百則』을 만들었는데 이를 雪竇頌古라고 부른다. 특히 雪竇의『頌古百則』은 汾陽의 頌古보다 훨씬 뛰어난 것으로 시적으로도 아름다운 文學性이 넘치고 있다. 雪竇의『頌古百則』은 뒤에 臨濟宗의 園悟克勤(1063~1135)이 호남의 예州 夾山 靈泉寺등지에서 提唱하여『碧巖錄』10권으로 재편하였다. 雪竇頌古는 園悟의 『碧巖錄 』의 출현으로 평가가 바뀌게 되었다. 碧巖錄이 宗門의 第一書로 높이 평가되면서 왕성하게 유행하고 있는데 반하여 雪竇頌古는『碧巖錄』에 가리어 그다지 주목되지 못했다. 碧巖이라는 말이 유래된 것은 園悟가 처음 雪竇의『頌古百則』을 提唱한 곳이 호남성 예주의 夾山 靈泉院인데 이 절의 법당에 碧巖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당대에 이절에 살던 夾山善會(805~881)선사는 어느날 어떤 스님으로부터 夾山의 경계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偈頌을 지어 대답한데서 유래한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봉우리 뒤로 돌아가고 새들은 꽃을 물고 푸른 절벽 앞으로 떨어진다. 頌古란 당대의 祖師禪의 선승들이 언행과 禪問答의 취지나 어귀에 대하여 偈頌이나 송으로서 간결하게 독자적인 해석을 하여 宗義를 선양하는 것이며 拈古란 古則公案을 염롱한 것으로 직절간명하게 고칙공안을 비평한 것이다. 고칙공안에 偈頌을 붙이는 것은『祖堂集』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듯이 中唐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晩唐에 이르러 갑자기 많이 유행하였다. 雪峰,玄沙,雲門,法眼 등의 선승은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宋代의 頌古文學은 唐末 5代의 雲門文偃과 法眼門益에서 비롯된 古則의 代語 別語 着語 下語의 풍조를 새롭게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송대의 文學的인 선은 강남의 풍토와 시의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선을 통한 체험과 깨달음의 세계를 文學的인 훈련 없이는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당대의 祖師禪이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되는데 반하여 송대의 선은 선의 실천을 통한 마음의 수양과 더불어 의식적으로 文學的인 공부를 하지 않고선 선풍을 전개할 수 없는 선을 펼쳤다. 汾陽과 雪竇의 頌古百則은 이러한 文學的인 宋代禪의 방향을 제시한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看話禪 또한 頌古文學과 연관이 깊이 맺어져 있다. 다음은 頌古文學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자. 臨濟宗의 白雲守端(1025~1072)이 110칙 頌古를 지었으며 大慧도 뒤에 東林과 상대하여 110칙 頌古를 지었다. 또 曹洞宗의 投子義靑, 丹霞子淳, 宏智正覺등이『頌古百則』을 지어 일세를 드날렸다. 뒤에 園悟의『碧巖錄』을 모방하여 그것을 제창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元代의 林泉從倫이『空谷集,』,『虛堂集』을 萬松行秀가『從容錄』을 각각 편집하였다. 宏智와 眞歇淸了의『信心銘拈古』도 있다. 大慧의『正法眼藏』과 이를 이은『聯燈會要』는 가장 잘 집대성한 송고집으로서 文學的인 영향이 심대하였다. 그리고 無門慧開의『無門關』은 48칙을 만들었다. 대체로 선가의 頌古文學은 후대로 내려와 禪文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禪家의 문학 양식중에서 가장 세련된 형식이 頌古文學이라 할 수 있다. 頌古文學의 가장 방대한 집대성은 高麗 眞覺慧諶에 의해 이루어진『禪門拈頌』이라 할 것이다.『禪門拈頌』에서는 석가모니부로부터 시작하여 西天 28祖와 東土 6祖를 비롯하여 중국의 5家 7宗의 선사들을 총망라 하여 싣고 있다. 이 점에서 가장 완벽한 편집을 이루었다. 이상과 같이 禪文學의 脈絡을 살펴 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佛敎文學의 범주에 대하여 그 문제점을 짚어보게 되었으며 그 의미와 범위 등이 어느정도 윤곽은 드러났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偈頌文學과 語錄, 頌古文學등 선문학의 형식에 대하여도 알아 보았다. Ⅲ. 寒山詩의 形成背景 한 인간의 思想을 이해하는데는 반드시 그 역사적, 사회적 또는 인간관계의 배경을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든 인간은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寒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유일한 시집 외에는 아무것도 생애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주변적인 배경을 살펴봄으로 해서 그의 文學과 思想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역사속에서 태어나기에 어떤 경우든 역사의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寒山의 생존 연대는 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대략 8세기를 전후한 인물인 점에서는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寒山이 살았던 역사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우선 그 시대의 개괄적인 면을 보고 寒山詩의 서문을 썼다고 전해지는 閭丘胤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지기인 豊干과 拾得과의 인간관계에 대하여도 살펴보고 또 王梵志와 白話詩의 관계를 살펴보며, 그 당시 寒山이 은거하였던 天台山의 환경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서 寒山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寒山의 佛敎思想的 배경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隱逸思想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寒山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환경을 정확히 집어보아 그의 시세계의 바탕을 풀어가보자. 寒山이 담고 있는 세계는 여러가지로 복합적이지만 그의 사상적 근간은 역시 佛敎思想이라 할 수 있다. 1.傳記 및 人間關係 寒山의 전기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는 완전히 不世出의 隱遁 詩人으로 살았으며 그의 시가 세상에 남아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閭丘胤이라는 사람과 國淸寺 스님 道翹에 의해서이다. 그는 언제 출생하여 언제 죽었는지 정확한 자료를 찾을 길이 없다. 종래에는 당 초기 7,8 세기의 인물로 보았지만 물론 이러한 견해의 확실한 자료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그의 시에 있어 언어 사용을 비춰 볼 때 8세기 이후의 인물로 보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현재 寒山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랜 것은 風穴語錄과 太平廣記라 할 수 있다. 太平廣記에는 寒山이 大曆(766~799)년간에 天台 翠平山에 은거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石樹 濟岳의「和三聖詩自序」에는 내가 간지 300백년 위에 楚石이 있고 楚石이 간지 500백년 위에 三聖이 있으니 시절을 따라 일을 바꾸니 풍속과 운이 신표처럼 꼭 들어맞았다. 그들은 盛唐 초기에 있었다. 去余三百年之上 有楚石 去楚石五百年之上 有三聖 時移事易 風韻若合符節 彼在盛唐國初者 라고 말하고 있다. 楚石의 생존년대가 1296년에 태어나 1370년에 入寂하였으니 이보다 500년 앞을 따져보면 700~800년 사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盛唐은 玄宗 開元부터 代宗 大曆까지의 唐詩가 가장 성하던 시기를 말하고 있으니 대개 8세기 초에서 말엽까지라 할 수 있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전기적 자료는 그의 시집인『寒山子詩集』의 序文이 유일하다. 寒山子詩集의 서문은 閭丘胤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사실성 여부는 뒤에 가서 살피기로 하자.『寒山子詩集』의 사실성은 거의 역사적으로 의심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寒山詩를 직접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한산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하여 한산의 모습을 알 게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시는 드물게 寒山 자신이 그 자신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시이다. 176 지난 해에 봄 새가 울 때에는 형과 아우를 생각했더니 금년에는 가을 국화 만발해 태어나던 시절을 생각하나니 푸른 물은 굽이 굽이 흐느껴 울고 누른 구름은 사방에 자욱하네 슬프다 한평생 백년 동안을 함양 서울 생각해 애를 끊나니. 去年春鳥鳴 此時思弟兄 今年秋菊爛 此時思發生 綠水千場咽 黃雲四面平 哀哉百年內 腸斷憶咸京 그는 아마도 고향을 생각하는 시름에 젖어 두고 온 옛 고향을 생각하는 시를 적었으리라 보여진다. 그의 시에서도 정확히 전기를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알 수 있는 시이다. 그러나 한산의 생애를 정확히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전해지는 자료조차 상당부분 신화적으로 각색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자취는 알수 없어도 그는 분명히 역사의 바깥에서 철저히 자유를 추구하며 고독하게 살았던 시인인 점은 분명하고 그의 그러한 활달한 사상의 자취는 시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寒山詩는 옛부터 禪家에서 많이 읽히고 애송되어 왔다. 寒山詩가 담아내고 있는 세계는 자연과 삶의 세계를 道를 통하여 새롭게 통일 시키고 그러한 도에 따라 살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寒山이라는 이상경을 상정하여 산중에 사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때로는 세상에 대한 비판을 들어내기도 하고 승가에 대하여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주조는 언제나 진정한 도를 깨우치는 것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가 시로 읊고 있은 것은 자연의 세계가 큰 흐름을 이루고 있지만 때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寒山에 대하여는 역사적인 접근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의 삶의 생애와 기록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은둔자로 살다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硏究가 진척되어 그의 생애에 대한 硏究는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文學的인 측면의 硏 究 또한 그런대로 꾸준히 이루어져 왔지만, 그러나 그의 佛敎 思想的인 硏究는 오해려 부진한 편이다. 최근 일반적으로 寒山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근래에 나온 佛敎辭典을 살펴보자. 寒山拾得: 唐 8-9세기 경, 天台山(浙江省)國淸寺에 隱棲하였던 豊干문하 風狂의 高僧, 寒山과 拾得. 寒山은 산중의 寒巖幽窟에 머물고. 拾得은 豊 干에게 주워다 길러짐으로 인연된 이름이라고 한다. 실재인물인가 어떤가 는 不明하지만 9세기에는 전설화 되었다. 寒山이 撰했다고 하는『寒山詩 集』(付 拾得, 豊干의 詩)은 그의 禪機가 풍부한 脫俗性, 時俗에 대한 諷刺 라고 하는 詩風이 宋代 邵雍의 擊壤集의 一派에 繼承되었다. 이와 같이 寒山 拾得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최근에까지 대부분 高僧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전에도 나와 있는 바와 같이 8,9세기 사람으로 9세기 경에는 이미 전설화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의 영향이 후대에도 계승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寒山의 실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공인물로 보기에는 그의 시가 주는 인상은 사실적인 면이 너무나 확실하다. 그의 연대에 관한 기록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당이나 그 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중당의 어지러운 혼란의 시기에 과거를 통하여 정치에 나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강남과 북쪽을 방랑하다가 세상을 떠나 은둔의 길을 택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寒山詩 자체에서 드러내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와 같은 추측은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의 여러 시편에서 그런 불우한 선비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의 배경에는 禪의 정신이 가장 보편적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고 이는 그의 은둔수행자로서의 삶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동시에 그는 세속화 되어진 佛敎界에 상당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도교적인 사상의 일단도 드러내고 있으며 유교적인 소양도 상당히 갖춘 것으로 짐작 된다. 그러면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유일한 전기적 자료로서『寒山子詩集』에 실려 있는 閭丘胤 序文에 대하여 살펴보자. 1) 閭丘胤 序文 寒山의 생애를 전해주는 유일한 자료는『寒山子詩集』의 閭丘胤 序文이다. 서문에 실린 寒山의 모습을 보면 風狂之士로서 寒山에 은거하며 國淸寺에 내려와 拾得을 만나 음식을 얻어가기도 하고 國淸寺 스님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주관과 자존심이 뚜렷하여 당시 승려들이 꾸짖으면 하하 크게 웃고 혹 침묵하다가 가기도 하고 했다고 전한다. 늘 가난했고 몸은 초췌하고 깡말랐다. 그러나 偈頌과 시를 짓고 말이 이치에 부합됐다고 한다. 서문에는 寒山이 한암의 바위굴 속에 들어가 자취를 감춘 후 閭丘胤이 國淸寺 스님 道翹에게 寒山詩를 모아 시집을 만들도록 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國淸寺 스님 道翹에게 명하여 寒山의 행장과 대나무, 나무, 석벽에 써 놓은 시, 또 촌가의 벽에 써 놓은 글귀 300여수와 拾得이 토지신 묘의 벽에 써 놓은 게문들을 모두 모아 편집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乃令僧道 翹, 尋其往日行狀, 唯於竹木石壁書詩, 幷村수 人家廳壁上所書文句三百餘 首, 及拾得於土地堂壁上書言偈, 幷纂集成卷. ) 이처럼 閭丘胤이 國淸寺 스님 道翹에게 명하여 寒山이 산간의 나무나 대나무, 바위벽, 혹은 촌의 곶간이나 인가의 관청 벽 위에 적어 놓은 시와 拾得이 사당의 벽에 써 놓은 偈頌을 모으도록 하여 시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다분히 閭丘胤과 道翹의 손을 거친 寒山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寒山의 전설중에 가장 일찍 나온 것은『寒山子詩集』의 권두에 보이는 서문으로 실제 閭丘胤이 보고 쓴 것이라기보다 村老나 道翹에 의해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寒山의 貞觀(627~649) 생존설은 奉恩寺本板本을 보면 閭丘胤 序文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拾得詩의 서문격인 拾得錄과 이 시집의 뒤에 있는 志南의「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에 나타나 있다. 閭丘胤 서문은 연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志南의 記에서는 분명히 宋 孝宗 淳熙16年(1189)으로 연대를 밝히고 있다. 비록 志南이 기를 쓴 연대는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틀림 없겠으나 그가 말하고 있는 한산의 貞觀 생존설에 대하여는 많은 의문을 갖게 한다. 寒山詩의 내용을 보면 貞觀說은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보인다. 그러나 志南은 記에서 오히려 傳燈錄이 잘못되었다(今傳燈所錄誤矣)고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志南이 말하는 전등록의 잘못된 내용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傳燈錄에서 한산의 연대를 모른다고 한 말에 대하여 지적하고 정관설을 내세운 것이라고도 보인다. 사실 내용을 볼 때 志南의 記와 傳燈錄과 여구윤 서문의 내용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志南의 記와 閭丘胤 서문간의 관계는 분명하지가 않지만 상당히 내용이 비슷함을 많이 갖고 있다. 어떤 이는 閭丘胤 서문을 후대의 僞作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寒山의 연대를 지금 와서 정확히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리고 과연 拾得詩의 서문을 閭丘胤이 썼는지도 알 길이 없다. 閭丘胤이라는 이름은 당 高宗에서 宜宗 때 사이 道宣의『續高僧傳』 권 25에 智嚴條에 閭丘胤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한산자시집 서문의 작자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 閭丘胤이라는 인물의 실재성에 대하여 이러한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胡適이다. 그는 寒山을 白話文學의 시인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면서 王梵志의 후예로 보고 있다. 과연 閭丘胤이 실재 인물인지 혹은 가탁된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로 寒山의 생애를 밝히는 가장 오래 된 자료는 바로 閭丘胤의 『寒山子詩集』서문이 유일한 것이니 달리 자료를 의지할 수 가 없는 것이다. 寒山의 생애의 불분명한 사실은 시집의 서문에서조차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 되고 있다. 寒山子는 어떤 사람인지 상세하지 않다. 고로들이 보아 온 이래 모두 가 난하고 광기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天台山 당흥현 서쪽 칠 십 리에 있는 한암이라는 곳에 은거하고 있었다. 대개 그곳에 살았지만 때로는 國淸寺에 가기도 했다. 國淸寺에는 拾得이 절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평상시에 음식 찌꺼기를 대나무통에 담아 두었다가 寒山이 오면 그것을 짊어지게 해서 보냈다. 詳夫寒山子者, 不知何許人也. 自古老見之, 皆謂貧人風狂之士, 隱居天台山 唐興縣西七十里號爲寒巖. 每於玆地, 時還國淸寺. 寺有拾得, 知食堂, 尋常 收貯 餘殘菜滓於竹筒內, 寒山若來, 卽負而去. 여기서 우리는 寒山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미 寒山의 생존시부터 그는 존재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는 天台山에 은거하여 살았다는 것. 그리고 寒山의 생존년대를 측정하는데 문제를 삼게 된 縣의 이름에 대하여서 밝히고 있다. 위의 閭丘胤의 서문에 나타난 寒山의 모습은 閭丘胤이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이다. 古老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閭丘胤 서문에 나타난 寒山의 모습은 고로들의 눈에 비친 寒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고로가 누구인지는 드러나 있지 않다. 당시의 天台山의 國淸寺 老長들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산중 마을의 촌로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寒山은 가난하고 광기에 서린 선비(貧人風狂之士)>로 보였던 것이다. 광기 서린 가난한 선비야말로 寒山이 세속적인 눈에 비친 모습이었다. 그리고 寒山의 전기에 있어서 혼선을 일으키는 것 중에 하나는 과연 寒山이 出家를 했느냐의 문제이다. 후대의 여러 자료들은 대부분 寒山을 출가한 스님으로 보고 있으나 현대에 와서 일부 학자에 의해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 위에서와 같이 寒山은 단지 風狂之士로 비춰졌던 것이다. 뒤에 역사적 자료를 보면 일반적으로 선사로 지칭되기도 하고 시승으로 말하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寒山은 일생을 절에서 보내지 않고 그가 한평생 은거했던 천태산 국청사 뒷산의 한암을 토굴 삼아 그곳에 머물면서 가끔 國淸寺의 拾得을 찾아와 음식을 얻어 가곤 하였다. 寒山이 출가를 하였는가의 문제는 寒山詩를 해석함에 있어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한산을 꼭 출가자가 아니라고 부정할만한 근거 또한 희박한 것도 사실이다. 이 점은 현재의 상황에서 결론을 내리기는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보이며 차후에 다시 정확한 자료를 의거하여 살펴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다른 한편의 寒山 모습을 전하는 것을 보면 전혀 상반된 것을 알 수 있다. 寒山의 비참한 꼴은 거지와 같고 얼굴은 여윌 대로 여위었지만, 그의 일 언일구는 모두 진리를 담고 있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이치에 합당한 것이 다. 대략 그의 말이 나타내는 것은 빈틈없이 현묘하고 깊은 뜻이었다. 且狀如貧子, 形貌枯悴, 一言一話, 理合其意,沈而思之, 隱況道情, 凡所啓言, 洞該玄默. 이처럼 寒山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리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진정한 寒山의 모습에 가까운 것인가? 물론 寒山은 文殊의 화현으로 신화화 될만큼 비범한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범속한 세속인의 눈에는 미치광이로 보였을 수 도 있다. 마치 광기의 역사에서처럼 세속의 논리에 찌든 눈에는 보살의 화현인 寒山의 가난한 모습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寒山 자신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217 寒山이 무슨 말을 내면 그만 모두 미치광이라 하네 일이 있으면 맞대놓고 말하기에 그러므로 항시 남의 원한을 산다 마음이 참되면 말이 바로 나오나니 곧은 마음에는 겉과 속이 없기 때문 죽음에 다달아 내하를 건널 적에 거기에 무슨 잔말 있을 수 없는 것을 아득히 어두운 황천으로 가는 길 그저 제가 지은 업에 끌려갈 뿐이니라. 寒山出此語 復似顚狂漢 有事對面說 所以足人怨 心眞語出直 直心無背面 臨死度奈河 誰是루라漢 冥冥泉臺路 被業相拘絆 모두들 寒山을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실은 바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잘못된 소견일 뿐이다. 참된 말은 내외가 따로 없기 때문에 항상 바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업을 짓고 황천에 끌려갈 때를 생각하면 寒山의 삶은 참으로 옳바른 것이다. 정말 잘못된 것은 세속의 업을 짓고 있는 그들이다. 누구나 죽음이 다가오면 허물어지고 마는 것임을 잘 알아야 할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寒山의 성격이 대단히 직선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스스로도 <일이 있으면 맞대놓고 말하기에/ 그러므로 항시 남의 원한을 산다/ 마음이 참되면 말이 바로 나오나니/ 곧은 마음에는 겉과 속이 없기 때문>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다음 시 역시 한산의 이런 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201 요즘의 세상 사람 한산을 보고 저희끼리 이르기를 미치광이라 하네 얼굴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몸에는 언제나 누더기 감았을 뿐 내 말은 세상 사람 알지 못하고 남의 이야기 나는 말하지 않네 내 한마디 알리나니 오가는 사람이여 이리 오려무나 이 한산을 향해 오라. 時人見寒山 各謂是風顚 貌不起人目 身唯布袋纏 我語他不會 他語我不言 爲報往來者 可來向寒山 세상 사람들은 한산을 향해 모두 미치광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한산은 매우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이 있어 모든 사람을 향해 한산으로 오라고 말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는 한산의 현실적 갈등과 고민을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현실과의 괴리를 겪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한산의 모습은 상당히 신화화 되어 있다. 寒山의 신화적 요소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여기서 새로운 신화 분석의 틀을 갖고 寒山의 신화를 다시 해석할 때 여러가지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寒山의 신화는 송대 이후의 작업이라고 보여진다. 당말 이전에는 매우 소박하고 사실적인 寒山의 단순한 모습만 보인다. 寒山의 신화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시집 서문의 閭丘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寒山을 文殊의 화현이라는 신화로 윤색된 寒山을 적고 있음도 사실은 道翹를 비롯하여 國淸寺의 스님들로부터 듣고 적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寒山신화의 많은 부분은 아마도 國淸寺 스님들에 의해 지어진 가상적 인물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寒山의 신화화 되는 과정은 민간 신앙과 결부되어 나타났으리라고 생각된다. 寒山詩集 서문에 나타나 있듯이 寒山은 文殊의 화현으로 拾得은 普賢의 화현으로 또 豊干은 阿彌陀의 화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후대의 일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國淸寺에 豊干의 자취가 남아 있고 호랑이의 발자국이 있으며 豊干이 평소에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고 전해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閭丘胤의 문제는 여려 사람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그의 실재 여부와 생존 년대에 관해 아직까지 뚜렷하게 단졍을 내릴만한 입장은 아니다. 閭丘胤의 이름은『續高僧傳』권25의 智嚴傳에 麗州자사로 이름이 나오지만 전혀 관계 없는 인물이라고 보인다. 閭丘胤 서문의 관직명은 이름상에는 아무런 헛점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올랐던 인물의 이름이 당시 어떤 자료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사실이 알 수 없는 일이다. 비슷한 이름으로 閭丘均이 있어 五祖 弘忍禪師碑를 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일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한편 이에 반하여 그가貞觀 16년부터 4년간 臺州刺使로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赤城志를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으니,“閭丘胤은 실재인물이다. 그는『寒山子詩集』의 서문을 썼다는 것은 결정적이다. 이로서 역사적 실재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라고 역사적 사실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閭丘胤의 서문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런 문제중에 地名의 문제와 연대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景德傳燈錄』에는 唐興縣을 당초의 이름이었던 始豊縣으로 한 것은『續高僧傳』에 의해 閭丘胤이 그 때 사람으로 보여 서문의 縣名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寒山이 貞觀 시대란 설에 대하여 부정하는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唐興縣이라는 지명이다. 이 지명이 개명된 것은 高宗 上元 2년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閭丘胤의 서문은 당 高宗 上元 2년 이후의 작품이며 이는 후대에 閭丘胤을 가탁한 작품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唐興縣의 지명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이 高宗 上元 2년(675)이기에 7세기 下代가 된다. 그러기에 貞觀初라는 閭丘胤의 서문은 역사성이 없다고 보고있다. 이같이 한산의 생애에 관해 貞觀說 은 南宋의 사문 志南의 후서에서 주장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寒山의 생애는 閭丘胤의 서문에 의한 자료를 통해 볼 때 많은 의문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代나 北宗에서 편찬된 여러가지 僧傳이나 禪籍에도 주로 선승과의 관계에 있어서 寒山 拾得을 서술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寒山의 출생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이를 두루 살펴보면 1.貞觀說(633) 2. 正元說 3. 宣天說 등이 있다. 또 慧能이 태어난 때가 貞觀 12년(638)이니 寒山이 慧能의 후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大曆(766~779) 년간 天台山에 은거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당 玄宗(713~714) 때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胥端甫는 寒山을 隋末 唐初의 호걸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보고 있다. 일개 지사로서 영웅적 신분으로 天台山 寒岩에 숨어들어 영웅적인 말로를 보여주고 있다고 그는 본다. 이는 매우 비사실적인 상상이라고 보여진다. 또 혹자는 寒山의 姓은 龐, 名은 任運, 夾西 咸養人 출신으로 부유한 농가출신으로 소년시 풍류와 방탕을 즐기고 학업을 이루지 못해 과거에 낙방하여 출세길이 막히고 가난해졌으며 가족의 냉대를 받게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견해는 매우 비현실적이며 근거가 희박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성과 이름이 龐이며 任運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任運이라 한 것은 특히 그렇다. 여기서 任運은 선가에서 자유자재한 해탈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지 결코 寒山의 이름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任運은 오히려 寒山의 독특한 禪思想을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의 자료 평가를 살펴보면 寒山의 또 다른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唐末의 詩僧 貫休(832~912)의 詩중에 赤松山에 머무는 서도사에 준 시의 귀절 중에 <그대는 寒山子를 좋아하고 노래는 오직 낙도가이다.> 라는 귀절이 있는데 이 시는 85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당말의 시인 李山甫도 시에서 寒山子를 多才의 시인, 수도자로 晋代의 대표적인 산수시인 謝靈運과 나란히 칭송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시승 齊己의 작으로 <저궁을 묻지 말라>는 연작시중 제 15수로서 여기서 自心自了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은 寒山의 게를 읊는 것도 필요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은 寒山이 貞觀시대의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시가 寒山詩 중에 있으니 한번 보자. 291 내 보니 장승요는 뛰어난 성질 묘하게도 양나라에 태어났고 도자 또한 보통에서 뛰어난 솜씨 휘두르는 저 붓끝은 익숙하게 진실을 나타내는 특별한 의기 용과 귀신 달리는 높은 그 정신 허공을 모양뜨고 티끌 자취 그리어도 끝내 지공 모습은 그리지 못했나니. 余見僧繇性希奇 巧妙間生梁朝時 道子飄然爲殊特 二公善繪手毫揮 逞畵圖眞意氣異 龍行鬼走神巍巍 饒貌虛空寫塵跡 無因畵得志公師 만약 위 시가 寒山이 지은 것이 확실하다면 위시는 바로 寒山이 貞觀 이후의 인물임을 증명해주는 시라고 할 것이다. 위의 시에서 張僧繇는 구름과 용 인물의 그림을 잘 그리던 梁나라 때의 화가이고 그에 의해 나온 畵龍點睛의 고사는 유명한 것이다. 그리고 道子는 吳道子를 일컬으며 당의 玄宗 때 사람으로 그림의 성인이라고 불려졌다. 誌公은 양나라 때 고승으로 梁武帝의 존경을 받았던 스님이다. 張僧繇에게 誌公和尙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나 誌公和尙이 12관음의 상을 나타내자 끝내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는 道子가 시에 나오는 것이다. 道子의 연대는 확실히 貞觀 이후건만 시에 나오는 것을 보면 寒山이 貞觀 때라고 하는 주장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시 또한 시대적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시중에 하나이다. 寒山詩 중에는 매우 예외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169 내 들으니 양무제의 조정에는 사의의 모든 어진 선비들 보지와 만회사 사선과 부대사 부처님 한평생의 가르침을 드날리고 스스로 여래의 사자라 생각했네 스님들 위해 큰 절을 이룩하고 부처님의 교리를 깊이 믿었네. 自聞梁朝日 四依諸賢士 寶誌萬廻師 四仙傅大士 顯揚一代敎 作持如來使 建造僧伽藍 信心歸佛理 바로 이 시도 寒山이 貞觀 때의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寒山이 어느 시대에 생존하였는가의 문제는 이제까지 胡適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논의되어 왔다. 그렇지만 아직 뚜렷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것은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 모두들 자기 견지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보는 시각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의 동양학자의 눈을 빌려 寒山을 바라보면 어떨까? 잠시 Waley 의 평을 들어보자. 중국 시인 寒山은 8, 9 세기 사람이다. 그와 그의 형제는 농사를 지 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와 인연을 끊고 처자와 이별하고 여러지방을 방 랑하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 그 후 마침내 寒山에 숨어서 寒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은거지는 사원과 도관으로 유명한 天台山에서 25 마일쯤 되는 곳 이고 寒山도 가끔 방문했다. 그의 시중에 하나로 100세가 넘은 자신 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과장된 것이지만 그가 장수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시에 있어서 <寒山>은 지명이지만 또 하나의 심경을 나타내는 경 우도 많다. 객관적 입장에서 상당히 정확한 사실을 충실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신비적이거나 신화 속에 감춰지지 않은 寒山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閭丘胤 서문에서 전하는 寒山은 상당히 신비화 된 모습이다. 이는 이미 신화화 된 寒山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寒山을 文殊의 화신으로 拾得을 普賢의 화신으로 신화화 시킨 것은 아마도 후대의 가탁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寒山이 생존했던 시대의 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閭丘胤의 서문은 많은 점에서 사실 을 벗어나 신화적으로 윤색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 깔려 있는 寒山의 소박한 은자의 모습을 다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寒山의 진정한 모습과 또 그의 文學이 옳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2)交遊關係 寒山을 이해하는데는 豊干과 拾得과의 관계를 잘 알아야만이 寒山의 세계를 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3인은 어쩌면 한 세계를 공유하였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정신의 세계에 있어서 3인이면서 동시에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사람의 관계는 많은 부분이 신화화 되어 있다. 寒山과 拾得과 豊干과의 사이를 읊은 寒山詩를 보자. 39 그윽한 곳에 숨어 살기 길들어 잠깐 國淸寺로 찾아가 본다. 때로는 豊干 노인 찾아도 보고 이내 拾得의 처소도 찾아본다. 홀로 돌아와 찬 바위에 오르니 마음 털어 이야기 할 아무도 없구나. 근원 없는 물 깊이 찾으니 근원은 끝이 나도 물은 끝이 없어라. 慣居隱幽處 乍向國淸中 時訪豊干老 仍來看拾公 獨廻上寒巖 無人話合同 尋究無源水 源窮水不窮 寒岩에 숨어 살면서 가끔 拾得과 豊干을 찾아 國淸寺로 갔다 와서 아무도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이 없는 외로움을 시로 읊고 있다. 그는 홀로 산의 바위굴에 사는 심사를 이와 같이 읖조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벗어나 3인은 참으로 진경 속에 살다 갔다. 이와 같이 豊干과 拾得은 寒山과의 관계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을 신화화 되여 각각 文殊 普賢 阿彌陀의 화현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拾得의 시를 통하여 寒山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寒山이 拾得의 형의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시이다. 332 원래 이 습득이란 우연한 일컬음이 아니다 따로이 친한 권속은 없고 한산 그이가 내 형이네 두 사람 마음이 서로 같나니 세상 인정을 누가 따르랴 만일 나이의 많고 적음 물으면 황하 몇번이나 맑았더냐고. 從來是拾得 不是偶然稱 別無親眷屬 寒山是我兄 兩人心相似 誰能徇俗情 若問年多少 黃河幾度淸 위 시에서 拾得은 寒山을 언제나 형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로 보아 한산이 위였음을 알 수 있다. 津田左右吉은 신화성에 대하여 寒山의 설화가 발전함에 따라 시도 부가되어 첨가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상당히 역사에 충실하게 寒山을 硏究하고 있는 것이다. 天台山 國淸寺와의 관계와 豊干, 拾得과의 교섭을 말하는 시는 이같은 과정의 윤색을 보여주고 있다. 선승의 偈와 다른 詩의 경우도 대개 뒤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 된다고 보고 있다. 그의 인간상이 신비화 됨에 따라서 그와 같은 신비한 말과 같이 높은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五臺山記』에 보면 豊干이 寒山에게 오대산에 함께 가자고 하며 같이 가면 同流가 될 것이고 자기와 더불어 가지 않으면 동류가 못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寒山은 않가겠다고 한다. 豊干은“너는 나와 동류가 아니다.” 라고 하자 寒山이 묻기를 오대산에 뭐하러 가느냐고 한다. 豊干이 말하기를 文殊菩薩을 친견하러 간다고 한다. 寒山이 다시 말하기를 “그대는 나와 동류가 아니다.”고 대답한다. 閭丘胤이 寒山을 만난 것은 國淸寺에서 寒山과 拾得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았을 뿐이다. 이내 寒山과 拾得은 곧 한암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 때 사람을 시켜 약과 옷을 보냈으나 寒山은 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로는 한암의 바위는 영원히 닫혔고 아무도 寒山과 拾得을 본 사람이 없었다. 寒山의 설화가 윤색된 부분을 보면 豊干과의 관계에서 豊干이 閭丘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미리 예언을 한다는 대목과 또 마지막 한암이 갈라졌다는 것은 물론 사실성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寒山詩의 서문중에 신화화 된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중 하나는 閭丘胤이 丹丘의 관리를 제수 받아 臨地로 떠나기 전에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의사를 불러 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 아프고 심해졌다. 그 때 豊干이라고 하는 禪師가 나타나 天台山 國淸寺에서 왔다고 말했다. 豊干선사에게 치료를 부탁하자 물을 뿌려 났게 하였다. 자사가 감사한 마음으로 台州에 가는데 그 곳에는 스승으로 우러러 모실만한 분이 누가 있는지 소개를 부탁 드리자 豊干선사는“그 분은 보게 되어도 알아 차리지 못하고, 알아 차리는 힘이 있어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보려고 한다면 그 겉모습에 의해 보지 않아야 볼 수 있게 됩니다. 寒山은 문수보살인데 國淸寺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拾得은 보현보살입니다. 그 모습은 거지나 미친 사람과도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처럼 상당히 신비한 모습으로 윤색되어진 寒山과 拾得과 豊干의 관계를 閭丘胤은 서문에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신화적으로 윤색되었다 하더라도 寒山이 존재했던 그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색되기 이전의 소박한 寒山의 모습 속에 담겨 있는 原型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寒山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寒山의 모습은 아마도 國淸寺 스님 道翹의 눈에 비친 인상이 閭丘胤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豊干은 國淸寺에서 절을 위해 쌀을 모아 오기도 하고 밤이 되면 노래를 부르며 혼자 즐거워하기도 하며 살았던 스님이고 拾得은 豊干선사가 주워다 길러서 拾得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하여 진다. 寒山과 拾得과 豊干이 서로 어울려 아무도 모르지만 높은 경지를 스스로 즐기는 것을 拾得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331 한산은 제 한산이요 습득은 제 습득이다. 어리석은 이들 어찌 보아 알거냐 풍간이 있어 서로 알아주리라 보는 때에는 어디 가 찾으려는고 묻나니 이 무슨 인연인가 내 말하노라 무위의 힘이라고 寒山自寒山 拾得自拾得 凡愚豈見知 豊干却相識 見時不可見 覓時何處覓 借問有何緣 向道無爲力 세 사람의 관계를 잘 나타내주는 시이다. 이 세사람의 세계를 이어주는 인연은 다름 아닌 무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세속적인 어떤 관계가 아니라 바로 도의 세계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寒山과 拾得의 이상한 모습을 아무도 세상사람들은 알지를 못했다. 오직 豊干만이 그를 알고 이해하여 주었다. 세 사람의 시의 세계도 매우 비슷하여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이며 때로는 서로의 시가 모방된 모습도 보이고 있다. 다음 시도 그러한 예 중에 하나가 된다. 한산시와 습득시를 비교하여 보자. 162 혼자 한가로이 높은 스님 찾나니 연기 산은 층층이 몇 겹이던가 스승이 친히 돌아갈 길 가리키니 달은 어느새 둥근 등을 달았네. 閑自訪高僧 烟山萬層層 師親指歸路 月괘一輪燈 361 스스로 한가로이 높은 스님 찾으나 푸른 산에는 흰구름 모여 드네 동쪽 집에는 한 놈 어린애더니 서쪽 집에는 뭇 놈들 모였구나 오봉은 허공에 높이 솟았고 벼락은 맑은 물이 넘쳐 흐르네 스승의 지시 따라 돌아가나니 달은 떠 한 수레바튀 동불일러라. 閑自訪高僧 靑山與白雲 東家一稚子 西舍衆群群 五峰聳雲漢 碧落水澄澄 師指令歸去 月下一輪燈 앞의 시는 寒山의 시이고 뒤의 시는 拾得의 시이다. 두 시에서는 어떤 고승을 찾아 가는 말로 시작 되고 있으며 마지막 또한 다 같이 밝은 달을 등불로 비유하여 마치고 있다.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도 靑山 白雲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둘이 함께 찾아 갔던 고승은 豊干이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승은 그들에게 돌아갈 길을 가리켰다는 말은 곧 법을 배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두 사람이 함께 삶을 공유하는 생활공간이 같았을뿐 아니라 시의 셰게도 서로 밀접하게 관계를 갖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寒山과 王梵志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寒山詩의 특징중에서 白話詩的 특징을 뺄수는 없다. 이런 白話詩는 어디서부터 영향받은 것일까? 寒山의 白話詩의 전통은 王梵志로부터 물려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王梵志는 佛敎詩人으로 많은 白話詩를 남기고 있으며 王梵志와 寒山과의 관계는 백화시의 계승자라고 하는점에서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가 寒山과의 관계를 밝히는 자료로 최초로 역사에 남아 있는 자료는 風穴 延沼의 法語라고 할 수 있다. 王梵志의 생존 연대에 대하여 胡適은 590년에서 66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王梵志에 대하여 入矢義高는 다음과 같이 胡適과는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 王梵志는 이제까지는 당의 초기 인물로 생각되어 왔지만 나는 그의 시대를 뒤로 본다. 아무리 빨라도 8세기 전반 이후의 사람이라고 본다. 당 초기라 고 보기는 어렵다. 8세기 이후에는 구체적으로 천보의 난 이후가 된다. 그 전란은 당의 사회와 문화에 큰 변혁을 주었지만 佛敎역사에서도 큰 변화 를 가져왔다. 전란 이전에는 사원이 왕후와 문벌귀족의 비호아래 고원한 교리의 탐구에 진력하고 민중의 현실적 교화를 도외시 했다. 그러나 天寶의 난은 귀족세력 을 몰락시키고 그 여파로 佛敎는 널리 민중과 결속하게 되었다. 이처럼 胡適과 入矢義高와의 견해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과연 어느 시대가 정확한 것인가를 지금 단계로서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寒山 이전의 인물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王梵志나 寒山이나 생애가 애매한 것에서는 마찬가지이다. 王梵志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여러 자료들 중에 다음 것들은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것이다. 레닌그라드의 필사본인 敦煌本 王梵志詩集 끝에는 <大曆 6年(771) 5月 日 初 王梵志詩 一百 一十首 沙門 法忍 寫之記> 라고 쓰여 있다. 王梵志 詩集은『新修大藏經』85권에 들어 있는데 이는 돈황본 자료와 함께 모아져 있는 것이다. 그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말하는 府兵制 시행은 6세기에서 8세기까지 시행되었던 점을 보아도 그의 생존 년대를 짐작할 수 있다. 宗密(780-841)은 그의『禪源諸全集都序』에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시나 노래로 이끄는 것을 宗으로 삼는 부류를 誌公, 傅大師, 王梵志등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등한 존재로 寒山이 충분한 자격이 있음에도 여기에 寒山의 이름이 빠져 있음은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寒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王梵志보다 좀 늦지 않았나 생각된다. 王梵志에 대한 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은 역시 胡適에 의하여서인데 그는『白話文學史』에서 王梵志와 寒山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寒山을 王梵志의 후예로 보고 있는 것이다. 王梵志詩는 1900년 敦煌 藏經洞 대문이 열리면서 햇빛을 보게 되었을 때 나온 것은 필사본이다. 王梵志 시집으로는 현재 돈황 선종관계 자료 일람의 王梵志 시집으로 스타인 본과 페리오 본이 있다. 王梵志는 隋나라 文帝 때 사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初唐 때의 사람이라고 보고 있다. 寒山은 王梵志의 전통을 이은 白話詩人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다. 그리고 寒山과 王梵志는 같은 지방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王梵志詩가 半偈 半詩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 상당히 유행했다. 胡適은『白話文學史』에서 寒山이 王梵志의 白話文學의 계승자로 보고 있으나 이는 寒山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다. 물론 寒山은 王梵志의 白話詩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寒山은 王梵志를 뛰어넘어 독특한 자기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寒山과 王梵志와의 관계는 白話詩의 전통을 이어가는 면을 나타내는 것을 風穴延昭의 寒山詩를 들어 설법한 시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 시는 현재 寒山詩集 어느 본에도 들어 있지 않다. 아마도 10세기 이전 古本에서 風穴이 보았을 것로 보인다. 이처럼 寒山은 王梵志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寒山과 王梵志는 유사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한편 寒山은 王梵志보다 더 한층 文學이 세련되고 깊어졌으며 특히 禪思想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寒山은 王梵志보다 더욱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天台山의 環境 寒山의 신비성의 윤색은 대부분 天台山의 특이한 분위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天台寺는 天台智者大師의 창건으로 天台宗의 근거지이다. 그러나 寒山이 비록 天台山에 살았지만 天台宗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南宗의 祖師禪에 더 가까이 있다고 보여진다. 天台山은 折江省 동북쪽에 위치하며 주위에는 翠岩山과 四明山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五峰에는 智誼가 기초를 세운 國淸寺가 있는데 여기에서 觀靜, 湛然 등이 머물러 天台宗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일명 景德 國淸寺, 天台寺라고도 하며, 이 절에는 豊干의 久地가 있기도 하다. 또한 修禪寺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다음 시는 천태산의 이러한 신비를 한산이 잘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304 단구는 멀리 솟아 구름과 나란하고 허공중의 오봉은 멀리 바라 나직하다 안탑은 높이 푸른 산을 헤쳐 나고 선림 옛집은 무지개 속에 든다 소나무에 바람 불어 적성산 빼어났다. 중암에 안개 일어 신선 길 아득해라 푸른 기운 일천 산은 만 길에 솟았는데 소나무 칡넌출은 골짝을 잇덮었다. 丹丘逈聳與雲齊 空裡五峰遙望底 雁塔高排出靑장 禪林古殿入虹예 風搖松葉赤城秀 霧吐中巖仙路迷 碧落千山萬인現 藤蘿相接次連谿 丹丘는 天台山을 말하며 雁塔은 탑이 서있는 모양이 기러기 날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데서 나온 말이며 赤城은 천태산 남쪽에 있는 산이다. 禪林은 國淸寺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천태산은 한산이 시로 주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듯이 매우 수려하며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곳이다. 삼국시대(3세기)부터 佛寺의 건립이 성황되었고, 그 이후 道敎와 佛敎의 성지로서 중요한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6세기 경에 天台智者대사가 天台宗의 법문을 여기서 열은 것은 天台敎學의 근본도량으로 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개의 고승은 반드시 한번은 여기를 방문하고 수행을 쌓는 것이다. 또한 절도 많이 건립되었으며 575년 (陳의 太建7년)에 天台智者가 여기에 입산한 이후 중국 天台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天台宗이라는 명칭도 山名에서 유래한 것이다. 山麓에는 隋 煬帝(재위604-618)에 의해 명명된 國淸寺가 있어 天台宗의 중심지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國淸寺는 天台大師가 여기에서 선을 닦던 곳으로서 여러 곳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寒山과 國淸寺와의 인연이 언제쯤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설화가 생겨나게 된 조건을 이 절은 두루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직까지 경내에 있는 三賢堂은 寒山과 豊干과 拾得의 제사를 재내고 있다. 또한 寒山이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寒岩(寒山)과 拾得의 유적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같은 유적은 물론 寒山 설화를 윤색하기 위하여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 하겠지만 이미 기술한 閭丘胤의 서문에도 그 들 세 사람이 자주 國淸寺에 왕래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天台山의 역사 속에서 3인이 나타나는 것은 실은 閭丘胤 서문 이후의 일이고 그 이전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그 서문 속에 나오는 國淸寺의 스님 道翹라고 이름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李邕(750年 更 歿)이 찬한 國淸寺碑에 寺主로 같은 이름이 보여지고 있는데 그 밖에는 전혀 알 수 없다. 아마도 豊干은 國淸寺에서 오랫동안 주석한 스님이라고 생각되며, 天台山을 중심으로 하여 寒山과 豊干과 拾得의 일화들이 이루어지고 후에 신화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다음의 시는 天台山의 추운 겨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寒山의 시이다. 307 寒山은 추워라 얼음이 돌 얽맸다 푸른 산을 감추고 흰 눈은 드러냈다 해가 올라 비추면 한목에 녹으리라 지금부터 따스하니 늙은 몸 기르겠다. 寒山寒 氷銷石 藏山靑 現雪白 日出照 一時釋 從玆暖 養老客 여기서 그는 눈 덮힌 寒山 속에서 언젠가 햇살에 녹아 따뜻하게 되면 그 때 몸을 기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위 시는 3言詩로 되어 있다. 3言詩는 寒山이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시형태이다. 다음 시 역시 天台山의 주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四明山과 이어진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 끝없이 펼쳐지는 사방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게 한다. 243 들은 널리 뻗고 물은 느린데 단구는 사명산에 연이어 있다. 그 중에 선도 가장 높이 빼어나 뭇 봉우리 푸른 병풍 둘리쳐 있다 멀리 바라보아 아스라이 끝없고 굽이굽이 그 형세 서로 잇닿네 외로이 바다 밖에 홀로 떠 있어 아름다운 그 이름 두루 떨친다. 平野水寬闊 丹丘連四明 仙都最高秀 群峰聳翠屛 遠遠望何極 올올勢相迎 獨漂海隅外 處處播嘉聲 그가 天台山에 입산한 것은 정확히 언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략 30세를 전후한 시기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의 시에는 天台山을 찬양하고 길이 天台에 머물 것을 마음 정하는 시가 많이 있다. 다음 시도 그러한 시중에 하나이다. 77 그윽히 살 만한 땅 가려 잡으니 천태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잔나비 울음 골짝 안개에 차갑고 둘레 산 빛은 싸리문에 와 닿는다. 나뭇잎 꺾어 소나무 지붕 덮고 연못 만들어 시냇물 끌어 온다. 이미 모든 일 쉬어서 만족해라. 고사리 캐며 남은 생을 보내리라. 卜擇幽居地 天台更莫言 猿啼谿霧冷 嶽色草門連 折葉覆松室 開池引澗水 已甘休萬事 采蕨度殘年 그가 天台山을 처음 택하여 입산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입산에 즈음하여 들어갈 때 쓴 시로 보인다. 깊은 산중에서 자연과 벗하며 고사리를 캐면서 살겠다는 그의 마음은 확고한 것이다. 그가 天台山에 언제 입산했는지에 대하여는 그의 생애에 대한 아무런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의 시를 통하여 단편적이나마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시에는 그가 寒山에 들어간지 30년이 되었다는 시가 있다. 48 한 번 寒山에 들어가 앉아 어느덧 삼십년 흘러 지났네. 이제 돌아와 친구들 찾았더니 거의 반이나 황천길 손이 됐네. 차츰 줄어들어 남은 촛불 같거니 길이 흘러흘러 가는 강물 같구나. 새삼 외로운 그림자 마주 앉으니 두 줄기 눈물 절로 흘러내리네. 一向寒山坐 淹留三十年 昨來訪親友 太半入黃泉 漸減如殘燭 長流似逝川 今朝對孤影 不覺淚雙懸 그가 寒山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그의 시를 통하여 보면 적어도 30년이상 寒山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세상의 俗情을 모두 끊었겠지만 그에게는 친구를 찾았으나 거의 반이나 黃泉으로 떠나 버렸으니 세상의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점점 소멸해가는 목숨은 마치 남은 초가 타 들어가는 것과 같고 또 목숨이 지나가는 것은 마치 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홀로 외로운 그림자 마주 앉으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내린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그도 세속을 뛰어 넘은 은자의 삶을 보여주면서도 때로는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하는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寒山 자신의 시를 통하여 산속에서 고독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시를 살펴보자. 天台山의 자연환경은 더할 수 없이 수도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으나 國淸寺와 주위의 인간적인 환경은 몰이해와 푸대접이었다고 보인다. 254 이십 년 전 일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어 國淸寺로 돌아오네 國淸寺에 있는 모든 사람들 寒山이 어리석다 서로 이르네 어리석은 사람 무슨 의심 있으랴 의심을 가졌어도 생각 할 줄 모르네 나는 아지도 내 스스로 모르나니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으랴 머리를 낮추어 물을 것 없고 물어 본대야 또 무엇하리 어떤 사람이 있어 나를 꾸짖되 분명히 환하게 알면서 그런다고 그러나 나느 대답하지 않나니 이것이 얼마나 내게 있어 편리한가. 憶得二十年 徐步國淸歸 國淸寺中人 盡道寒山癡 癡人何用疑 疑不解尋思 我尙自不識 是伊爭得知 底頭不用問 問得復何爲 有人來罵我 分明了了知 雖然不應對 却是得便宜 이 시는 寒山의 세속적인 삶과 유리된 모습을 자신의 말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시이다. 세속 사람들에게 모르는 척 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가라고 말하는 것은 寒山이 세상과 단절 된 삶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어차피 이 세상에 살면서 저주받은 운명으로 살아가야 함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李白도 자신을 일러 謫仙이라고 하였으니 시인은 이 세상에서는 귀양살이 온 신선의 신세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있다. 寒山도 이와 같이 시인의 비극적 운명성을 그 시 속에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天台山은 바로 寒山에게 있어 비극적 생을 숨길 수 있는 은둔의 適地였던 것이다. 한산이 이런 천태산에서 적어도 100세를 넘겨 오래 살았음을 알 수 있는 시를 보자. 275 여기는 옛날부터 경행하던 곳 내 여기 이제 또 칠십 년이 지났거니 예날 그 사람들 이제 어디 갔는가 자초 무덤 속에 쓸쓸히 누워 있네 나도 이제 늙어 머리는 흰데 혼자 흰구름 산을 지키고 있다 내 알리나니 뒤에 오는 사람들아 왜 옛 어른의 말을 읽지 않는가. 昔日經行處 今復七十年 故人無來往 埋在古塚間 余今頭已白 猶守片雲山 爲報後來子 何不讀古言 위 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한산은 天台山을 70 년이 넘게 경행하였으니 30 세를 전후하여 입산하였다고 하더라도 100 세를 넘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머리는 희었는데 옛적에 살던 사람은 누가 남아 있는가? 오직 흰구름만이 산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또한『祖堂集』에는 天台山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黃蘗이 그와 함께 天台山으로 가던 벗의 신통 부리는 것을 보고 꾸짖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승들에게도 天台山은 중요한 순례의 도량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高僧傳』권 11 에 스님들이 北魏의 폐불을 피하여 長安의 서남에 있는 寒山으로 도망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두타습선의 전통이 뒤에 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達磨系의 선종의 융성을 초래하게 된 것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이같이 天台山은 오래전부터 佛敎의 성지로 이름 나 있었으며 특히 天台宗의 발상지인 점에서 佛敎의 매우 중요한 곳이고 寒山은 바로 이런 天台山을 자신의 은거지로 택하였던 것이다. 寒山의 신화는 바로 天台山과 더불어 함께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佛敎思想的 背景 寒山의 佛敎思想적 배경은 어떻한가? 寒山詩가 보여주는 佛敎思想의 배경을 살펴보자. 寒山이 살았던 시대의 佛敎의 역사는 매우 중요한 전환기적 시기라고 할 수 있다. 印度佛敎가 중국에 처음 들어올 때는 교학이 먼저 들어왔다. 교학중에서도 中觀과 唯識보다는 天台와 華嚴이 성하게 된다. 寒山詩 사상의 기본을 이루는 佛敎思想으로서 교학으로는 法華思想, 維摩經 思想, 般若經 思想이 크게 연관되어 있고 禪思想으로는 南宗禪 계통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교학적인 면을 살펴보고 禪思想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寒山詩에 나타난 大乘經典의 경우는『法華經』과『維摩經』이 깊게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般若經』도 상당히 영향 받고 있음을 시에서 엿볼 수 있다. 寒山詩와 가장 관계가 깊은 사상은 法華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寒山은『法華經』에 많이 의거하고 있음을 그의 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法華經』은『華嚴經』과 더불어 대승경전 중에서 一乘圓敎로 존중받는 최고의 경전으로 諸法實相의 妙法을 나투며 會三乘歸一乘의 근본 정신을 갖고 있는데 모두 28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 속에는 비유로 중생을 이끈는 가르침이 많이 있는데 옛부터 일곱가지 비유를 들어오고 있는데 원래는 아홉가지 비유가 들어 있다. 경에 아홉가지 비유가 있으니 화택 궁자 약초 화성 계주 착정 왕계 부소 의 사이니 전에는 오직 일곱가지 비유만 말하고 착정과 부소의 두가지 비유를 버렸다. 經 有九喩 謂火宅 窮子 藥草 化城 繫珠 鑿井 王계 父少 醫師 舊唯言七喩 遺却鑿井父少二喩 이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火宅의 비유, 窮子의 비유, 繫珠의 비유등을 들 수 있다. 한산은 시에서 특히 火宅과 繫珠의 비유를 많이 들어 나타내고 있으니 火宅의 比喩란 『法華經』세번째 품인 비유품에 나오는 것으로 중생이 살고 있는 三界가 다 불난 집이라는 것이다. 경에 나오는 비유의 이야기는 어느 날 장자의 집에 불이 났는데 집안에 있는 아이들이 불 난 줄도 모르고 놀이에 취해 있었다. 장자는 방편으로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를 주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모두 불 난 집에서 나오자 장자는 아이들에게 크고 좋은 흰소의 수레를 주었다. 중생들이 모두가 불난 집 속에서 五慾樂에 취하여 불 타는 줄도 모르고 취하여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불보살이 방편으로 중생들을 이끄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法華經』에 나오는 火宅의 比喩이다. 다음 시를 보자. 185 어지러이 쓰러진 거칠은 풀집 거기 불이 일어 연기 자욱하여라 소꿉장난 열심인 어린애들아 너희들 언제부터 여기 살았나 문 밖에는 세 가지 수레가 있어 그들을 맞이해도 나오려 않는구나 배부름에 취해 다른 생각 또 없나니 저들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이여. 최殘荒草廬 其中烟火위 借問群小兒 生來凡幾日 門外有三車 迎之不肯出 飽食腹彭형 箇是癡頑物 불난줄도 모르고 소꿉장난에 열심인 아이들이 가련하여 세가지 수레를 장만하여 아이들을 밖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三乘의 사상이며 聲聞, 緣覺, 菩薩의 삼승은 마침내 一佛乘으로 회향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어리석은 중생들이 화택을 나오려 하지 않으니! 불보살은 이를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한산 역시 이를 가엽게 여기고 있다. 天台山은 天台智者 대사가 天台宗을 개창한 곳이고 國淸寺는 바로 天台宗의 총 본산이 되는 도량이다. 寒山의『법화경』과의 인연은 이런 상황과 전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法華經』의 사상은 寒山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시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다음 시 역시『法華經』의 火宅의 比喩를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251 세상 일 뒤얽혀 길고 길어라 생을 탐해 일찌기 그칠 줄 모르는구나 이 땅의 돌을 갈아 다해도 진정 쉴 때는 얻을 수 없겠구나 사시는 돌고 돌아 바뀌어 변하고 팔절은 빨리 흘러 물과 같으니 내 불난 집 주인에게 알리나니 바깥에 나와 흰 소를 타라고. 世事요悠悠 貪生未肯休 硏盡大地石 何時得歇頭 四時周變易 八絶急如流 爲報火宅主 露地騎白牛 화택의 비유는 중생이 輪廻의 고통을 받고 있는 사바세계에서 불보살이 얼마나 철저히 자비로서 구제하려는가 그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흰소는 一佛乘을 나타내고 있으며 불난 집 주인은 다름 아니 바로 불보살이고 아이들은 우리들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三乘은 방편이고 一佛乘만이 大乘實敎라고 하는데 여기서 三車說과 四車說의 양론이 있다. 이러한 화택의 비유와 세 수레가 상징하는 삼승에 관한 시가 상당히 많이 시속에 나타나고 있다. 다음 시 또한 그러한 三乘을 의미하는 세 수레를 말하고 있다. 235 내 너희들에게 권하나니 어린애들이여 얼른 그 불 난 집을 빠져 나오라 세 수레 저 문 밖에 있어 너희를 실어다 화를 면케 하리라 네거리에 나와 맨땅에 앉았으면 머리 위에 하늘 있어 만사는 비어 있고 시방의 위 아래 모두 없거니 오고 가기는 동서에 맡겨 두고 만일 그 가운데의 한 뜻을 알면 가로 세로 어디고 두루 통하리. 余勸諸稚子 急難火宅中 三車在門外 載爾免諷蓬 露地四衛坐 當天萬事空 十方無上下 來去任西東 若得箇中意 縱橫處處通 불난 집 밖으로 나오면 불의 화도 면하고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화택의 비유는 중생들의 고통의 현실을 적절히 나타내고 있다. 한산시에 있어『法華經』의 많은 비유 중에 한산이 제일 많이 드는 비유는 화택의 비유라 할 수 있다. 다음 시는 衣裏繫珠의 비유를 나타내고 있다. 이 비유는 법화경 제 8품의 五百弟子授記品에 나오는 비유이다. 어느 날 가난한 사람이 친구 집에 들렸다. 주인은 친구가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옷 속에 보물을 달아 주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다 다시 친구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주인은 아직까지 가난하게 살고 있는 친구를 보고 옷 속의 보물을 알려주었다. 드디어 가난한 사람은 보물을 얻어 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도 누구나 불성의 보배를 갖고 있으나 스스로 알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살고 있음을 불보살은 연민히 여겨 가르침을 베풀고 계신 것이다. 229 우리 고을에 한 집이 있어 그 집에는 옳은 주인이 없다 땅은 겨우 한 치의 풀을 내고 물은 한 방울 이슬을 떨구며 불은 여섯 놈의 도적을 불사르고 바람은 검은 비바람을 몰아오네 자세히 그 본 주인을 찾아보라 베옷 속에 한 진주 있느니라. 余鄕有一宅 其宅無正主 地生一寸草 水垂一滴露 火燒六箇賊 風吹黑雲雨 子細尋本人 布裏眞珠雨 친구가 달아준 보물을 알지 못하고 술에 취해 여기 저기 헤매면서 가난하게 거지처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보물을 알려준 친구의 덕으로 다시 보물을 찾아내는 비유로 중생이 자성의 보배를 알지 못하고 살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자성을 깨닫게 되는 이러한 비유는 중생의 자성불을 아주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이러한 옷 속의 보물을 어서 찾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264 네게 권하나니 오감을 좀 쉬어라 저 염마 첨지에게 시달리지 말라 한번 잘못 딛어 삼도에 들면 한없는 매질에 온 뼈가 가루 되며 길이 저 지옥에 든 사람 되어 다시는 이생 길에 나오지 못하리니 부디 힘쓰라 내 말을 믿어 너 옷 속의 보물 알아 가져라. 勸爾休去來 莫惱他閻老 失脚入三途 粉骨遭千도 長爲地獄人 永隔今生道 勉爾信余言 識取衣中寶 진정한 깨달음은 밖에서 구하려 하지 말고 자신 안에서 찾으라는 가르침이 옷 속의 보물에 담겨 있은 뜻이라고 하겠다. 이런 의미는 한산시 293번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다음은 般若思想에 대하여 살펴보자. 寒山詩에는 般若思想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시도 적잖이 있다. 특히『金剛經』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金剛經』은 대승경전 중에셔도 선종과 가장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인연은 6祖 慧能대에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달마로부터 전해진 것은『金剛經』보다도『능가경』이었던 것이지만 慧能은 弘忍으로부터『능가경』이 아니『金剛經』을 전수 받았던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金剛經五家解』속에는 六祖의 口訣이 들어 있음은 이를 잘 반영하는 것이라 보인다.『金剛經』과『능가경』은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하고 있다.『능가경』은 唯識계통의 사상을 근본하고 있으며『金剛經』은 中觀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그런데 寒山은 당시 선종의 분위기를 영향 받았음인지『金剛經』과 인연을 갖고 있는 시를 남기고 있다. 다음은 寒山詩와『金剛經』과의 관련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135 사람은 몸으로 근본을 삼고 그 근본은 마음을 자루로 한다. 마음이 삿되지 않아 근본이 있나니 마음이 삿되면 본 목숨을 잃는다. 진실로 이 재앙을 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공부하기 게을리 하랴 만일 『金剛經』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리어 보살로 병 앓게 하리. 人以身爲本 本以心爲柄 本在心莫邪 心邪喪本命 未能免此殃 何言뢰照鏡 不念金剛經 却令菩薩病 금강경의 사상은 空思想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의 四相을 벗어나는 것이 보살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살은 모살의 이름이 아니고 그 이름일 뿐이라고 한다. 한산은 이러한 중생의 집착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금강경의 공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한산의 시에서 금강경과 인연은 선종이 중국 불교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는 시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金剛經』과 선종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져 그 후『金剛經』이 所依經典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사상적인 큰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寒山詩는『維摩經』과의 관계 또한 매우 깊게 맺고 있다. 『維摩經』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마힐 거사와 부처님의 제자와 여려 보살들과의 문답으로부터 시작 되며 大乘佛敎의 중요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維摩經』의 근본사상은 不二法이라고 할 수 있다. 不二의 사상은 산스트리트로 a-dvaya 라고 하며 통일성이나 궁극적 진리를 뜻한다. 그래서 절대 평등을 의미하기도 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서 절대 무차별의 佛敎의 가장 높은 사상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中道의 정신과 다른 것이 아니다. 불이법문으로 알려진 이 정신은 유마거사와 여러 불제자와 보살들간의 대화로 이어지고 마침내 文殊에 의해 불이법은 말로 설해질 수 없다고 선언되며 유마에 이르러 침묵으로 나타내지고 참으로 유마의 침묵이야말로 불이법을 가장 잘 나타내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래서 유마의 침묵은 우뢰와 같다는 말이 나왔다. 한산시 속에 不二사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자. 191 아침 풀잎에 이슬을 못보느냐 해 뜨면 곧 모두 사라지는 걸 사람의 몸도 이와 같아서 염부은 여기 붙어 있는 곳이니라 부디 한평생 어름어름하지 말고 삼독을 모두 끊어 없애면 보리는 곧 번뇌, 본뇌는 곧 보리 그 본뇌 다시 남아 있게 하지 말라. 不見朝垂露 日삭自消除 人身亦如此 閻浮是寄居 切莫因循過 且令三毒거 菩提卽煩惱 盡令無有餘 위 시에 나타나듯이 菩提는 곧 煩惱라고 하는 것이다. 보리가 번뇌이기에 번뇌가 보리로 될 수 있는 것이며 보리와 번뇌는 둘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維摩經의 不二 思想이 寒山詩의 내면에 깊게 깔려 있어서 시로 용해되어 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시에서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병을 앓는 것도 바로 유마경 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寒山의 사상적 편력과정을 보면 처음 儒敎에서 출발하여 과거에 응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실패하고 유랑의 시기에는 黃老之敎에 심취하게 된다. 天台山에 처음 입산할 때만 하여도 寒山은 상당히 道敎에 빠져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寒山은 점차 도교의 한계와 그 헛됨을 알고 佛敎와 禪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李善熙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寒山其人及其詩硏究』에서 寒山의 사상편력을 처음 유교에서 출발하여 도교로 갔다가 佛敎로 갔다가 다시 도교로 돌아간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매우 피상적이고 아무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寒山이 만년에 佛敎의 선을 버리고 도교의 신선으로 돌아 갔다는 자료나 시는 찾아 볼 수 없다. 이상과 같이 寒山의 佛敎思想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寒山이 法華思想과 般若思想에 매우 깊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4. 隱 逸 思 想 寒山이 天台山에 隱遁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중국의 隱逸思想적 전통에 뿌리가 깊이 닿아 있다. 물론 寒山이 은둔하게 된 배경에는 佛敎와 관련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佛敎의 출가정신은 인간정신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려는 의지의 발로이고 입산하여 수도하는 것도 세속적인 속박을 벗어나려는 발심인 것이다. 이러한 출가의 전통은 인도에서는 매우 보편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입산 수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은둔은 매우 높은 덕목이며 역사상 오래 된 隱者의 전통을 갖고 있다.‘대체로 隱士란 出仕하고 있던 자가 은둔할 때를 일컫던 명칭으로서 대개 그 사람은 지식계급이었다. 지금까지 是로서 생각해 오던 仕의 장소를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이를 피하여 隱의 장소로 옮겨가는 것이 은둔이다. 이 경우 그 은둔 장소를 좋은 곳으로 생각하고 은둔을 바람직한 생활로 생각하고 시인하는 기풍이 마침내 일어나게 되었다.’ 『論語』의 <은거함으로서 그 뜻을 구하고, 의를 행함으로서 그 도를 이룬다.(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 라던가『孟子』의 <궁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다스리고, 달하면 겸하여 천하를 선하게 다스린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라는 말도 모두 은일사상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老莊에서 훨씬 깊게 나타나고 있으니,『莊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에 이른 바 은사는 그 몸을 숨기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자가 아니고 입을 닫고 말하지 않는 자가 아니며, 그 지식을 숨기어 나타나지 않게 하 는 자가 아니니 단지 시운과 부합하지 못한 자일 뿐이다. 만약 시운과 부 합하여 천하에 크게 쓰여지게 된다면, 그는 반드시 천하를 순박한 하나로 돌이키게 하면서도 조금도 인위의 흔적이 없게 한다. 만약 시운과 부합하 지 않아 천하에서 궁핍하게 된다면 성명의 근본을 깊이하고 지극한 도에 편안히 거하며 차라리 시운과 부합되어지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이것 이 옛 은사가 행하던 存身之道이다.(古之所謂隱士子 非伏其身而弗遣也 非 閉其言以不出也 非藏其知而不發也 時命大謬也 當時命而大行乎天下 則反一 無迹 不當時命而大窮乎天下 則深根寧極而待 此存身之道也.) 이와 같이 存身之道가 점차 隱遁思想과 결합하여 점차로 은둔이 정당화 되기에 이르른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더욱 은둔은 지식인들의 덕목으로 존중되게 된다. 특히 魏晋南北朝 시대는 政治와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워 지식인들이 몸을 보존하기 위하여 현실을 피하여 산림에 숨어들기를 좋아하였다. 그 결과 은둔의 文學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림으로 은둔을 하였으니 이러한 때 晋의 張華는 藝文類聚에서 招隱詩를 지어서 은둔을 찬양하고 있다. 은사는 육신을 산림에 기탁하고 세속을 피하여 참된 도리를 지킨다. 連 惠를 참으로 아직 만나지 못하였으니 뛰어난 재주를 굽히고 펼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어 은둔의 장소를 산림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혼란, 사람과의 경쟁, 사회와의 갈등, 권력투쟁에서 피하려는 욕구, 이런 혼란에서 은일적 행활 태도와 개인주의적 극단성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은일생활의 근저에는 개인주의적 정신이 깊이 흐르고 있다. 사회 전체가 은일을 숭상하면 은사가 사회의 존경을 받는다. 屈原은 離搔에서 다음과 같은 귀절로 사회에서 지식인의 삶을 어떻게 갖아야 하는지를 간명하게 읊고 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발을 씻는다. 滄浪之水淸兮可而濯我纓 滄浪之水濁兮可而濯我足 이러한 싯귀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지식인이 삶의 길을 택함에 나아가고 들어가는 경우를 절도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사회적 구속을 벗어나 자연인으로 돌아가고져 하는 강한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자연의 생활에 편안히 안주하여 한가롭게 시를 짓고 읽는 것은 은일사상과 통한다. 중국의 도교의 자연주의적 사상 속에는 은둔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佛敎정신과 결합하여 독특한 은일사상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佛敎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으니 보살사상은 세속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세속을 아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살은 중생과 더불어 사바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음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바로 불보살의 보살행은 사바의 중생과 더불어 同事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寒山이 天台山에 은둔한 사상적 배경에는 이와 같이 은일사상적 바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寒山詩에 있어서 寒山은 이미 한 개인을 지칭하기보다도 은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화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은일사상의 시적 흐름 또한 중국의 큰 흐름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隱遁文學을 형성하고 있으니 陶淵明, 王維 등도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면 寒山詩속에 어떻게 은일사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자. 처음에 세속에서 寒山은 포부를 갖고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남북을 많이 돌아다니다 天台山에 들어가 은거하게 된다. 은거 시기는 30세 전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음 시는 이를 말해주고 있다. 281 내 이 세상에 난 지 삼십 년 동안에 헤매어 돌기 천만리로 놀았다 강으로 나갔더니 푸른 풀 우거지고 국경에 이르매 붉은 티끌 아득했다 헛되이 약 만들어 신선도 구해 보고 부질없이 시도 짓고 책도 읽었다 이제 비로소 좋이 寒山으로 돌아와 개울을 베고 누워 귀를 씻노라. 出生三十年 常遊千萬里 行江靑草合 入塞紅塵起 練藥空求仙 讀書兼詠史 今日歸寒山 枕流兼洗耳 寒山은 30세를 전후하여 상당한 고민과 갈등으로 방황하고 여행을 하다가 드디어 天台山에 입산하여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그는 시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다음 시 역시 은자로서의 寒山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3. 우스워라, 내 가는 寒山 길이여 거마의 자국이야 있을 턱 없네 시내는 돌고 돌아 몇 굽이던고 산은 첩첩 싸여 몇 겹인 줄 몰라라 풀잎 잎잎마다 이슬에 눈물 짓고 소나무 가지마다 바람에 읊조린다. 내 여기 이르러 길 잃고 헤매나니 그림자 돌아보며‘어디로?’물어보네. 可笑寒山路 而無車馬사 聯溪難記曲 疊장不知重 泣露千般草 吟風一樣松 此時迷徑處 形問影何從 天台山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寒山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한없이 깊은 산속에 거마의 자취야 있을 턱이 물론 없고 너무 깊은 산속에서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다음시 역시 한산의 은자로서의 모습을 잘 엿볼 수 있는 시이다. 209 天台山 꼭대기 우러러보면 외로이 높아 뭇 봉우리 빼어났네 바람이 오면 솔 대나무 맑은 소리 달이 나오면 바다 조수 잦아지네 산기슭 푸른 밑을 내려다보면 깊은 도리 얘기하랴 흰구름 있네 들정이 산수를 우선 좋아하지만 본뜻은 도의 벗을 사모하나니. 目見天台頂 孤高出衆群 風搖松竹韻 月現海潮頻 下望山靑際 談玄有白雲 野情便山水 本志慕道倫 이 시 또한 은일 사상을 담고 있는 시이다. 마지막 귀절이 뜻하는 바는 산수를 좋아하나 본 뜻은 도를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자연과 도의 정신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무상한 세상에서 벗어나 어서 산으로 오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한산은 매우 따뜻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231 무엇 때문에 늘 시름에 잠겼는가 사람의 삶이란 아침버섯 같은 것을 기껏 견디어 몇십 년 지내는고 새 것 묵은 것 서로 갈아 다하는 걸 이것 생각해 어이 아니 슬플 것인가 그 슬픈 정 차마 참지 못하겠네 아아 어찌할꺼나 진정 어찌할꺼나 모든 것 떨치고 산으로 들어오라. 何以長추창 人生似朝菌 那堪數十年 新舊凋落盡 以此思自哀 哀情不可忍 奈何當奈何 脫體歸山隱 이 시 또한 세속의 잡다한 슬픔을 떨치고 산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하고 있다. 은일사상을 역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위 시들은 바로 寒山이 은거하며 지내는 심경을 읊고 있는 것이다.『寒山詩集』에 나타난 것은 寒山이 인간적인 고뇌를 고백하고 있기도 하며 때로는 산중 생활의 즐거움을 읊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은자로서의 회의를 보이고 때로는 은자로서의 자신을 과시하고 세속의 속물근성을 조롱하고 꾸짖기도 한다. 출가 수도자에 있어서 중국적 상황은 인도와 많이 다르다. 인도는 출가 중심의 가치가 더욱 철저한 반면 중국은 세간의 국가 권력이 출가의 가치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이 점은 아마도 유교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佛敎는 세상의 윤회를 벗어나 生死解脫하는 진리의 가르침이다. 인도에서는 출가자는 제왕에게도 스승으로 예를 받았으나 중국에서는 왕권에 예속 되었다. 恒玄의 출가자도 왕에 대하여 예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廬山의 慧遠은 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반박하였다. 가사는 세속을 벗어난 것이기에 출가자의 가치는 세속의 가치보다 우선 한다는 입장이나 뒤에 왕권의 권위와 마찰이 심각하여져서 마침내 법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은일 사상은 더 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은사 혹은 은자라고 하면 세상을 피하여 관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와 달리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 은둔하여 나타나지 않는 사람도 은자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은사의 전통이 매우 강한 나라이다. 멀리 伯夷 叔齊에서부터 그러한 맥은 이어져 오고 있다. 莊子는 시명이 불우하기 때문에 그 몸은 그대로 세상에 있어 언동하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채 은둔하며 지내는 사람들도 은사라고 부르고 있다. 또 장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시세에 있어서의 성인에 대하여‘비록 성인은 산림 가운데서 몸은 숨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덕이 숨으며 그 덕이 숨기 때문에 몸은 숨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어 이와 같은 성인을 은사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산의 다음 시는 숨어 사는 선비의 모습을 잘 노래하고 있다. 248 숨어 사는 선비들 인간을 떠나 많이들 산중에 들어가 자네 푸른 칡넝쿨은 덤성덤성 얽히었고 맑은 개울물은 졸졸졸 흐르나니 기운은 맑아 편안하고 즐겁고 마음은 길이 깨끗하고 한가롭네 세상일에 물들기 멀리 떠나서 마음은 고요해 흰 연꽃 같네. 隱士遁人間 多向山中眠 靑蘿疎麓麓 碧澗響聯聯 騰騰且安樂 悠悠自淸閑 免有染世事 心靜如白蓮 위 시 또한 숨어 사는 寒山의 심경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은자의 모습을 흰 연꼿에 비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謝靈運과 陶淵明등으로 이어져 隱遁文學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며 寒山 또한 이러한 전통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寒山의 은일사상은 멀리 인도의 사문들의 출가정신과 함께 중국의 은둔사상과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우리는 寒山詩의 형성배경에 대하여 살펴본 결과 그의 인간관계와 풍간과 습득과의 관계를 통하여 그의 시세계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 한산의 신화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쳤는지도 살펴보았다. 아울러 천태산의 자연과 환경을 둘러보고 한산과의 인연을 알아보았다. 물론 당시의 佛敎思想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가 천태산에 은둔하게 된 사상적 바탕에는 은일사상의 뿌리가 깔려 있음도 알게 되었다. Ⅳ. 寒山詩의 分類 禪詩를 어떻게 분류하는가의 문제는 禪文學 硏究 방법론상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학문의 분류에 있어서도 그 분류방식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예컨대 문헌을 분류하는 방식이나 혹은 전공영역을 나누는 방법에 따라 그 학문의 성격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구체적으로 禪文學 중에서 가장 대중화 되어 있는 禪詩의 분류를 살펴보고 寒山의 禪詩를 분류하고 또 그의 비판시에 대하여도 살펴보자. 1.禪詩의 分類方法 이제까지 禪詩의 분류법에 제일 먼저 보편적으로 소개된 것 중에 하나는 杜松柏의 이론이다. 禪文學에 대한 硏究는 일본보다도 중국에서 먼저 앞서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硏究의 입장도 일본과 중국의 입장과 태도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杜松柏의『禪學與唐宋詩學』의 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종찬 교수와 인권환 교수의 경우도 많이 참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杜松柏과 이종찬교수의 분류방식을 비교하여 살펴보고 선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아보자. 1)一般文學의 分類方式 中國의 杜松柏과 韓國의 이종찬이 분류방식에서 드러내주는 차이는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杜松柏의 경우는 선가의 입장과 시가의 입장에서 禪詩를 분류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먼저 선과 시가 융합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당송의 시대에 선학이 크게 일어나고 처음 당의 초기 東山法門이 시작되면서 시와 결합을 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禪家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禪詩를 분류하고 있다. 1.示法詩 2.開悟詩 3.頌古詩 4.禪機詩 위와 같이 선가의 입장에서 禪詩를 분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시의 입장에서 禪詩를 분류하는 것이다. 1.禪理詩 2.禪典詩 3.禪迹詩 4.禪趣詩 이처럼 시적 입장에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이종찬의 禪詩 분류를 살펴보자. 그의 禪詩에 대한 硏究는 禪文學 硏究분야에 새롭게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서 괄목 할만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가 禪詩를 나누는 유형을 살펴보자. 그는 어디까지나 文學的 입장에서 禪詩를 보고 있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禪詩를 유형별로 나눔에 있어 작자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전제하여 말하고 있다. 禪詩 자체가 선가에서 오묘한 선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방편상 빌어온 것이 시의 형태였다면, 형식은 시에서 빌어오고 그 내용에 선지를 담았다는 것이 된다. 이 때는 작자가 모두 선가일 수밖에 없다.라고 작자의 문제를 나누어서 선가의 입장과 일반 文學的 입장으로 분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홍기삼과는 다르게 동기나 방편이야 어떤 경로에서 이루어졌던 간에, 이러한 禪詩가 있음으로 해서 시의 내용이 풍부해지고 이는 시로서의 가치나 혹은 종교적 의미 이상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먼저 선가의 입장에서 禪詩를 분류하고 있으니 1.示法詩 2.悟道詩 3.拈頌詩 4.禪機詩 위와 같이 나누고 있다. 한편 文學의 입장에서 선적 사유의 깊이를 시로 끌어다 그 깊이를 심화시키는 입장도 있는 것이다. 선가에서 진리를 담아내기 위하여 그릇으로 빌려온 것이 시라면 시 속에 선지가 담겨 있는 것이고 이것이 禪詩가 되는 것이다. 시인의 입장에서는 선가의 사유방법을 빌려오는 방법이 있으니 이는 선적 함축을 지닌 시가 될 것이다. 이같은 시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禪理詩 2.禪事詩 3.禪趣詩 그는 결론적으로 시는 시로서 존재하여야 한다며 시에서 선을 원용해 오든, 선에서 시를 빌어 오든 둘 사이에 흔적이 없는 융섭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禪趣詩가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위와 같이 이종찬의 분류법과 杜松柏의 분류법은 얼마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인권환은 고려시대 佛敎詩의 硏究에서 禪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선과 시의 상즉성과 禪詩의 발생의 계기를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선과 시의 본질적인 정신적 상통성 둘째, 선가에서의 시의 산출되는 경우 셋째, 話頭와 禪詩와의 관계 넷째, 禪詩의 기원 이와 같이 나누어 설명하면서 둘째 번의 선가에서의 시가 창작 되는 경우를 설명하고 그에 따른 여러가지 禪詩에 대하여 들고 있다. 먼저 선승들이 오도적 체험이나 증도의 과정, 그리고 법열적 경지나 行 住 坐 臥나 선적인 생활을 시로서 표현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선승은 오랜동안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悟道詩 또는 開悟詩를 읊는다. 證道의 희열을 證道歌로 나타내며 심산고찰 속의 산중생활을 선취가 가득 담긴 山居詩로 표현한다. 선의 오묘한 철리를 禪理詩로 말하며,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는 臨終偈나 涅槃詩를 남긴다. 이처럼 선승은 출가에서부터 수도 개오 전법 열반의 전 생애를 온통 시적인 과정 속에 보낸다. 역대의 佛敎人들 가운데 선가에서 시인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개인적 생애 외에도 선승은 사찰에 있어 서의 대소 의식이나 사자간 선법전수의 방편으로 禪詩를 사용한다. 上堂이나 示衆 示人을 통하여 示法詩를 남기며 학인들과의 대화에서도 詩偈가 사용된다. 결국 선가의 언어는 거의 시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선승과 시창작과의 밀접한 관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2)禪家의 立場 선가의 입장에서 禪詩의 분류는 좀 다르게 이루어져야 할 점이 많이 있다. 선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禪詩가 하는 기능과 역할에 따라 여러가지로 분류되어 이름 불려지게 된다. 禪詩에 있어서도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悟道詩, 법을 전하는 傳法偈, 임종에 다달아 읊는 臨終偈, 수도의 과정을 그리는 修道詩, 산중 암자에서의 생활을 읊은 艸庵歌, 도 닦는 기쁨을 읊은 樂道歌등 내용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나뉘어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선문헌에 입각하여 보면 語錄, 着語, 別語, 代語, 評唱, 偈頌, 歌語, 艸庵家 등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禪詩의 분류방식에 있어 선의 입장에서 示法詩, 悟道詩. 拈頌詩, 禪機詩, 시의 입장에서 禪理詩, 禪事詩, 禪趣詩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이같이 禪詩의 분류 방법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禪詩의 분류에 있어 그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는 그 성격을 규정짓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에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이는 입장 중의 하나가 이원섭의 경우라 할 것이다. 그는 禪詩의 요건으로 선적인 수행과 깨달음의 의미가 담겨있어야 함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선사의 시라고 다 禪詩로 볼 수 없다는 견해다. 그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다. 禪詩의 조건을 엄격히 함으로서 잘못된 길을 막으려는 그의 태도는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하겠다. 2. 寒山의 禪詩 類型 한산시를 분류함에 있어서『한산자시집』의 체제를 잠시 살펴보면 우선 형태상으로 볼 때 5언율이 가장 많이 있으며 이는 대부분 시집의 앞에 실려 있고 다음은 7언율을 싣고 있으며 끝에 3언시를 싣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앞부분은 주로 사회적이며 세속적인 정서를 나타낸 시를 싣고 있고 뒤에는 불교사상과 자연 속에서 선수행을 읊은 시를 싣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상당히 시집의 체제를 치밀하게 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판본에 따라 많은 출입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寒山詩는 판본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三聖二和尙集』은 寒山詩가 307수 拾得시가 49수 豊干시가 2수 실려 있다.『天台山 國淸寺三隱集』은 寒山詩가 309수 拾得시가 49수 豊干시가 2수 실려 있다. 그리고『全唐詩』의「寒山詩集」에는 寒山詩가 310수, 拾得詩가 54수, 豊干詩가 2수 들어 있다. 또『汲古閣本(宗板)』의 寒山詩에는 寒山詩 311수, 拾得詩 54수, 豊干詩 2수가 들어 있다. 가장 많은 시를 수록하고 있는 寒山詩集은 김달진 역의『寒山詩』이다. 모두 314수가 들어 있다. 奉恩寺本에는 한산시가 310수 들어 있다. 김달진 역본은 봉은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달진 역본과 봉은사본과는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김달진 역본에 들어 있으나 봉은사본에는 없는 시가 4수 있는데 김달진 역본의 번호로 100, 312, 313, 314번이 차이가 난다. 이 중에 313과 314는 四部叢刊集部 판본에는 拾遺二首로 싣고 있고 대부분 다른 판본도 한산시로 싣고 있는데 봉은사본에서는 拾得詩 끝에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봉은사본에서는 366번‘自從此到天台寺’이하를 모두 한산시와 대동소이하며 語意가 서로 相涉되었다고 밝히고 있다.(此下與寒山詩大同小異語意相涉) 그런데 김달진 역본에만 있는 312는 어느 판본에서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서 가져 왔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시는 대부분 5言詩로 되어 있다. 간혹 7言詩와 3자시가 있기도 하다. 시 형식도 주로 古體詩에 가깝고 近體詩와 律詩와 絶句는 얼마간 있다. 그의 문체를 볼때 그는 상당히 자유주의자였다고 생각 된다. 과거의 전통적인 면에서 매우 다른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 3言詩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비전통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한산 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特記할 것은 한산의 楚辭에 관해서다. 봉은사본에는 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라고 하여 志南의 記가 있는데 이 記 끝에 한산이 썼다고 밝힌 楚辭가 한 수 들어 있다. 有人兮山형 雲卷兮霞瓔 秉芳兮欲寄 路漫兮難征 心추장兮狐疑 蹇獨立兮忠貞 楚辭란 楚나라 민간에서 여러 신들을 제사지낼 때 부르던 노래를 屈原이 듣고 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볼 때 한산의 시가 매우 다양한 시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寒山詩는 중국 詩文學史의 흐름에서 볼 때 완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中國文學의 흐름은 杜甫類의 유교적 사상과 陶淵明류의 도가적 사상의 두 흐름이 있는데 寒山은 완전히 독자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寒山이 진실로 추구하는 바는 진여의 자성에 이르는 것이지 결코 시적인 세계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음과 같은 싯귀에서 이러한 정신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寒山志在道 不在詩 君能會我詩 眞是如來母 다음 시를 보면 寒山子 스스로 6백여수의 시라고 자신의 시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이를 보면 후대에 많이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285 닷자배기 오백 편 일곱자배기 칠십 구 석자배기 이십 일 모두 합쳐 육백 수 전부 보기로 바위에 쓰면서 스스로 좋은 솜씨 자랑할거나 만일 누가 있어 내 시를 알면 그는 곧 여래의 어머니니라. 五言五百篇 七字七十九 三字二十一 都來六百首 一例書巖石 自誇云好手 若能會我詩 眞是如來母 寒山 자신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시는 모두 6백여수이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시는 3백여수 남짓이다. 寒山詩 중에 지금 전하지 않는 시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 風穴延昭의 인용 시이다. 현재 風穴선사가 인용하였던 시는 어느 판본에도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아마 지금 전해지는 판본외에 다른 판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寒山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600여수에 이르는 시가 지금 300여수 남짓 전하는 것은 수집과정에서 누락되었는지 아니면 판본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寒山詩에서 7言律詩가 5言絶句에 비해 매우 적은데 이는 아마도 寒山 당시에 7언율시의 형식이 갖춰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나 그러나 楚石선사는 그 후 수백년 뒤인데도 역시 7언 율시가 거의 없음을 볼 때 이는 哲理詩가 7言律詩로는 적합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 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寒山과 楚石을 비교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초석은 寒山의 시를 그대로 모방하여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5언시가 가장 많은 것은 寒山詩의 특징으로 꼽을만 하다. 현존 시집은 閭丘胤과 徐靈府가 편집한 것으로 위의 사실은 寒山詩가 이외에 더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寒山詩에 있어서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자연과 어우러진 선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禪詩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산은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구체적으로 寒山詩의 내용상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의 문제로 들어가 보자. 기왕의 시도로는 선학대사전에서 문헌분류의 일부로서 禪文學을 분류하고 있으나 매우 협소한 의미로 다루고 있어 포괄성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寒山詩의 분류를 나누기 전에 전체적인 寒山詩를 조망하면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첫째는 警世的인 시이고 둘째는 자기 自由의 경지를 읊은 시이다. 경세적인 것 안에는 무상관을 읊기도 하고 인간의 죄악을 읊기도 한다. 또한 사회와 승가에 대한 비판적인 시도 다수 있다. 한편 교훈적인 시도 상당수 보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절대 자유의 경지를 읊은 시에서 그는 선과 자연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寒山詩에서 가장 탁월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禪思想을 바탕으로 쓰여진 자연과 어우러진 禪詩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시를 오도시, 시법시, 임종시, 산거시로 나누어 살펴보자. 물론 이러한 나눔에는 무리한 점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선시에서 위에 든 이름의 시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1)悟道詩 깨달음은 佛敎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이 전제 되지 않는 佛敎는 佛敎의 본질을 상실한 것이다. 이 점에서 깨달음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깨달음이 순간에 오느냐 천천히 오느냐의 문제와 깨달은 후에 닦음이 필요한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서 깨달음이 頓悟頓修라고 하는 주장이 있기도 하고, 또 頓悟漸修로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나오기도 한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생의 근기를 알맞게 이끌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주는 것인지는 엄밀한 검증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朱宏같은 선사의 주장도 頓悟漸修를 주장하고 있다. 먼저 깨닫고 습기를 제거하여 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중생의 근기에 초점을 맞춰 가르치고 있다고 보여진다. 頓悟頓修와 頓悟漸修의 차이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와 더불어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普照의 돈오점수의 가르침은 매우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능엄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頓悟漸修와 비슷한 입장의 말을 하고 있다. 理卽頓悟 乘悟倂銷 事非頓除 因次第盡 이같이 중요한 깨달음의 순간을 시로 읊은 오도송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寒山詩에서 悟道頌은 어떻게 전해지는가? 寒山의 오도시를 보기 전에 붓다의 悟道頌으로 전해지는 偈頌을 먼저 보자. 이 偈頌은 법구경에 들어 있다. 붓다의 悟道頌이『담마파다』의 偈頌 153,154이다. 이 偈頌은 최초의 悟道頌이 되는 것이다. 붓다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아난다 테라의 요청에 따라 다시 반복해 주신 것이다.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두카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히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닙바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 붓다의 깨달음은 완전한 것이며 성스러운 진리를 얻음으로 하여 인간계와 천상에서 가장 위대한 으뜸 가는 스승이며 성인이 되었다. 위 시는 바로 이런 장엄한 순간을 붓다 자신이 읊은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중도(Majjhimapatpada)의 세계이며 열반(Nibbana)의 세계인 것이다. 이 중도는 구체적으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로 설명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의 통찰력으로 읊은 悟道頌이야말로 더 없이 깨달음의 세계를 잘 드러내주는 시이다. 禪詩의 진정한 생명력은 오도의 순간을 偈頌으로 읊는 悟道頌에 있다. 寒山詩에서 정확히 오도시로 전해지는 것은 알 수 없다. 寒山詩 전체가 제목 없이 쓰여졌기에 어느 것이 悟道頌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시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남기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오도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는 찾아 볼 수 있다. 굳이 오도시를 꼽으라면 다음의 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寒山의 悟道頌으로 볼 수 있는 시로서 첫번 째로 들수 있는 것이 다음과 같은 시이다. 50 내 마음은 가을 달인가 내 마음은 맑은 물인가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거니 어떻게 내게 말하라 하는가. 吾心似秋月 碧潭淸皎潔 無物堪比倫 敎我如何說 깨달음은 어떤 언어로도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위 시처럼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고 있다. 마음은 아무것에도 바유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무엇으로도 설명이 될 수 없는 마음의 지극한 경지는 어떤 언설로도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의 이러한 경지는 선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위 시는 寒山의 경지를 잘 나타내는 시이다. 寒山詩 중에서 오도시를 선택한다면 이 시가 가장 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여타의 시보다 더 깨달음의 경지를 잘 들어내주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오도송으로 간주 될 수 있는 다음 시를 하나 더 보자. 80 푸른 시내에 샘물이 맑고 찬 산에는 달빛이 희다 가만히 앎에 정신이 절로 밝고 공을 관하매 경계 더욱 고요하다. 碧澗泉水淸 寒山月華白 默知神自明 觀空境逾寂 위 시 또한 悟道頌으로 볼 수 있는 시이다. 물론 정확히 悟道頌인지는 증명할 수 없지만 그러나 寒山詩중에서 오도시에 가장 가까운 시를 든다면 또한 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도의 순간은 어떤 언어로도 담아 낼 수 없는 깊은 세계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수행의 과정을 걸어가고 있다. 한산시 중에서 분명히 오도송을 가려낸다면 시의 내용으로 보아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는 위 시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한산시에서 오도송을 밝혀서 전해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함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한산의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설령 깨달음을 성취하여 오도송을 읊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말하여 전하지 않으면 후대에 아무런 자료도 근거할 수 없는 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오도의 순간을 담아내기에는 세상의 어떤 형상적인 언어 문자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말을 떠나 달리 뜻을 전달할 수단이 없는 것이기에 불가불 언어를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한산시가 오랫동안 선가에서 애송되었음은 한산시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한산시가 오랜 수행의 과정을 통하여 쓰여진 선시일진대 그 깨달음의 경지를 담아내는 오도송을 남기고 있을 것이다. 2)示法詩 선사나 수행자는 법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때로는 시를 통하여 법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경우 示法詩라고 할 수 있다. 示法詩는 선사가 후학들에게 법을 보이는 禪詩를 말하는 것이다. 寒山詩에서 寒山이 누구에게 직접 법을 가르치기 위해 시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寒山이 법을 나타내기 위해 쓴 시를 볼 수는 있다. 寒山詩에 있어 示法詩에 해당되는 시는 다음과 같은 시들이 있다고 보여진다. 佛敎의 진리를 나타내는 시로서 마음 닦는 길을 바르게 살아가야 함을 잘 가르쳐 보이고 있다. 192 물이 맑고 고요하고 환히 밝으면 모든 것 속속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마음 가운데 진실로 한가지 일도 없으면 모든 경계가 움직일 수 없느니라 마음이 망령되이 일지 않으면 영원히 옮기거나 변하지 않나니 만일 그대 능히 이렇게 알면 이 지헤는 등과 앞이 없느니라. 水淸澄澄瑩 徹底自然見 心中無一事 萬境不能轉 心旣不妄起 永劫無改變 若能如是知 是知無背面 마음 경계를 잘 드러내어주는 示法詩라 할 것이다. 寒山의 시중에 비유적인 성공을 잘 거두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을 달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心月은 옛부터 법을 나타내고 도를 나타내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상징중 하나이다. 그래서 마음달이 밝으면 만물을 모두 비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마음을 잘 다스려 나갈 것을 가르쳐 보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86 성내는 마음은 마음속의 불 공덕의 숲을 살라 버린다 보살의 길을 행하고자 하거든 욕을 참으며 곧은 마음 지녀라. 瞋是心中火 能燒功德林 欲行菩薩道 忍辱護直心 성내는 마음을 참고 보살도를 행하라고 지극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한산시 중에는 이런 시법시의 성격을 보이는 시가 무척 많다. 다음 시 역시 이러한 그의 법을 나타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천진한 본성을 간직하라고 가르친다. 299 한산 꼭대기에 외로이 동그란 달 맑은 하늘 두루 비텨 막힐 것 없네 귀하구나 천연의 값없는 이 보배여 오음에 묻힌 채로 몸 안에빠져 있네. 寒山頂上月輪孤 照見晴空一物無 可貴天然無價寶 埋在五輪溺身구 다음시 역시 달을 마음에 비유하여 불성을 말하고 있다. 298 천년 반석 위에 옛사람의 발자국 만길 바위 앞에 한 점 푸른 하늘 밝은 달은 비치어 언제나 환하거니 서쪽 동쪽 찾기에 괴로울 것 다시 없네. 千年石上古人縱 萬丈巖前一點空 明月照時常皎潔 不勞尋訪問東西 자연속에 침잠한 깊은 속에서 어우러진 밝은 달은 그대로 일여한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297 별은 멀리 있고 밤빛은 깊었는데 바위에 외로운 등불 달은 기우네 뚜렷이 찬 광명 이지러짐 없거니 하늘에 걸려 있어 나의 마음일러라. 衆星羅列夜明深 巖點孤燈月未沈 圓滿光華不磨瑩 掛在靑天是我心 다음 시는 본성을 잘 지켜 본래 불성이 깨달음에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 시이다. 219 내 말을 부치나니 모든 착한 사람들아 그대들은 무엇으로 본회 삼는가 도를 깨달아 너의 본성을 보라 그 본성이 곧 부처이니라 천진도 원래 두루 갖춰 있나니 닦아 얻음 있으면 더욱 멀어지느니라 근본 버리고 끝을 따라 찾는 것 다만 한바탕 어리석음 지킬 뿐. 奇語諸仁者 復以何爲懷 達道見自性 自性卽如來 天眞元具足 修證轉差廻 棄本却逐末 祗守一場애 천진한 마음을 그대로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리석게 근본을 저버리고 새로 구하려는 마음은 더욱 도를 멀게 만든다고 경계 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산시의 곳곳에 천진성은 숨어서 반짝이고 있음을 볼 때 이런 점도 한산시가 선가에서 애송되었던 요인중에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면 다른 선사의 경우 示法詩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다음은 汾陽善昭가 대중에게 보이는 시이다. 대중에게 보임 봄에 이는 비와 봄에 이는 구름이 삶을 도와 만물을 새롭게 하네 푸르고 푸른 산은 점점으로 돋아 있고 푸른 풀은 고르게 우거져 있네 비 개이니 기인 허공 고요만 하고 구름 걷힌 하늘은 한빛으로 푸르네 고하노니 수도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물건 다시 있어 자성을 나타내랴 春雨與春雲 資生萬物新 靑蒼山點點 碧緣艸勻勻 雨霽長空靜 雲收一色眞 報言修道者 何物更堪陳 汾陽善昭는 寒山詩와 매우 관계가 깊다. 그는 서기 947년에 태어났다. 출가한 후 지팡이를 짚고 사방을 유람하면서 선지식을 역참하였다. 首山省念의 법을 이어 南嶽 아래 제 9세가 되니 臨濟宗의 법계에 속한다. 宋 仁宗 天聖 2년(1024)에 시적하니 세수 78세였다. 無德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문인 楚圓이 편집한 語錄 3권과 語要 1권이 전하여 온다. 위 시는 마음 공부하는 학인 대중들에게 자성을 밝혀 보이고 있는 것이다. 汾陽은 선의 거장일 뿐만 아니라 시적으로도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긴 禪詩들은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寒山의 示法詩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교훈적 입장에서 승가에 대하여는 비판적 입장에서 수행의 옳바름을 들어서 많이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臨終詩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 붓다의 출가와 깨달음 또한 이러한 생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생사해탈이야말로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것이다. 선사들에 있어 마지막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까? 생사를 자유롭게 오가는 선사의 경지에서 보여주는 마지막 임종의 목소리를 열반송이라 한다. 寒山은 어떤 임종게를 남기고 있는가? 寒山은 120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나이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쨋튼 寒山이 장수한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다음 시는 그가 100세를 넘어 장수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294 늙고 앓고 괴로운 평생 백 년 남짓해 누른 얼굴 흰 머리에 산중을 좋아하여 베옷으로 몸을 싼 채 인연 따라 지내거니 어찌 인간들의 꾸민 꼴을 부러워하리 다만 명리 위해 마음을 괴롭히고 몸을 돌보느라 온갖 탐욕 일으키네 인생은 덧없어라 등불 심지 같나니 무덤에 들고 나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老病殘年百有餘 面黃頭白好山居 布袋擁質隨緣過 豈羨人間巧樣模 心神用盡爲名利 百種貪람進己體 浮生幻化如燈盡 塚內埋身是有無 그의 나이 이미 100세를 넘어 얼굴은 누렇게 변하고 머리는 허옇게 희어 산에 사는 것을 즐겨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시는 드물게 한산 자신의 나이를 드러내고 있다. 閭丘胤의 서문을 보면 寒山과 拾得의 최후의 모습을 적고 있다. 閭丘胤이 國淸寺로 찾아오자 한암으로 들어가니 바위문이 저절로 닫혔다고 한다. 이것이 寒山의 최후의 모습으로 이후로는 다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寒山의 生死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311 이 寒山子 언제나 이러하다 스스로 혼자 있어 나고 죽음 없나니. 寒山子 長如是 獨自居 不生死 이 시는 寒山의 생사없는 경지를 잘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생과 사가 둘이 아니다. 用無生死의 경지라고 할까? 生死가 없는 경지를 쓰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생사에 끌려가지만 깨달은 사람은 생사를 능히 자재하는 것이다. 옛부터 많은 선사들이 입적에 앞서 열반송을 남기고 있다. 같은 육체의 죽음이라도 선사의 죽음은 다르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을 관조하고 스스로 죽음의 순간까지 매하지 않고 평안한 마음으로 간다. 중생들은 죽음에 끌려가지만 선사는 죽음을 받아들인다. 근본 자세가 다르다. 그래서 선사의 죽음을 坐脫入亡이라고 한다. 선사는 죽음을 철저히 무화시킨다. 그러기에 생사가 일여하다. 죽음은 본래 선사의 입장에서는 없는 것이다. 생사가 不二요. 그러기에 如是하다고 하는 것이다. 인생 최대의 문제는 생사문제이며 모든 사람은 생사로부터 도피할 수 없는 것이다. 생사는 깨달음으로서만이 능히 넘어설 수 있다. 수행자는 지혜해탈로 생사를 뛰어넘는 깊은 이치를 깨닫고 자기 생명을 장엄하게 된다. 다음은 다른 선사의 임종게를 살펴 보자. 仰山慧寂의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내 나이 일흔 일곱이 되도록 늙다보니 오늘에 이르렀네 성품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니 두 손으로 잡고 두 무릎은 굽힌다. 年滿七十七 老去是今日 任性自浮沈 兩手攀屈膝 仰山의 임종게는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무릎을 끌어 안고 일원상을 만들어 나타내고 있음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임종게이다. 이미 말이 더 이상 끊어진 자리라고 할까. 仰山(840-919)이 위산의 회상에 머물 때 어느 날 위산이 설법하기를 내가 3년 후에 이 산 아래 단월 집에 수고우로 태어날 것인데 왼쪽 옆구 리에는 위산승 아무개라는 글씨가 박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위산 승 아무개라고 부르려면 수고우가 되고 수고우라고 부르려면 위산승 아무 개가 되는 데,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라고 물었다. 이 말을 仰山은 사미 때 알아 듣고 위산과 계합하였다고 한다. 仰山은 위산의 법을 이어 위앙종을 일으킨 종장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는데 수행자의 임종은 죽음 자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점에서 일반적인 죽음과 의미가 다르다. 임종게는 이러한 뜻을 잘 담고 있는 것이며 寒山에 있어서도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경지를 시를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山居詩 수행의 공간은 주로 자연환경과 일치된다. 寒山에 있어서 이는 더욱 잘 어울린다. 天台山의 한암에 숨어 살았던 寒山이 산에 살면서 산에 관한 시를 남기고 있고 한산의 詩 중에서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 시가 山居詩라고 할 수 있다. 山居詩의 의미 속에는 매우 포괄적인 뜻이 함축 되어 있다. 선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질서 잡힌 시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寒山詩에 있어 寒山이 담고 있는 의미 또한 대단히 중요하며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寒山이 갖는 상징성은 다양하다. 寒山의 의미는 山名이며 人名이며 동시에 寒山詩의 상징적인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원래 寒山은 寒山子 살던 天台山의 바위굴이 한암이라는 이름에서 유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寒山은 은둔의 보편적인 세계를 나타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산중에 머물며 자연 속에서 쓰여진 시를 山居詩라고 이름할 수 있다. 후대에는 山居詩集도 나오게 되었으니 永明延壽의『山居詩竝和韻』二卷도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밖에 많은 선사들이 山居詩를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행과 숲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전통은 인도에서부터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원래 종교를 그 발상의 지역에 따라 사막의 종교와 숲의 종교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 사막의 종교는 주로 중동지역과 같은 사막지역에서 발생한 종교이고 숲의 종교는 인도와 중국같은 농경지역에서 발생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숲의 종교는 자연히 산과 숲을 가까이 하게 되고 그래서 자연과의 친밀감이 더해가게 된다. 寒山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자연의 상징인 靑山과 白雲의 깊은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는 시가 그의 작품에 많이 있다. 그 중에서 하나를 들어보자. 28 寒山을 올라가니 寒山길 끝이 없다. 골짜기 길어 바윗돌 모여 있고 시내가 넓어 풀이 더욱 파랗다. 이끼 미끄러움 비 온 탓 아니거니 바람 없어도 소나무 절로 운다. 누가 이 세상 번뇌를 멀리 떠나 이 흰구름 속에 함께 앉을꼬. 登涉寒山道 寒山路不窮 谿長石磊磊 澗闊草몽몽 苔滑非關雨 松鳴不假風 誰能超世累 共坐白雲中 위 시에서 白雲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에 있어 자연은 영원한 터전이며 자연은 그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寒山에 있어 寒山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의 정신세계의 근본에는 여여부동의 진리 당체가 있으며 그것은 그에게 영원불멸의 고향이 된다. 그것이 바로 寒山의 眞面目인 것이다. 寒山의 세계는 이미 세속의 어떤 번뇌로부터도 벗어난 세계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白雲과 같은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白雲은 그에게는 靑山과 더불어 가장 근원적인 자연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매우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寒山詩에 나타나는 자연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시에서 寒山은 자연의 寒山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이상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이런 한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289 첩첩한 구름 산은 하늘 높이 푸르른데 험한 길 숲은 깊어 사람 자취 없어라 눈을 멀리 바라보면 외로운 달은 밝은데 지저귀는 새 소리 귓가에 어지럽네 늙은 지아비 홀로 푸른 산에 깃들어 좁은 방에 한가히 흰털에 맡겨 두네 돌아보면 지난 때나 또 오늘도 무심하기 동으로 흐르는 물 같나니. 雲山疊疊連天碧 路僻林深無客遊 遠望孤蟾明皎皎 近聞群鳥語추추 老夫獨坐棲靑장 少室閑居任白頭 可歎往年與今日 無心還似水東流 산중에 사는 생활의 정경을 무심하게 나타내는 한산의 경지는 대단히 평화롭고 한가한 아름다운 풍경화같은 느낌을 준다. 물은 졸졸 동으로 흘러가고 달은 밝아 휘엉청한데 오가는 자취 없어 더욱 조용한 산중을 느끼게 한다. 寒山의 산거시는 매우 아름답다. 오랫동안 산에 은거하면서 자연의 깊은 내면을 잘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산거시 중에 매운 뛰어난 시가 많다. 寒山詩의 眞面目은 산거시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산거시는 선과 어우러져 매우 특이한 광채를 발하고 있다. 많은 禪詩들 중에 山居詩가 가장 많은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山居詩가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은 다른 선사의 시 중에 山居詩를 보자. 솔 아래 두 서너간 띠풀집 지니 눈앞은 사면이 푸른 산이네. 해와 달은 뜨고 지고 머물지 않고 흰구름 오든 가든 한가하다네. 松下數椽茅屋 眼前四面靑山 日月升沈不住 白雲來去常閑 위 시는 敢山德淸 선사의 시이다. 산중 생활의 한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언제나 푸른 산은 앞에 마주 하고 있고 흰구름과 산은 벗이 되어 더불고 흐르는 해와 달 또한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고 있는 경지이다. 山居詩의 전통은 山水詩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산수시의 흐름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 謝靈運(385-433)이다. 그는 벼슬에 나아갔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여 항상 산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 길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가는 곳마다 항상 시를 지어 남겼다. 그가 찾는 산은 반드시 깊고 험준한 산이었으며 아무리 멀어도 마다하지 않았다.『文選』에는 그의 산수시를 많이 싣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은 그의 산수시를 살펴보자. 그가 자연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嘗心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유의해 볼 것이다. 나의 뜻을 그 누구에게 밝힐 것인가 오직 상심만이 이를 잘 알고 이해하리라. 我志誰與亮 賞心惟良知 (文選 권 22.)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입장은 세상의 어려운 일을 벗어나 자연 속에 묻혀 살고져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나를 괴롭혀도 자연만은 나를 알고 이해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늘 그리워하는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길 떠난 새는 옛친구를 그리워하고 길 떠난 새는 옛 수림을 그리워한다. 정을 머금고 또 수고하고 사랑하니 어찌 상심을 떠날 것인가? 이와 같이 賞心은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근본 마음인 것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기에 상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謝靈運에 있어서의 자연은 산수시를 통하여 매우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陶淵明등에 이어져 寒山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寒山의 山居詩는 天台山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삶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의 산수시의 전통위에 서있는 것이다. 이러한 山居詩로서 대단히 뛰어난 시를 남긴 선사들은 무수히 많다. 太古普愚스님도 그러한 선사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의「太古庵歌」를 보면 그 높은 경지를 알 수 있다. 내 이 암자 살면서도 나 자신 모르나니 그윽하고 깊건마는 옹색함이 없는 그 것. (생략) 산 위에 구름 엉겨 희기도 흰데 산 속을 흐르는 물 끊임도 없어 그 누구 저 흰구름 볼 줄을 알랴? 개인 하늘 비 쏟아져 번개 치는 듯 (생략) 운문의 호병과 趙州의 차가 우리 암자 이 맛을 어찌 따르랴? (생략) 내 암자의 추함이 이와 같거니 새삼 무어라 말을 낼 거랴? 춤 마치고 삼각산 돌아와보니 靑山과 맑은 샘물 여전하도다! 太古庵歌는 매우 긴 詩라서 다 옮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산거의 수도생활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처럼 山居詩는 수도의 생활과 자연 속에서의 시적인 삶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 禪詩의 진정한 폭 넓은 대중적 수용은 山居詩 내지 산수시 속에 잘 용해되어 드러나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 寒山의 山居詩는 天台山에 은거하여 수도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일여한 높은 경지를 선수행을 통하여 터득하고 또한 그의 경지를 시로 드러내고 있음이 매우 훌륭하다고 하겠다. 3.僧伽 批判의 詩 寒山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 비판적인 면을 빼 놓을 수 없다. 그의 비판정신은 매우 준열하고 날카롭다. 세상에 대하여 교훈적인 비판을 하기도 하고 신선술의 헛됨에 대하여 지적하기도 하며 승가의 타락에 대하여 그는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그의 시 속에는 저속한 승려를 준열히 매도하는 시가 상당히 있다. 이른 바 비판시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바판시중에는 유교와 사회와 신선술의 허상과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며 훈계하고 있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南宗禪의 입장에서 북종선을 비판하기도 하고 거사적 입장에서 방주를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비판은 매우 통렬하며 풍자적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승가를 비판하는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283 스님이 되어 계율도 지키지 않고 도사로써 또 약도 먹지 않는구나 옛날부터 그 많은 어질다는 사람들 모두 다 푸른 산기슭에 누웠나니. 沙門不持戒 道士不服藥 自古多少賢 盡在靑山脚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승가의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그의 비판의 시각은 계율적인 면과 수행적인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계율이 수행과 달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승가의 무절제한 행동과 잘못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게율을 지키는 것은 출가자의 본분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계율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寒山은 이에 대하여 매우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집 떠난 이는 출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寒山의 계율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계율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금하는 조목과 당연히 배우고 지켜야 할 계목을 제정하여 지키는 것을 말한다. 계율을 제정하게 된 동기는 꽃다발을 그냥 두면 바람에 날려 곧 흩어지지만 끈으로 잘 묶어두면 오래 가는 것과 같이 승가에 있어서도 계율로 승가를 잘 보호하면 오래 정법이 머물것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의해서이다. 현재 계율이 전해지는 것이 南方佛敎와 北方佛敎가 다르다. 북방의 한역 율장은 廣律로『四分律』,『五分律』,『十誦律』,『摩하僧祗律』,『根本說一切有部律』등 五部律이 전해지고 남방에도 巴利律이 전해지고 있다. 寒山이 어떤 계율을 보고 그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승가의 명맥은 계율에 있는 것이기에 寒山의 입장은 단호하다 북방의 계율은 남방의 계율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남방의 佛敎는 형식적인 점을 중요시 하여 부처님이 제정한 계목에 철저한 바탕을 두고 있는데 반하여 북방의 경우는 心戒라고 하여 근본 정신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가령 남방엣거 오후 불식의 계율을 철저히 지킨다던가 육식을 막지 않는 점에서 북방의 계율을 지키는 점과 서로 달리 하고 있다. 한산시에서의 계율적인 면에서 특히 비판적인 대상중 하나가 식육의 문제이다. 원래 식육의 문제는 인도문화권과 중국문화권의 차이에서 오는 중교적 풍습의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붓다시대에도 육식의 문제는 제기되어 육식을 하는 파도 있고 육식을 하지 않는 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식육을 반대한 파로는 제바달다와 그를 따르는 일파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유까지 먹기를 거부하였으며 이런 주장을 따르는 일파가 현장이 인도를 순례하였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점에서는 퍽 관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근본佛敎에서는 계율상 계목으로 식육을 금하는 대목은 없다. 약으로 5정육을 먹을 수 있게 열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비구는 음식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출가자는 언제나 하루에 한번 걸식하여 식사를 하였으며 이런 전통은 남방에서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北方佛敎로 넘어오면서 따로 범망경을 만들어 중국인의 정서에 맞게 식육을 금하는 것이 강조 되었다. 식육을 금하는 것은 다분히 도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음의 시도 식육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시이다. 249 고기 먹는 이에게 내 한 말 부치나니 그래 고기 먹을 때 주저하지 않는가 전생은 이생의 종자요 내생은 이생의 결과니라 다만 오늘의 즐거움에 취해 내생의 걱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마치 늙은 쥐 잡통에 든 것 같아 배는 부르나 나오기 어렵나니. 寄語食肉漢 食時無逗留 今生過去種 未來今日修 祗取今日美 不畏來生憂 老鼠入飯瓮 雖飽難出頭 寒山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적인 문화 풍토에서 이미 佛敎가 정착되어 있던 때라 식육을 금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출가자들이 육식을 하는 것에 대하여 寒山은 상당히 강하게 비판 하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寒山의 눈에 비친 당시 中國佛敎의 계율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이러한 寒山의 태도는 그의 시 속에 많이 나타난다. 181 고기를 사면 피가 줄줄 흐르고 생선을 사면 아직 살아 펄떡이네 그대는 그로 인해 죄업을 부르는데 그대 처자는 좋아라 날뛰는구나 그대 숨지자 그녀 곧 시집 갈 것을 남이 누가 감히 그걸 막으리 하루 아침에 부서진 상과 같이 살생과 사음을 당장 벗어나라. 買肉血活活 買魚跳발발 君身招罪累 妻子成快活 재死渠便嫁 他人誰敢알 一朝如破牀 兩箇當頭脫 시에서 느끼는 육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살생과 사음은 佛敎 계율의 4바라이로서 무거운 것이 된다. 중생들은 이런 살생을 통하여 끝없이 윤희의 고통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시 역시 같은 내용으로 중생들이 맛에 취하여 잘못을 범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시이다. 188 내 이 중생의 병을 슬퍼하나니 먹고 맛보기를 싫어할 줄 모르는구나 돼지를 잡아 마늘장을 바르고 오리를 구워 후추 소금 뿌리네 뼈를 바르고 생선을 회치고 껍질을 붙여 살코기를 굽는다. 남의 목숨의 괴로움은 모르고 다만 저희들의 입맛만 꾀하는구나. 怜底衆生病 飡嘗略不厭 蒸豚온蒜醬 炙鴨點椒鹽 去骨鮮魚膾 兼皮熱肉膾 不知他命苦 祗取自家甛 이처럼 중생들은 윤회의 고통을 모르고 입맛에 취하여 온갖 고기와 술을 즐겨 먹고 있으나 이 모두 업을 짓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승가의 일상 생활을 통하여 잘못된 일들을 비판하는 寒山의 시각은 오늘에 있어서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寒山은 승가 비판에 있어 계율적인 면과 아울러 수행에 대하여도 준열히 법도를 세우고 있다. 그가 출가했는지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후대에는 거의 출가한 스님으로 보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다음은 출가자에 대한 비판 시를 보자. 그는 출가의 길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27 내 보니 집을 나와 스님이 된 사람 집 떠난 공부에는 들어가지 않더라 집 떠난 참맛을 알고 싶어 하는가 우선 마음 깨끗하여 얽매임 없어야 하네 끝없이 맑고 틔어 현묘마저 뛰어나고 언제나 홀로 있어 의지하지 않으며 三界를 가로 세로 마음에 맡겨 두고 사생을 오고 가며 머무르지 않나니 그는 마음 없고 일 없는 사람 시름없이 거닐어 진실로 유쾌하네. 我見出家人 不入出家學 欲知眞出家 心淨無繩索 澄澄絶玄妙 如如無倚託 三界任縱橫 四生不可泊 無爲無事人 逍遙冥快樂 집을 떠난 사람을 出家者라고 하며 이는 比丘라고 하는데 비구란 본래 三寶중의 하나로 세속에 초연하고 고행정진하여 자리의 지혜를 얻어 자아를 완성한 다음 傳法度生을 목적으로 삼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산은 여기서 진정 집 떠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매우 철저히 출가자의 가치를 세우고져 하는 태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시에서도 그런 태도가 역력하다. 255 그대들 출가자에게 내 이르나니 어떤 것 일러 출가라 하는가 호사로이 이 한 몸 기르기를 구하고 이름난 성받이와 사귀어 노는 것 맛난 음식으로 혓바닥 달게 하고 아첨하고 굽은 마음 낚시 같은 것 한종일 도량에서 예배드리고 경을 가져 사업을 계획하는 것 향로에는 신불에 향을 사르고 종을 치며 멋지게 염불하는 것. 여섯 때로 마음은 바깥 경계 달리면서 밤으로 낮을 이어 눕지 않는 것 다만 돈과 재물을 사랑하기에 마음 속은 언제나 흐리어 있고 저 도 높고 어진 스님 만나면 도리어 시기하고 비난하는 것 나귀 오줌을 사향에 겨누는가 아아 괴로워라 나무불타야. 語爾出家輩 何名爲出家 奢華求養活 繼綴族姓家 美舌甛脣자 도曲心鉤加 終日禮道場 持經置功課 노燒神佛香 打鍾高聲和 六時學客春 晝夜不得臥 祗爲愛錢財 心中不脫灑 見他高道人 却嫌誹謗罵 驢屎比裟香 苦哉佛陀耶 출가해서 바르게 살지 못하고 재물과 욕락을 탐하는 잘못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재물에 끄달려 언제나 마음은 흐려져 있는 그들을 향해 바르게 마음 낼 것을 말하고 있다. 256 내 또 출가자 보니 거기는 공 있는 자 힘 없는 자 있다 가장 위 되는 절개 높은 사람은 귀신도 그 도덕을 사모하나니 임금도 수레를 나누어 앉고 제호는 절하며 맞아들인다 그는 진실로 세상 복밭 되리니 세상 사람은 아껴야 할 것이다 가장 밑 되는 어리석은 사람은 거짓을 꾸며 이익을 구하나니 그의 흐린 정신은 알 수 있는 것 재물과 돈에 마음을 빼앗기네 복밭의 옷을 어깨에 걸고 농사를 지어 의식을 도모하고 빚 주어 우양을 세로 받는다 하는 일마다 진실하고 곧지 못해. 날마다 악한 일 함부로 저지르며 가끔 궁둥이나 등뼈를 병 앓는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알지 못하여 지옥의 고통은 끝이 없으리 하루아침에 병에 휘몰려 삼년을 자리에 누워 있으면 비록 참 불성 갖추어 있다 해도 그것은 도리어 무명의 적이 된다 아아 가여워라 나무불타야 멀리 미륵불이나 기다려 볼까 又見出家兒 有力及無力 上上高節者 鬼神欽道德 君王分輩坐 諸侯拜迎逆 堪爲世福田 世人須保惜 下下底愚者 許見多求覓 濁濫卽可知 愚癡愛財色 著却福田衣 種田討衣食 作債稅牛려 爲事不忠直 朝朝行弊惡 往往痛臀脊 不解善思量 地獄苦無極 一朝著病纏 三年臥牀席 亦有眞佛性 번作無明賊 南無佛陀耶 遠遠求彌勒 출가해서 어리석게 제대로 도를 닦지 못하는 사람의 안타까움을 지적하고 있다. 출가 했다고 다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는 훌륭한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寒山의 이런 비판은 매우 세차고 날카롭고 예리하다. 그의 시에는 인간의 유한한 죽음 앞에서 허무하게 욕심 부리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시를 많이 쓰고 있다. 무상을 말하는 것이 어찌 寒山詩 뿐이랴. 그러나 寒山은 매우 세심하고 깊은 애정으로 무상한 세상에 도취되어 잘못 사는 중생을 깨우치고 있다. 한산의 비판은 승가뿐 아니라 사회와 도교에 대하여도 추상같다. 다음은 사회를 비판 하고 있는 그의 시를 살펴보자. 4.社會 批判의 詩 비판은 지식인의 살아있는 양심이다. 寒山에 있어서 그 당대의 비판은 寒山이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다. 그는 매우 예리하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원적인 구조의 모순을 시를 통하여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그런 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인간들이 이기심으로 서로 싸우는 것을 개가 뼉다귀 하나를 놓고 서로 물어 뜯는 것으로 비유를 들고 있다. 매우 놀라운 사실감을 불러 일으킨다. 57 내 보니 열마리 백 마리 개들 그들은 털이 모두 어지러웠다. 눕는 놈은 제각기 누워 있고 다니는 놈은 제각기 다니다가 그러다가 고개 뼈다귀 한 개 던지면 그들은 이빨을 들어내 서로 싸웠다. 이는 오로지 개는 많고 먹이는 적어 공평하게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我見百十狗 箇箇毛쟁녕 臥者渠自臥 行者渠自行 投之一塊骨 相與애자爭 良由爲骨少 狗多分不平 이 시는 사회주의화 된 중국에서 寒山을 새롭게 평가 하면서 사회적 계급모순을 나타내고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사회를 비판하는 시로는 주로 현실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또 벼슬아치나 부자들의 인색함을 꾸짖는 것이 많다. 다음의 시도 그러한 부자를 일깨우는 시중에 하나이다. 37 부잣집 아들 세상 일에 허덕이며 일마다 남의 말 믿지 않는다. 창고의 쌀은 좀 먹고 썩어 가도 남에게 한 말 한 되 꾸어주지 않는다. 그 위에 속으로 낙시 마음을 가져 비단을 사도 먼저 문채비단을 가린다. 이 사람 한번 숨 거둔 뒤에는 조상꾼이란 다만 쉬파리 있으리라. 富兒多앙掌 觸事難祗承 倉米已赫赤 不貸人斗升 轉懷鉤距意 買絹先揀綾 若至臨終日 弔客有蒼蠅 寒山에게 부자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줄을 모르는 매우 인색한 사람으로 그들이 죽은 뒤에 무엇이 남는가고 신란하게 비판하고 있다. 베풀줄 모르는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를 조상하는 것은 쉬파리 뿐이라고 강하게 사회의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면을 비판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소유와 분배의 평등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일 것이다. 이런 문제의 대립으로 이상적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사회주의적 세계관도 출현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갈등이 계속되는 것이다. 인간에 있어 분배의 평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은 영원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의 모순을 딛고 이런 이상을 위해 나아가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끼리 서로 갈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들어내고 있는 시를 보면 상당히 현실감이 있으며 동시에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85 집을 떠나 일만리 밖을 나와 검을 높이 들어 되놈을 친다. 네가 승리하면 그는 곧 죽을 것을. 그가 승리하면 네가 곧 죽으리라. 이미 그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너 또 너의 목숨인들 무슨 허물 있는가 너에게 언제나 이길 꾀 가르쳐 줄까? 탐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꾀이니라. 去家一萬里 提劍擊匈奴 得利渠卽死 失利汝卽조 渠命旣不惜 汝命有何辜 敎汝百勝術 不貪爲上謀 위 시는 인간이 서로 투쟁하지 않으면 않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인간과 인간사이에 어쩌면 영원히 서로 투쟁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 사회인지도 모른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말하고 있듯이 인간사회는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투쟁을 계속하여 가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인간이 욕망에 탐착하는 한 계속되는 것이다. 이 투쟁을 쉬는 방법은 탐욕을 내려 놓는 길 뿐이다. 이것은 佛敎의 보편적인 삶의 태도이며, 이러한 무욕의 세계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안락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진정한 출가는 바로 모든 것을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寒山은 바로 이 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寒山이 꿈꾸는 것도 바로 이런 이상세계라고 할 수 있다. 『寒山詩集』에는 도교의 신선술에 대한 비판적인 시도 여러 편 보인다. 일찌기 寒山 자신이 젊은 시절에 老莊의 사상에 접했음을 들어내는 대목도 그 자신의 시 속에서 말하고 있다. 신선술로 사람을 현혹 시키는 것에 대하여 그는 매우 부정적으로 맹렬하게 비판을 나타낸다. 신선술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시를 보자. 253 내 들으니 한 나라의 무제 때부터 진 나라의 시황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신선술을 좋아해 오래 살려 했으나 끝내 얻지 못했다 금대에서 이미 목숨이 끊어졌고 사구에서 도리어 멸망했나니 무릉과 여악 오늘은 어떤가 잡초만 어지러이 우거졌나니. 常聞漢武帝 爰及秦始皇 俱好神仙術 延年竟不長 金臺旣최折 沙丘遂滅亡 茂陵與驪嶽 今日草茫茫 위 시는 신선술로 장수를 꾀했지만 죽음을 면할 수 없는 허망함을 드러내고 있다. 역대의 제왕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신선술을 찾아 오래 살고져 했으나 모두 묏등에는 잡초만이 무성한 것이다. 다음시 역시 신선술의 허망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28 어제 우연히 운하관 가서 신선의 높은 선비 잠깐 보았다 별갓과 달너울 비껴 쓰고 모두들 사수에 산다고 했다 내 신선의 방술을 물었더니 어떻게 비유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것은 신령해 위가 없으며 묘한 약은 틀림없이 신비하다고 송장을 지키어 학 오기 기다리고 고기를 타고 간다 그들은 말했다 돌아와 그것을 생각해보고 다시 생각해도 그럴 도리 없었다. 하늘을 겨누어 활을 쏘아라 화살은 이내 도로 땅에 떨어지나니 너 비록 신선이 된다더라도 송장을 지키는 귀신과 다름없다 마음 달만 스스로 오로지 밝으면 이 세상 어느 것을 거기 겨누리 선단의 법을 알고자 하는가 몸 안의 본정신이 그것이니라 어리석게 황건공의 요술을 배워 스스로 지키기를 꾀하지 말라. 昨到雲霞觀 忽見仙尊士 星冠月피橫 盡云居山水 余問神仙術 云道若爲比 謂言靈無上 妙藥必神秘 守死待鶴來 皆道乘魚去 余乃返窮之 推尋勿道理 위에서와 같이 그의 시를 보면 도교의 신선술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이상은 寒山의 詩世界를 불교문학의 입장에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아울러 비판시를 통하여 그가 승가와 도교와 사회의 잘못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Ⅴ. 寒山詩의 禪思想 寒山詩의 禪思想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唐代는 詩學의 황금 시대이며 또한 禪學의 황금시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禪과 詩가 만나고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었던 것은 당대문화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정신적인 깊은 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태어난 인물이 寒山이다. 이제까지 寒山은 경세적인 인물 혹은 은둔자로서 탈속한 인물로만 文學的 관심을 기울여 왔으나 이런 것은 寒山의 진정한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寒山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그의 禪思想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寒山에 대한 硏究는 주로 文學的 측면에서만 다루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寒山의 眞面目은 禪思想에 바탕한 그의 禪詩에서 찾아볼 수 있다. 寒山의 생존 년대를 8세기로 보는 경우 대략 南宗禪의 발흥과 때를 같이 한다. 寒山詩에서 禪思想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함께 살펴져야 할 것이다. 그가 은둔했던 天台山은 본래 天台宗의 발생지이며 천태교학이 가장 성했던 곳이다. 그런 사정으로 인하여 寒山을 天台宗의 사상에 깊이 경도 돼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피상적인 견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寒山詩에 나타나는 천태사상에 관해서는 그렇게 두드러진 것이 없다. 산명에서 天台山을 들어 시에서 이야기 하고 天台宗의 소의경전인『법화경』에 대하여 화택의 비유등을 들어 시에서 인용하고 있을 뿐 크게 천태사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의 전반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점은 禪思想이 짙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禪思想을 바탕으로 寒山은 매우 뛰어난 禪詩를 남겨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열었던 것이다. 寒山詩의 가장 뛰어난 시들은 禪思想을 바탕하여 자연과 어우러진 선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寒山이 살았던 시대는 선종이 시작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寒山은 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寒山의 시 전부가 禪詩라고 불릴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寒山詩는 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寒山의 南宗禪과의 관계, 청산 백운의 상징세계, 體와 用의 구조, 그리고 그의 독특한 禪思想을 담고 있는 任運思想과 자연의 인식을 드러내주는 자연관을 알아봄으로서 寒山詩의 禪思想을 약간이나마 천착해보고져 한다. 1.南宗禪과의 關係 南宗禪은 慧能에서부터 비롯된 禪宗으로서 祖師禪으로 전개 되는 과정이 대략 7세기를 전후하여 시작되어 9세기쯤 완성을 보인다. 寒山의 생존을 700-800년대로 추정할 때 당시 선가가 남·북종으로 나누어지고 神會에 의해 남종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 하던 때와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과연 寒山은 어떻게 禪思想을 받아들였는지 살펴보자. 慧能사상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無一物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잘 알려져 있듯이 慧能의 心偈에서 보여지고 있다. 神秀의 禪思想과 慧能의 禪思想이 대비되는 가장 강렬한 모습을 모여주는 현장이 바로 心偈를 통하여 연출되었다. 慧能에 대한 硏究는 그동안 꾸준히 이루어져 왔으나 慧能이 워낙 의문을 많이 갖고 있는 인물이라서 그의 사상 또한 많은 의문을 안고 있다. 우선 그의 생존 년대 자체가 불분명하며 또 그의 語錄인『壇經』의 성립과 유통과정이 매우 불확실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중국 선종의 근간을 이루고 마침내 선종이 中國佛敎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은 바로 慧能의 사상에 의해서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慧能이 있기까지에는 神會의 숨은 노력이 있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慧能을 남종의 조사로 받들게 된데에는 神會가 6조 현창운동을 기울인 덕분이다. 慧能이 내세운 사상은 바로 頓悟思想이기도 하다. 本自具足한 自心을 몰록 깨달으라고 慧能은 가르친다. 頓悟란 자심이 본래 공적한 것을 깨닫는 것이며 마음 에 얻을 바가 없는 것이 며 공을 설하는 것을 듣고 공에 집착하지 않고 불공에도 집착하지 않고 我에도 無我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생사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다. 無念은 자성을 깨닫는 것이며 無所得이며 여래선이다. 여래는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며 현재에도 또한 무주인 것이다. 다음시는 한산의 頓悟思想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195 아아 두려워라 삼계의 수레바퀴 생각생각에 일찍이 쉬지 못하는구나 겨우 거기서 벗어났나 했더니 어느새 다시 잠기고 마는구나 가령 저 비비상의 유정천에 나더라도 그것은 다만 복의 힘을 인연한 것 어찌 저 진정한 근원을 알아 한 번 얻어 곧 영원히 얻지 않으랴. 可畏三界輪 念念未曾息 재始似出頭 又隙遭沈溺 假使非非想 蓋緣多福力 爭似識眞源 一得卽永得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게 된다는 것은 곧 돈오의 깨달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산의 시에서는 돈오사상이 잘 배어 있다고 본다. 분명히 그의 시에는 천태사상보다는 南宗禪의 祖師禪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종선의 대표적인 사상중에 一物思想을 들 수 있다. 一物思想은 慧能과 관계되어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시는 한산이 남종선의 一物思想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165 한산에 집 한채 있어 그 집에는 난간도 벽도 없나니 여섯 문은 좌우로 통해 방안에서도 푸른 하늘 보이네 방은 모두 텅 비어 쓸쓸한데 동쪽 벽은 무너져 서쪽 벽을 치는구나 이 가운데는 한 물건도 없나니 빌리러 오는 이의 보챔이 없네. 寒山有一宅 宅中無蘭隔 六門左右通 堂中見天碧 房房虛索索 東壁打西壁 其中一物無 免被人來借 아래 시 역시 一物 思想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158 우리 집에 하나 굴이 있으니 이 굴 속에는 아무것 없네 깨끗하고 비어 씩씩한 기운 빛은 밝고 빛나 밤낮이 없네 나물밥으로 약한 몸을 기르고 누더기 옷으로 환의 물질 가리나니 일천 성인이 나타나건 말건 내게는 원래 천진 부처 있어라. 余家有一屈 屈中無一物 淸潔空堂唐 光華明日日 蔬食養微軀 布袋遮幻質 任爾千聖現 我有天眞佛 이처럼 한산시에서는 남종선의 일물사상과의 밀접한 관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산시가 선사상에 매우 깊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일물사상의 시는 풍간에 있어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다음 시를 보면 여실하게 알 수 있다. 한산시집에는 한산과 풍간과 습득의 시가 함께 실려 있는데 풍간의 시는 2수가 있다. 사실 寒山과 豊干의 시는 서로 구분할 수 없을만큼 사상적인 차이가 없다. 다음은 豊干의 시로서 南宗禪과의 깊은 관계를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316 본래에 한 물이란 물도 없거니 떨어 버려야 할 티끌도 또한 없네 만일 이뜻을 깨달아 안다면 구태여 꼿꼿이 앉을 것도 없느니라. 本來無一物 亦無塵可拂 若能了達此 不用坐兀兀 寒山의 사상적 핵심은 역시 그가 가장 크게 정신적으로 뿌리를 내린 禪思想이라고 하겠다. 一物思想은 南宗禪의 독특한 사상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물사상은 南宗禪의 중심 사상으로 神會에 의해 확립된 사상이며 후에 선종에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이와 같이 寒山은 깊게 남종의 禪思想을 영향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로는 一物이 天然物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 시를 보자. 157 아아 귀하여라 천연의 물건이여 홀로 하나이어서 짝이 없어라 그를 찾아보나 볼 수는 없고 들어가고 나오는데 문이 없구나 이것을 모아 쥐면 방촌에 들고 이것을 뻗쳐 놓으면 없는 곳 없네 그대 만일 이것을 믿지 않으면 서로 만나더라도 만나지 못하리라. 可貴天然物 獨一無伴侶 覓타不可見 出入無門戶 促之在方寸 延之一切處 爾若不信受 相逢不相遇 이 한 물건은 홀로 짝할 것이 없으며 찾아도 드러나지 않으며 출입에도 문이 없다. 세상에 없는 곳이 없으나 모으면 바늘 구멍보다도 작은 것이다. 이를 믿지 않으면 만나도 서로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사상은 바로 一物思想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다음의 시 역시 마찬가지로 남종선과의 관계를 드러내주고 있다. 259 본뜻은 도의 벗을 그리워하나니 도의 벗은 언제나 친할 수 있다 때로는 근원을 막는 사람 만나고 매양 선 이야기의 손을 대한다 달 밝은 밤에는 깊은 진리 이야기하고 해 뜨는 새벽에는 도를 찾는다 모든 마음 모조리 자취 멸하면 본래의 사람을 비로소 아나니. 本志慕道倫 道倫常獲親 時逢杜源客 每接話禪賓 談玄月明夜 探理日臨晨 萬機俱泯寂 方識本來人 위 시는 한산시중에서 드물게 선과의 관계를 나타내주고 있으며 상당히 철학적인 냉용을 담고 있는 시이다. 본래인의 사상은 남종선의 사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한산이 선객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음은 그의 禪詩와 연관이 깊은 祖師禪에 대하여 살펴보고 과연 어떤 사상적 맥락이 있는지 알아보자. 『능가경』에서 설한 一字不說이나 指月의 손가락의 교시는 교묘하게도 중국의 사유가 산출시킨 得魚忘筌이라는 道生의 頓悟說과 종합되어 달마의 『二入四行論』의 二入이나 籍敎悟宗의 설법과 함께 전개 되었다. 神會는 달마로부터 시작되는 중국선종의 본질적인 전통을『능가경』의 여래선을 가지고 南宗禪의 내증을 주장하고 있으며 마조도일은 『능가경』의 불오심을 종으로 하는 새로운 祖師禪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선종 초기에 있어 『능가경』의 수용은 마조를 경계로 하여 새로운 새대로 옮겨가고 있다.남종선의 발전은 조사선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는데 조사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더할나위 없이 馬祖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마조는 바로 조사선의 기치를 드러낸 인물이며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平常心是道라고 할 수 있다. 그의 祖師禪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시를 보자. 94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 하고 목이 마르자 비로소 샘을 파네 아무리 애써 기왓장을 갈아도 끝내 거울은 되어지지 않나니 부처님 말씀에 원래 평등하여 모두 진여성이 있다고 하셨네 다만 안으로 자세히 생각하고 함부로 다투어 밖으로 닫지 말라. 烝砂擬作飯 臨渴始掘井 用力磨록전 那堪將作鏡 佛說元平等 總有眞如性 但自審思量 不用閑爭競 위 시는 祖師禪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馬祖와 南嶽과의 깨달음의 기연을 담은 고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보아 이미 祖師禪이 상당히 보편화 되었음을 알 수 있고 한산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진다. 다음의 시도 그가 祖師禪에 연관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祖師禪에서 話頭를 들되 모기가 쇠로 된 소의 등에 올라 타 빠는 것처럼 온 몸의 힘을 다 하여 話頭를 의정으로 몰고 가면 자연히 깨달음의 계기가 온다고 하는 말을 그의 시에서도 볼 수 있다. 62 비록 그대 귀신을 만나더라도 첫째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를 꼭 잡으려고 하지도 말라. 그 이름 부르면 스스로 떠나리라. 향불을 살라 부처님 힘을 빌고 예배를 드려 스님의 도움을 구하라.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를 찌르듯 거기에 주둥이 댈 곳이 없으리라. 若人逢鬼魅 第一莫驚懼 捺硬莫采渠 呼名自當去 燒香請佛力 禮拜求僧助 蚊子釘鐵牛 無渠下嘴處 모기가 쇠로 된 소를 빨듯 하라는 이 소식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의 길 또한 끊어진 조사선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 시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선의 格外의 소식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格外의 정신을 話頭공부하는데 직절하게 가르치고 있다. 모기가 쇠로 된 소의 등에 앉아 부리를 박고 빨다 보면 몸 통째로 쑥 들어가는 소식이 있음은 주둥이 댈 곳이 없는 데서 참으로 살아나는 본분 소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산의 시세계에 나타나는 선사상은 남종선과 깊이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靑山 白雲의 象徵構造 寒山의 詩世界에서 가장 보편적인 상징 언어를 든다면 청산과 백운을 들 수 있다. 한산시에서 청산 백운은 어떤 상징구조를 갖고 있는 것인가? 寒山은 많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寒山은 天台山중에 있는 寒山이 살았던 바위일 수도 있고, 寒山 그 자신일 수도 있고, 또 깨달음으로 향하는 목표라고 볼 수도 있고, 어떤 은사의 은거하는 행위를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으니 실로 寒山이 상징하는 바는 대단히 많은 포괄성을 갖고 있다. 寒山子는 寒山을 통하여 깨달음을 상징하고자 한다. 그는 頓悟의 입장에 서있으며 寒山을 오름은 곧 깨달음에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산이 도달한 경지는 보통사람이 오르기에는 몹시 험준하다. 겨울에는 흰 눈이 나무에 꽃 피고 항상 구름이 뒤덮혀 있는 것이다.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하여 곱게 채색이 아름답지만 맑은 날이 아니면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한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가지 상징을 갖고 있다. 다음 시를 보면 이러한 상징이 잘 드러난다. 150 한산은 몹시 깊숙하고 험준해 오르는 사람 모두 언제나 저어하네 달이 비치면 물은 차거이 맑고 바람이 불면 잎은 떨어 스산하다. 마른 매화 덩굴에는 눈이 꽃을 붙이고 꺾인 나뭇가지에는 구름이 잎을 단다. 가끔 비를 만나면 산빛 더욱 곱지만 맑은 날이 아니면 오르지 못하나니. 寒山多幽奇 登者皆恒攝 月照水澄澄 風吹草獵獵 凋梅雪作花 兀木雲充葉 觸雨轉鮮靈 非晴不可陟 이와 같이 한산은 도를 닦는 마음으로 상징되어 시 속에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白雲도 이런 상징성을 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白雲에 대한 이미지는 초월적인 상징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 시도 그러한 상징을 읽을 수 있게 한다. 237 세상 사람 구름길 찾고 있건만 구름길 아득하여 자취 없나니 산으로 가랴 산은 높아 험하고 강으로 가랴 강은 넓어 흐렸네 푸른 메뿌리 앞뒤로 막아 있고 흰구름은 동서로 흘러 도네 구름길 있는 곳 알고자 하는가 그 구름길은 저 허공에 있느니라. 時人尋雲路 雲路杳無踪 山高多險峻 澗闊少玲瓏 碧장前兼後 白雲西復東 欲知雲路處 雲路在虛空 그에게 있어 白雲은 이와 같이 진리의 길을 말하기도 한다. 상징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있어 대단이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寒山詩에 나타나는 여러 상징적 의미 가운데 靑山과 白雲은 寒山의 가장 깊은 정신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寒山詩에 나타난 상징언어 가운데 주로 자연적 사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산, 바람, 물, 달, 나무, 꽃, 비, 봄 등 주로 자연의 사물을 통하여 심상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중에서 靑山과 白雲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에 하나이고 또한 가장 깊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시어에서 서로 잘 어울리는 것으로 산과 구름은 옛부터 많이 운위 되어 왔다. 그래서 소재끼리 어울리는 것을 보면 산=구름, 산=물, 물=구름, 꽃=봄의 공식성을 볼 수 있다. 산과 물은 자연소재 중 제일 많이 나타나는 소재로 자연 소재를 대표하고 있는데 산이 있는 곳에 물이 있고, 물이 흐르는 곳에 산이 있다는 점 에서 산수는 복합소재로 나타난다. 선승들이 주로 심산 고찰을 수도장으로 삼고 있는데서 산수의 자연소재를 禪詩에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양의 수행자의 심성 속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靑山과 白雲의 이미지이다. 다른 선사의 시에는 靑山과 白雲의 이미지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 보자. 太古 스님의 雲山이란 시를 보자. 흰구름 속 靑山은 첩첩이 솟고 靑山 그 속에 흰 구름 많아 날마다 구름 산과 벗을 하나니 몸이 편안하니 어딘들 집이 아니리. 대체로 白雲은 세가지 禪詩적인 심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즉 白雲이 원래 본체가 없는 것이란 점에서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의 본체가 공한 假有임을 나타내고, 白雲이 정처없이 유랑한다는 점에서 無爲無事한 가운데 逍遙自在하는 禪僧의 행적을 나타내며 白雲이 희고 깨끗한 본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무심무사의 청정한 선심의 심체를 나타내는 표상이 될 수 있다는 점등이다. 이러한 경지의 白雲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선의 관조를 저쳐 나온 자연물인 것이다. 寒山詩에 있어 白雲이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살펴보자. 19 붓을 들면 가로 세로 걸릴 것 없고 일 꾀하면 두루 통해 뛰어나더니 살아서 기껏 백년을 넘었던가 죽어서 또한 이름없는 귀신 되네 옛부터 이러한 일 으례였나니 그대여 그대는 지금 어찌 하려는가 오라 여기 이 구름 속으로 오라 내 그대에게 자지가를 가르쳐주리. 手筆太縱橫 身才極괴위 生爲有限身 死作無名鬼 自古如此多 君今爭奈何 可來白雲裡 敎리紫芝歌 이와 같이 그의 시에서는 세상의 무상함과 무의미함을 말하고 그를 극복하기 위하여 白雲 속으로 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白雲은 자연의 경계를 뛰어넘어 세속적인 삶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靑山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는 매우 일상을 벗어난 저 먼 참다운 가치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38 寒山에 깃들어 숨어 사는 곳 세상 사람 발자취 끊겨 좋아라 때로는 숲 속의 새들을 만나 서로 더불어 산 노래 부르네 아름다운 풀은 시냇가 연해 있고 늙은 소나무 골을 베고 누워 있네 이 일 없는 손은 볼만 하구나 바위 모퉁이에 비스듬이 누워 있네 寒山棲隱處 絶得難人過 時逢林內鳥 相共唱山歌 瑞草聯谿谷 老松枕嵯峨 可觀無事客 憩歇在巖阿 이와 같이 그에 있어 靑山은 돌아가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에게는 靑山과 白雲이 하나로 어우러져 세속을 벗어난 학과 같이 삶을 사는 존재이다. 241 산중의 즐거움을 스스로 원해 아무 의지도 없이 홀로 지나네 그 날 그 날 쇠약한 몸을 기르고 생각은 한가해 번거로움 없네 때로는 읽은 불경 뒤적여 보고 가끔 수각으로 올라 보나니 밑으로 천 길 벼랑 바라보노라면 위에는 비껴도는 구름이 있네 어느새 올랐던가 차거운 달빛 몸은 외로이 날으는 학과 같나니 自이山間樂 逍遙無倚託 逐日養殘軀 閑思無所作 時披古佛書 往往登石閣 下窺千尺崖 上有雲旁박 寒月冷수수 身似孤飛鶴 스스로 靑山을 찾아 홀로 도 닦으며 번거로움과 속박을 벗어난 생활을 靑山과 白雲에 비유하여 드러내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의 세계는 이미 세속을 벗어나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 이미 걸림 없이 하늘을 나는 학과 같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산은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이며 보배이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비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가장 귀한 세계에 들어가 있는 그에게 靑山과 白雲은 둘이 동시에 하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244 아 귀하여라 이름 있는 이 산이여 일곱 가지 보배인들 어이 여기 겨누랴 솔가지에 달은 걸려 차거운 빛에 구름 안개는 조각조각 일어나네 첩첩이 산은 쌓여 몇 겹이던가 산 굽이 돌 때마다 마을이 있네 산골 개울물은 맑고 고요해 시원하고 유쾌하기 끝이 없어라. 可貴一名山 七寶何能比 松月수수冷 雲霞片片起 암잡幾重山 廻還多少里 谿澗靜澄澄 快活無窮已 산과 구름이 어우러져 이미 하나를 이룬 세계에서 그는 시원하고 유쾌하게 세상의 삶을 훤출히 벗어나 있다. 그러면 靑山 白雲이 사원의 생활 속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원생활의 중심은 큰방이라고 하는 대중이 공동으로 모여 정진하고 공양하는 곳이다. 큰방의 가운데인 어간을 중심으로 하여 대중들이 좌차에 따라 자리를 정하여 앉는다. 자리를 나누는데 있어 어간을 중심하여 좌측는 靑山이라 하고 우측은 白雲이라 한다. 靑山은 체를 상징하고 白雲은 용을 상징하기도 하고 또 靑山은 부동의 모습이요. 白雲은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靑山과 白雲은 여러가지의 상징성을 갖고 생활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靑山과 白雲은 體와 用을 상징한다. 靑山은 如如不動이요 白雲은 自由自在로 흐른다. 그러기에 절에서 白雲은 禪修行을 하는 雲水衲子를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 靑山은 오랫동안 절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는 事判을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理判과 事判의 형태가 큰방의 靑山과 白雲을 자리하여 상징적으로 이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생활속에 깊이 뿌리 내린 體·用 사상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寒山의 시에서 靑山과 白雲이 한 세계속에서 잘 어우러져 높은 경지로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를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 寒山은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 자유의 경지이기에 만물의 體가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그런 경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82 寒山의 이 번뇌 없는 바위여 생사 나루 건너는 나룻배일세 여덟 바람 불어도 움쩍 않나니 만고에 모든 사람 그 묘를 전해 왔다. 고요하고 한가해 안거에 편안하고 비고 그윽해 남의 시비 떠났다. 차고 긴 밤이면 달 더욱 외롭고 때로는 둥근 달빛 한층 정답네. 寒山無漏巖 其巖甚濟要 八風吹不動 萬古人傳妙 寂寂好安居 空空離識초 孤月夜長明 圓月常來照 虎丘兼虎谿 不用相呼召 世間有王傳 莫把同周召 我自遯寒巖 快活長歌笑 이 시의 경지는 모든 세속의 번뇌 망상을 끊은 훤출히 벗어난 경지를 들어내고 있다. 그의 시는 젼통적인 운율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다고 기존의 文學史에서는 열외로 다루고 있으나 그의 시가 보여주는 구어적인 시문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다. 이처럼 백화문의 시의 전통은 선가의 語錄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음의 시는 짧게 쓴 3언시로 간결하면서도 산과 구름의 이미지를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는 시이다. 그의 산과 구름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308 내 산에 숨어 아무도 모른다. 흰구름 속에 언제나 적적하다. 我居山 勿人識 白雲中 常寂寂 산에 숨어 사는 은자의 삶을 살다 간 寒山이 스스로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내면에는 많은 고독과 외로움의 공간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한계를 다 극복 하고 그는 의연하게 산과 같이 서 있다. 언제나 흰구름처럼 자유인으로 적적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그에게 산은 언제나 돌아가 의지하여 머물 곳이며 흰구름은 삶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靑山은 體요 白雲은 用이 되어 體와 用이 서로 어울려 한 세계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體와 用이 하나 되어 이미 모든 생사를 여읜 경지를 간결하게 시로 드러내 寒山의 높은 경지를 말해주고 있다. 참으로 생사를 떠난 경지는 그러하고 그러할 뿐이지 달리 무슨 말로 설명할 것인가. 생사해탈을 위해 모든 수행과 정진을 하고 있으며 그는 이미 홀로 언제나 그러하게 생사를 벗어난 경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靑山과 白雲은 바로 體와 用의 세계속에 서로 일치되어 새로운 상징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의 세계는 무한한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인식하는가의 문제는 사유의 틀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려 있다. 靑山과 白雲이 體·用 의 상징적 세계를 의미하는 데서 새로운 세계관을 발견할 수 가 있다. 다음은 體·用 의 구조를 살펴보자. 3. 體·用의 構 造 寒山詩에 있어 靑山과 白雲이 어떻게 體와 用의 세계에 대하여 상징적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자. 체용은 본체와 작용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송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쓰여져 철학용어로 되었다.그런데 당 이전에는 중국문헌에 이런 체용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볼 수 없다. 중국에서 體用의 사유가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아마도 5,6세기 경부터 佛敎文獻에 의해서라고 보여진다. 體用의 개념은 순수한 중국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體用의 논리형식을 정비하고 체계화 시킨 것은 佛敎가 들어온 이후였던 것이다. 그래서 體用의 논리는 인도佛敎가 중국에 와서 독자적으로 이룩해낸 사유의 새로운 틀이며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논리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體用의 쓰임이 최초로 보이는 문헌은 梁 武帝(502-549년 재위)의 立神明成佛義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無明은 體의 위에서 생하고 멸한다고 하며 멸은 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佛敎문헌에서 體用이 처음 등장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僧肇(374-414)에 의해서이다. 僧肇는 인도의 大乘佛敎思想의 철학적 대성자인 龍樹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硏究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며 鳩摩羅什의 제자이다. 僧肇의 사상의 핵심은 般若 空의 사상에 바탕하고 있으며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體用相卽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體用의 사상은 본체론적인 생성 또는 변화의 관념을 주체적인 실천의 입장으로 끌어와 현상의 모든 것은 본래적인 무의 작용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涅槃無名論』에 나오는 物我同根 萬物一體와 같은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僧肇는『物不遷論』에서 動靜一如를 풀어 말하고 있으며 진리와 세속의 명제 또한 體用의 틀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 用寂 또한 用卽寂 寂卽用 用卽體一 이라고 하여 후일 體用論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僧肇는 중국사상의 고유한 개념과 논리를 갖고 佛敎의 중심사상인 般若思想을 통하여 體用의 논리를 이해 시킨 최초의 사람이다. 체.용사상의 근거는『起信論』에 잘 나타나 있다. 기신론의 구조는 一心 二門 三大라고 할 수 있다. 一心에서 二門으로 갈라지고 다시 三大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일심은 本來淸淨心이고 이 일심을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으로 나누고 眞如門은 다시 두 종류의 진여가 있으니 如實空과 如實不空이다. 이같은 진여문은 體라고 한다. 그리고 生滅門은 다시 染淨生滅과 染靜熏習으로 나누며 염정생멸은 다시 心生滅 生滅因緣 生滅相으로 나눈다. 생멸상은 三細 六芻의 相이 있어 相이 된다. 그리고 염정훈습은 用이 된다. 이같은 體用思想은 동양사상의 보편적 사상에 바탕하고 있으니 인간과 자연을 인식하는 사유의 틀로서 매우 광범위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一心에서 體 相 用의 三大가 나누어지고 이를 體用으로 줄여 말하고 있다. 일심에서 벌어져 이문으로 다시 三大로 내지 重重 無盡의 중생 차별상으로 갈라져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體用思想은 인도불교가 중국에 와서 이룩한 독자적인 논리며 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불교의 여러 종파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또한 『起信論』의 體·相·用이라는 三大의 조직으로 강력한 이론체계를 강화하게 된다. 기신론의 眞如의 세계가 華嚴에 와서는 현상세계의 근원에 있는 절대적 一者라고 생각하여 현상의 그것의 움직임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진여의 이해 위에서 중국 선종이 형성 되었던 것이다. 體用의 사상은 동양의 사유의 기본을 이루고 있으며 性과 相, 陰과 陽, 理와 事, 能과 所, 主와 客 등으로 대비되는 관계에서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더 본질적인 면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반야와 방편, 진제와 속제의 통일은 뒤에 삼론학의 완성자 吉藏(549-623)에 의하여 구체화 되고 體用思想이 더 구체적으로 이론화 되는 것이다. 佛敎의 문제중에 진제와 속제를 나누어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때 이러한 二諦의 문제는 서로 상반된 입장에 처할 때 대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는 바로 二元論이 안고 있는 문제이며 오늘날의 현대에서도 아직 문제가 되는 黑白의 논리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體用의 논리는 바로 이런 이원론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體用의 논리는 非二元論的 二元論이라 할 수 있다. 非二元論的 二元論이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세계관을 말한다. 이러한 논리는 卽非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선에서 活發發地의 大機大用의 사상도 이러한 體用思想에 기본하는 것이며 그 근저에 흐르는 정신도 다름아닌 體用의 사상에 뿌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靑山과 白雲이 상징하는 바 體·用 의 사상은 동양의 세계인식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인의 사유구조와 서양인의 사유방식은 살아온 문화풍토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이러한 다른 사유구조 속에서 패러다임도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 서구가 늘 이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면 동양은 반 이원론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대체로 그 흐름이 위와 같이 이원론적인 서구에 대하여 동양은 반 이원론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바로 동양은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고 논리를 펼쳐 왔는가를 우리는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적어도 동양 특히 佛敎에서는 이원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던 것이다. 동양의 體用의 논리에 바탕한 이 사유의 틀은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음의 시는 寒山의 體用思想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221 내 들으니 석가모니 부처님 일찍이 연등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다네 그러나 연등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다만 그 지혜의 앞뒤를 말한 것뿐 앞뒤의 근본은 다른 것 아니거니 다른 것 가운데 다름이 없느니라 한 부처는 곧 모든 부처라 마음이 바로 여래의 땅이니라. 常聞釋迦佛 先受燃燈記 燃燈與釋迦 祗論前後智 前後體非殊 異中無有異 一佛一切佛 心是如來地 寒山詩에 있어서 자연은 인간과 대립된 관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 이전의 본래 순수한 상대적으로 나뒤어지기 이전의 자연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體와 用이 둘이되 하나이며 하나이되 둘인 세계이다. 靑山은 그에게는 영원의 저 본질적 세계이며 동시에 그 세계는 白雲과 더불어 어울려 자연을 이루고 있다. 자연에서 靑山과 白雲이 서로 어울릴 때 참으로 진정한 자연의 본래 모습 스스로 잘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는 자연 속에서 마음의 안심입명을 얻고 세상의 헛것에 팔리지 않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의 시에서 靑山은 白雲과 서로 짝을 이루며 자연과 조화된 하나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2 층층 바위 틈이 내가 사는 곳 다만 새 드나들고 인적은 끊어졌다. 좁은 바위뜰 가에 무엇이 있나. 그윽히 돌을 안은 흰구름만 감돌 뿐 내 여기 깃든지 무릇 몇핸고 봄 겨울 바뀜을 여러번 보았네 그대 부자들에게 내 한말 부치노니 헛된 이름이란 진정 헛것 뿐이니라. 重岩我卜居 鳥道絶人跡 庭際何所有 白雲抱幽石 住玆凡幾年 履春易冬易 寄語鍾鼎家 虛名定無益 寒山은 산과 물을 의지하여 마음의 일탈된 경지를 아래와 같이 노래하고 있으니 그에게서는 靑山과 白雲은 자연의 청정한 나툼이며 동시에 한 세계를 들어내주는 진리 당체이기도 하고 體와 用의 다른 표출이기도 한 것이다. 본래 體와 用은 둘이 아니다. 본질의 세계를 현상적으로 나타내 설명하려는 입장에서 생각하다보니 體와 用으로 나누어 말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여 不變과 隨緣으로 설명하는 것은 본질과 현상을 하나로서 보되 동시에 변화하는 현상에 대하여도 분명히 수용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마음을 主로 삼고 육체를 從으로 삼는 것으로 파악할 수 도 있다. 자연현상에 있어서도 변화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변화하지 않는 영원의 모습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시의 계절이 변하여가지만 영원한 시간의 영속성에서 보면 변화의 속에는 변함 없이 흐르는 불변의 사계절의 모습이 내재하고 있다. 마치 손톱이 계속 자라면서 변화를 하고 있지만 그 손톱의 형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은 만물의 모든 면이 다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의 가장 완벽한 논리를 八不中道에서 볼 수 있다. 멸함도 엾으며 생함도 없으며, 단절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며, 일의도 아니고 다의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가지도 않는 희론이 적멸하여 길상한 연기를 설하신 정각의 불타께 설법자중에서 최승의 분으로서 나는 예경합니다. 본래의 세계는 생함도 없으며 멸함도 없고 그래서 영원한 본래의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궁극적인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그러기에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 것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참으로 나타낼 수 없는 진리를 부정의 논리로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八不中道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中道에 입각한 體用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면 선종에서는 體.用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선종의 입장에서 體用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南宗禪의 宗祖인 慧能의 단경에는 體用의 사상을 활달하게 드러내고 있다.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 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善知識 定惠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體 光是燈 之用 卽有二 體無兩般 此定惠法 亦復如是 이처럼 定·慧는 불교사상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바 이 둘은 또한 동시에 둘이면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체와 용이 둘이면서 하나이듯이 같은 구조로 볼 수 있다. 체용에 대한 단경의 다음과 같은 말도 둘이 아닌 세계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진여는 생각의 체요 생각은 진여의 용이다.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 보고 듣 고 알지만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 정과 혜는 등과 빛과 같으니 등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빛이 없다. 그래서 등은 빛의 체요 빛은 등의 용이라고 하고 있다. 眞如是念之體 是念眞如之用 性起念 雖卽見聞覺知 不染萬境而常自在 定慧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등과 빛을 예로 들어 體와 用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진여와 생각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禪家에서도 마찬가지로 體.用을 不異로 보고 있다. 이러한 선가의 不二思想을 요약해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普照의『眞心直說』이다. 용은 체를 떠나지 않고 체는 용을 여의지 않아 다르지 않다. 물의 습한 성질이 체가 되어 움직이지 않으며 파도는 상이 되어 바람따라 일어나니 물은 성이 되고 파도는 상이 되어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음이 하나가 아 니다. 그러나 파도외에 물이 없고 물 밖에 파도가 없으니 젖는 성질은 하나이기에 다르지 않다. 체 용의 하나이되 다른 것을 이로 미루어 짐작 하여 알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體와 用은 서로 하나이면서 동시에 다른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현상과 본질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그 틀은 같다고 볼 수 없다. 물리현상에서도 빛의 현상이 파동과 입자의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에 대비시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시는 용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44 대개 물건은 쓸 곳이 있고 그것을 씀에는 마땅함이 있나니 그 쓸 곳을 잃으면 하나는 놀고 하나는 모자란다 둥근 구멍에 모난 말뚝 박는 것 아아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어라 준마가 쥐를 잡으려 해도 그것은 고양이에 미치지 못하니라. 夫物有所用 用之各有宜 用之若失所 一闕復一虧 圓鑿而方柄 悲哉空爾爲 華留將捕鼠 不及跛猫兒 모든 물건은 용이 적절한 것이 있어서 그에 맞게 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쥐를 잡는데는 천리를 달리는 준마보다 고양이가 훨씬 유용한 것이다. 이처럼 체는 하나지만 용은 모든 존재마다 달리하여 나타남을 드러내고 있다. 體用의 사상은 서양의 이분법적인 사유와는 달리 동양의 보편적 사상으로 사유의 독특한 틀을 보여주고 있다. 寒山이 바라보는 인간의 삶과 죽음은 어떤가? 그의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는 시가 있다. 97 나고 죽음 관계를 알고자 하면 물과 얼음 비유로 설명하리라. 물이 얼면 곧 얼음 이루고 얼음 녹으면 도리어 물이 된다. 이미 죽었으면 반드시 날 것이요. 이미 났으면 반드시 죽으리니. 물과 얼음 서로 해치지 않는 것처럼 남과 죽음 모두 다 아름다워라. 欲識生死譬 且將氷水比 水結卽成氷 氷消返成水 已死必應生 出生還復死 氷水不相傷 生死還雙美 생사윤회 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인간관과 인생에 대한 달관의 경지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佛敎에서 體와 用을 얘기 할 때 물과 얼음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물과 얼음 혹은 파도에 비유하여 體와 用을 말 하는 것은 매우 뛰어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물을 떠나 파도가 달리 없고 파도를 떠나 물이 달리 없는 것이다. 물이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물이다. 이것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體와 用의 세계는 서로 한 세계를 떠 받치는 두 받침과 같다. 생과 사는 본래 하나인 것이다. 생사가 둘이 아니듯 體·用도 둘이 아닌 것이다. 體用의 사상은 寒山의 시 속에 담겨 있는 靑山과 白雲으로 상징되는 세계 속에 나타내지고 있으며 이는 非二元論的 二元論으로서 서구의 합리주의적 이원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 任 運 思 想 寒山詩의 禪思想의 가장 높은 자유자재한 경지는 任運思想으로 나타나고 있다. 任運이란 산스크리트로는 sva-rasena, aatnena 로서 인위를 버리고 하늘에 맏긴다는 의미이며 어떤 이는 사람의 차원을 초월한 이법 일체를 말하기도 한다. 郭象의 莊子注에는 任天, 任理, 任自然 등의 말이 보인다. 이는 老莊의 무위자연사상에 뿌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전에는 sva-rasena(자신의 성향에 따라, 자연히), ayatnena(노력을 요구하지 않고, 자연히) 의 역어에 해당된다. 에컨대 번뇌와 지혜가 자연히 계속 일어나는 것을 任運相續이라고 말한다. 또한 일반에 일이 이법에 따라서 자연히 어떤 것은 자재하게 존재하고 생기하며 성취하는 것을 任運自爾, 任運自發, 任運自省이라고 말한다. 더욱 선문에서는 한어 본래의 의미를 따라서 특히 선정해탈의 경지에 있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일체를 되는대로 맏겨 방척하고 그 위에 자유자재하게 하는 것을 任運自在라고 말한다. 뜨거울 때는 맑고 시원한 솔바람 그림자를 짓고 추울 때는 任運으로 따뜻한 기운을 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任運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풀기도 하다.“任”이란 쉽게는“맡긴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러한 일차적 의미는 끝내 소실되지 않는다. 허나“맡긴다”에서“맡기어진 모습”“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모습”의 의미가 나오게 되며, 또 이러한 의미로부터“책임”이나“기능”의 의미가 파생한다. 그리고 또“하늘이 맡긴다”는 의미에서 한 존재가 그 존재로서 구유하는 덕성, 경향성의 의미가 파생한다.“A任B”라는 구문에서 동사로서의“任”은“A가 B에게 맡긴다”“A가 B에게 B의 덕성을 준다”는 의미가 되어 실상“A가 B라는 작품을 탄생시킨다”“A가 B를 창조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任運”은“運에 맡긴다(任)”는 의미로 볼수 있다. 여기서의 運은 자유 자재로 걸림없는 경지를 말한다. 다음은 寒山의 높은 경지를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로 옛부터 많이 회자되어 온 시중에 하나이다. 이 시에서 일체에 얽매임 없는 任運思想의 경지를 읊고 있다. 290 한번 寒山에 들자 만사를 쉬었나니 다시 마음에 이는 잡생각 없네 한가히 돌집 벽에 싯줄이나 끼적이며 제대로 맡겨 두어 뜬 배 같구나. 一住寒山萬事休 更無雜念卦心頭 閑於石室題詩句 任運還同不繫舟 그에게 있어 寒山은 이미 모든 만사를 다 쉬어버린 경지이다. 그래서 다시는 마음에 잡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를 시로 적어 한가롭게 즐기면서 간혹 돌벽에 적기도 하는 마음의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일체가 다 쉬어서 무위함속에 그대로 여여한 것을 즐기고 있다. 바로 이러한 자유자재한 경지를 배를 매어두지 않고 그대로 풀어놓아 스스로 임의대로 흐르게 하는 경지에 비유하여 任運이라고 읊고 있다. 이러한 경지를 任運騰騰하고 騰騰任運 하며 任運自在하다고 한다. 모든 것은 자연의 법도에 맏겨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 경지야말로 한산의 任運思想이 나타내는 최고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다음 시에서도 이런 한산의 임운자재한 자유의 경지를 잘 엿볼 수 있다. 160 내 한산에 산 지 일찍 몇만 년을 지내었던고 세월에 맡겨 임천에 숨고 한가한 대로 자재를 관하네 쓸쓸한 한암에 사람의 자취 없고 흰구름만 항시 느릿거리네 부드런 풀로 깔개 삼나니 푸른 하늘은 덮개 되어라 시원스러이 돌베개 베고 누워 천지의 돌아감에 맡겨 두노라. 월自居寒山 曾經幾萬載 任運遯林泉 樓遲觀自在 寒巖人不倒 白雲常애체 細草作臥褥 靑天爲被蓋 快活枕石頭 天地任變改 한가로이 자연 그대로 맡겨두고 살아가는 한산의 경계는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름 끼면 낀대로 바람 불면 부는대로 세상에 맡겨 자재를 관하고 있으니 세월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모르는 것이다. 다음 시 또한 이러한 자유 자재한 경지를 나타내고 있는 시아다. 337 우습구나 이 늙은이 근력이 다해 숲속을 그려 혼자 놀기 사랑하네 한심스러워라, 옛부터 오늘까지 제대로 맏겨 뜬 배처럼 지났구나. 自笑老夫筋力敗 偏戀松巖愛獨遊 可歎往年至今日 任運還同不繫舟 여기서도 任運의 어귀를 쓰고 있다. 그러나 약간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결국 任運의 본 뜻은 충실히 함축하고 있다. 50 내 마음은 가을달 온 세상 차별 없이 모두 비추네 삼라만상 제 그림자 절로 나타나 눈 부신 광명이 절로 드러나네. 吾心似秋月 任運照無方 萬相影現中 交光獨露成 寒山은 위의 시에서도 역시 任運이라는 어귀를 쓰고 있다. 永明延壽도 그의『山居詩集』에서 < 任運騰騰無所依 閒游長坐性怡怡 > 라고 읊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任運思想은 선가의 중요한 깨달음에 이른 무애자재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石屋淸供의 任運思想을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석옥은 고려의 太古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 또한 山居詩를 남기고 있다. 自覺從前世念輕 老來任運樂閒情 芒鞋竹杖春三月 紙帳梅花夢五更 任運思想은 寒山의 자유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寒山의 절대적 자유자재의 세계는 이처럼 任運思想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역시 寒山의 任運 사상을 잘 드러내는 시이다. 271 寒山에는 다만 흰구름뿐인가 고요하고 그윽해 티끌을 버렸네 풀 자리는 이 산 집의 살림 외로운 등불은 밝은 달이 대신하네 돌 평상은 푸른 늪에 다달았고 호랑이 사슴은 언젠나 벗이 되네 그윽히 살기를 스스로 즐겨 해 길이 형상 세계의 바깥 사람 되나니. 寒山唯白雲 寂寂絶埃塵 草坐山家有 孤燈明月輪 石牀臨碧沼 虎鹿每爲隣 自羨幽居樂 長爲象外人 그윽히 살기를 스스로 즐겨 해 길이 형상 세계의 바깥 사람 되나니(自羨幽居樂 長爲象外人) 라고 읊고 있는 寒山의 경지는 무애자재한 任運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 역시 자연 속에서 흰구름과 숲을 의지해 산속의 짐승들과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경지를 그는‘형상 세계의 바깥’이라고 말하고 있다. 습득에 있어서도 임운 사상은 마찬가지로 잘 나타나 있다. 습득의 시를 통하여 임운 사상을 보자. 330 내 권하노니 집 떠난 이여 모름지기 교법의 깊음을 알라 번노를 떠나기에 마음을 오로지 해 부디 탐욕과 애정에 물들지 말라 저 세속에도 큰 선비 있어 그릇됨을 알아 금을 받지 않았나니 그러므로 알라 군자의 뜻을 잘되고 못되는 것 이치에 맡기나니. 我勸出家輩 須知敎法深 專心求出離 輒莫染貪淫 大有俗中士 知非不受金 故知君子志 任運聽浮沈 任運思想은 寒山의 높은 정신 세계를 잘 나타내고 禪思想과 詩를 조화롭게 일치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寒山詩에서 任運이라는 어귀가 많이 쓰이고 있지는 않으나 任運思想은 寒山詩의 근본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禪思想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진정한 解脫의 세계를 한산은 任運의 境地로 自由自在하게 살아갔던 것이다. 5. 自 然 觀 자연관이란 인간이 자연을 보고 대하는 견해와 방법, 그 관점을 말한다. 寒山이 바라보는 자연관은 어떤 것인가?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형태로든지의 자연에 대한 인식을 갖고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寒山 역시 나름대로의 자연관을 갖고 있다고 본다. 특히 그는 天台山에 은거하여 살면서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이해 하였는지 그의 시를 통햐여 살펴보자. 물론 그의 자연관 역시 佛敎的 자연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은 사실이다. 佛敎의 자연관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세계인식에 있어서 佛敎는 그 바탕을 緣起的 認識論에 입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계와 자아,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佛敎는 어디까지나 연기적 입장에서 본체와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無情物의 器世間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衆生世間 깨달음의 세계인 智正覺世間으로 나누어 말한다. 본체계와 현상계의 생성원인과 그 존재 및 변화 양상, 그리고 이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그 당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관념은 달라진다. 일체의 만유제법은 오로지 인연생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며 항상됨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체는 無我이며 無相이며 無一이며 無主宰이다. 따라서 이를 공이라 한다. 공은 없다 아니다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有와 無, 실체와 실재, 원리와 현상의 양극을 포괄통합한 일원적 이치를 말한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본다면 본체가 곧 현상이요, 현상이 곧 본체이기에 본체와 현상은 상즉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자연이라 하 는 것도 본체와 현상의 구별되지 않는다. 진심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본체이다. 여기에서 중중무진의 연기가 전개되어 나간다. 여기서는 主客이 있을 수 없고 現像과 本體가 따로 없다. 眞俗一如 物我一體의 경지이다. 佛敎의 자연관은 이러한 토대위에서 성립된다. 삼라만상은 眞如一心의 나타남이기에 객관적 대상이 아닌 나와 동일체다. 자연은 바로 나의 전체요, 나는 또한 자연 그 자체이다. 나는 자연과 대립되지 않으며 일체가 되어 서로 순화된 경지로 승화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자연은 그대로 本地風光이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는 成, 住, 壞, 空의 커다란 순환의 연기법에 의해 생성되고 변화되고 소멸되며 마침내 허공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반복하여 존재의 순환을 계속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적 순환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관의 가장 완벽한 논리는 4제 8정도 12연기론이라고 할 수 있다. 禪詩는 단순한 관념시나 철학시의 단계를 넘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禪詩一如의 경지에서 서정적인 자연시를 산출하기도 한다. 禪詩에 나타난 자연관은 여기서 간취된다. 寒山이 보여주는 자연관의 경지는 바로 이러한 경지임을 알 수 있다. 247 홀로 너럭바위 위에 올라 앉으면 개울물 소리 차거이 그윽해라 고요히 둘러보면 못내 아름다운데 바위 골짜에는 실구름 헤매이네 호젓이 앉아 그윽히 즐기나니 나무 그림자 해 따라 낮아졌네 내 고요히 내 마음 관하나니 연꽃 한 송이 진흙 속에 피어나네. 盤陀石上坐 谿磵冷凄凄 靜玩偏嘉麗 虛巖蒙霧迷 怡然憩歇處 日斜樹影低 我自觀心地 蓮華出어泥 寒山은 한평생 산에 살면서 산과 더불어 도를 닦았다. 그의 마음에는 이미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세계는 바로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동양의 자연관은 서양과는 달리 순환적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이 직선적인 시간관에 의한 일회적 자연관이라면 동양은 반복되는 시간과 같이 순환적 자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의 순환적 자연관을 잘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97 나고 죽음 관계를 알고자 하면 물과 얼음 비유로 설명하리라 물이 얼면 곧 얼음 이루고 얼음 녹으면 도리어 물이 된다 이미 죽었으면 반드시 날 것이요 이미 났으면 반드시 죽으리니 물과 얼음 서로 해치지 않는 것처럼 남과 죽음 모두 다 아름다워라. 欲識生死譬 且將氷水比 水結卽成氷 氷消返成水 已死必應生 出生還復死 氷水不相傷 生死還雙美 寒山의 자연관 역시 자연에 대하여 순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이미 생사도 둘이 아닌 것이다. 志南의 서문에 이러한 자연관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말이 있으니 豊干의 마지막 당부라고 전해지는“때를 따르라(隨時)”는 말은 역시 寒山詩에서 나타내는 자연관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寒山의 자연관이 동양의 佛敎的 자연관을 얼마나 잘 나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寒山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자연과 내가 일여한 속에서 합일 된 삶을 사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킨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의 자취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연관이 잘 나타나 있는 시는 그의 시중에 매우 잘 다듬어진 시로 보여진다. 한산의 자연을 바라보는 입장을 알 수 있는 다음 시를 보자. 78 더함이란 그 정을 더하는 것이니 그래서야 더함이 있다 할 수 있고 바꿈이란 그 형을 바꾸는 것이니 그래서야 그 바꿈이 있다 할 수 있나니 능히 더하고 또 능히 바꾸면 신선의 장부에 실릴 수 있지만 더함도 없고 또 바꿈도 없으면 마침내 죽음의 화를 면치 못하리. 益者益其精 可名爲有益 易者易其形 是名爲有易 能益復能易 當得上仙籍 無益復無易 終不免死厄 자연은 고정 불변의 무엇이 아니라 늘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며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자연은 살아있게 된다. 고인 물이 썩듯이 자연도 흐름을 중단하면 죽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동양적 자연관이며 한산시의 세계도 이와 같은 동양적 자연관에 충실히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佛敎의 第一義諦는 中道이다. 중도야말로 붓다의 영원한 가르침의 출발이며 동시에 귀결점이다. 동양의 사유와 자연관에 있어서도 결국은 이러한 중도적 사유에 입각하여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동양적 태도와 서양적 태도는 사뭇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어디까지나 동양은 조화와 화합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은 대립적인 태도가 강하게 보인다. 이러한 서양의 대립적 태도는 결국 자연과 인간간에 대립을 낳고 마침내 인간에 의해 정복되어야 할 자연으로 전락되어버리고 말았다. 동양의 특히 佛敎的 자연관은 體와 用의 논리처럼 非二元論的 二元論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비이원론적 이원론이란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不二의 논리이며 卽非의 논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生死가 不二요 有無가 不二요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自性을 철저히 깨달은 경지에서는 인간은 곧 자연과 하나인 것이다. 이 점에서 寒山의 자연관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자연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체용의 구조를 통하여 이해 할 때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서구의 어떤 사유 모델보다도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주기에 적절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는 인간의 생명의 활발발한 살아있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낸다는 것은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대립을 뛰어넘어 인간과 자연이 하나를 이루는 세계, 이런 통합성의 논리는 體用의 논리이며 中道의 논리로서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佛敎的 자연관의 입장에서 불법의 현현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본질의 파악, 일체의 자연현상을 나의 전개로 보는 物我一如의 관념, 그리고 그러한 자연에서의 초탈하고 무애한 자재로운 생활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禪詩에 나타나는 일체의 자연물은 나와 함께 동일시 되어 절대평등의 화합 속에 同體大悲로 한 몸이 되어 나타난다. 서양의 대립적 자연관과는 달리 동양의 자연관은 대립을 뛰어 넘어 천지가 둘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자연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를 혼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음의 한산시는 이러한 동양의 자연관과 그 정신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시이다. 70 상쾌했어라 혼돈의 이 몸이여 마시지도 않고 오줌도 안 누었네 그 누가 있어 파고 뚫고 하여 여기에 이미 아홉 구멍 생겼나니 날마다 날마다 먹고 입기 걱정하고 해마다 해마다 세금 내기 걱정하네 천사람이 한 푼을 서로 다투어 머리를 모아 달아나며 부르짖네 快哉混沌身 不飮復不尿 遭得誰鑽鑿 因玆立九窺 朝朝爲衣食 歲歲愁租調 千箇爭一錢 聚頭亡命叫 混沌은 장자에서 유래하는 동양사상의 독특한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우화이다. 어느때 남해의 왕인 숙과 북해의 왕인 홀이 중앙의 임금 혼돈에게 가서 매우 환대를 받아서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둘이 상의하여 혼돈이 눈,귀,코,입등의 기관이 없음을 보고 보답하기 위해 구멍을 뚫어 여러 기관을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혼돈은 일주일이 못되어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우화가 의미하는 것은 자연과 생명은 논리와 형식으로 분석하고 재단할 때 생명은 이미 죽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본다. 바로 동양적 자연은 유기체적 자연관이라 할 수 있으며 한산의 자연관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불교의 자연관은 서양의 경우처럼 자연은 신이나 절대자의 의지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고, 투쟁이나 정복의 대상은 더욱 아니다. 자연은 인연의 화합체로서 그것은 스스로 생성된 것이며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항상되는 것도 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禪詩에 있어서의 자연관은 결국 唯心的인 空思想에 귀일된다. 모든 것은 오로지 일심으로 귀일되며 모든 것은 또한 일심의 나타남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眞如一心의 妙用으로서의 다양한 자연현상을 禪詩는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禪詩는 이러한 佛敎的 자연관을 자연관조를 통하여 시적으로 승화시켜 禪味와 자연미를 높은 차원으로 통일하여 禪詩一如의 경지를 이룩하고 있는 점에 그 묘오의 특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寒山의 자연관 역시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충실히 인식하고 절대 불이의 경지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있는 점에서 寒山의 자연관은 중도적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다음 시도 寒山의 자연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17 사시는 쉬지 앉아 해는 갔다 해는 오고 만물은 바뀌어도 하늘은 변치 않네 동이 밝고 서 어둡고 꽃은 졌다 피건마는 황천으로 간 사람은 아득하게 멀리 가고 돌아올 줄 모르네. 四時無止息 年去又年來 萬物有代謝 九天無朽최 東明又西暗 花落又花開 唯有黃泉客 冥冥去不廻 위 시에서 보여주듯이 寒山은 圓形的 自然觀을 갖고 있다. 이 시는 이러한 寒山의 원형적 자연관을 잘 나타내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윤회하는 생명도 모두 이런 원형사관과 자연관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여진다. 자연은 순환하는 것이기에 인간 또한 그러한 이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순환적 자연관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어울려 하나의 독특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으니 다음시는 그런 한산의 면모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109 돌고 도는 변화는 끝이 없어라 나고 죽음 마침내 쉬지 않나니 삼도에서는 이미 새들로도 태어났고 오악에서는 이미 고기들의 몸도 됐네 세상이 흐릴 때는 호양도 됐고 세월이 좋을 때는 준마도 됐네 이전에는 일찍이 부자였더니 이번에는 이 구차한 선비 되었네. 變化計無窮 生死竟不止 三途鳥雀身 五嶽龍魚己 世濁作묘누 時淸爲록이 前廻是富兒 今度成貧士 위 시는 이러한 윤회사상과 동양의 순환적 자연관이 잘 결합되어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마침내 한산은 다음과 같은 자연의 경지에 이르르게 된다.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즐기는 이상적 경지라 할 수 있다. 202 흰구름 자재로이 한가롭거니 어찌 구태여 돈으로 산을 살거냐 위태한 길 내릴 때는 지팡이 짚고 험한 길 오를 때는 등나무 더위잡고 새내 언덕에는 솔이 항상 푸르러라 개울가에는 돌이 절로 아롱졌네 길이 멀어 벗은 비록 끊엊졌으나 봄이 되면 새들은 즐거이 우네. 自在白雲閑 從來非買山 下危須策杖 上險捉藤攀 澗底松常翠 谿邊石自斑 友朋雖阻絶 春至鳥관관 한산의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은 이미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구태여 돈으로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때가 되면 자연은 질서 있고 아름답게 장식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은 즐겁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한산의 자연과 인간이 하나를 이룬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寒山詩의 禪思想을 살펴보았다. 寒山의 詩世界가 禪思想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음은 그가 詩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드러냈던 靑山 白雲이 동양사상의 가장 깊은 정신을 담고 있는 體 用 사상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울 위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체 용사상이 다시 주목되어야 하는 점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寒山의 禪思想의 독특한 성격은 그의 任運思想에서 잘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한 寒山의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이 대립을 극복하는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Ⅵ. 寒山詩의 特徵 寒山詩의 특징은 무엇인가. 우선 寒山詩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전체가 제목이 없다는 것이다. 寒山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제목이 없는 시가 있기는 했으나 모든 시를 다 제목 없이 쓴 예는 없다. 이 점이 寒山詩의 큰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無題詩의 성격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각의 시가 모두 다 주제와 특징을 달리하여 나타나고 있다. 寒山詩에서 드러나는 선적 경향의 시는 아마도 拾得과 豊干 계열의 시였지 않았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寒山은 시인으로서 은거 수도자로서 양면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寒山詩에는 直觀的 형식을 통하여 이루고 있는 그의 언어관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삶을 사는 그의 수도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이 장에서는 寒山詩를 통하여 알 수 있는 특징과 선과 시에 대한 새로운 면을 살펴 보고자 한다. 그의 시세계의 특징으로 格外의 문제를 가장 먼저 들 수 있을 것이다. 格外란 일상성을 벗어난 탈속한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格外는 선의 출중한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려는 寒山의 자유정신은 시에서도 매우 파격적인 시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半詩라고 이름하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는 半格詩라고도 하며 매우 독특한 성격의 시이다. 다음은 寒山의 언어적 측면에 대하여 알아보자. 언어의 문제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선가에서 이해하는 언어의 비본질성에 관한 태도와 일반적인 文學에서의 일상성에 입각 한 언어적 태도와 비교하여 살펴보자. 또 기존의 언어의 허상을 깨고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언어분석학적 태도의 입장도 살펴보고 일상언어로 돌아가야 한다는 태도와 선의 언어를 대하는 태도의 유사성에 대하여 비교하여 보자. 선의 진리 인식의 태도는 매우 直觀的이라 할 수 있다. 선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直觀의 미학을 통하여 寒山詩의 특징을 알아보자. 마지막으로 선과 시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格 外 寒山詩는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禪詩라고 할 수 있으며, 寒山의 사상에서 제일 깊은 세계를 점유하고 있는 것은 禪이라고 할 수 있다. 寒山의 시세계 속에는 禪詩야말로 寒山의 眞面目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러한 선시의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으로 格外를 꼽을 수 있다. 格外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선가에서 선사들이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格은 일정한 틀이나 격식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틀을 벗어나 있는 것을 格外라고 하며 혹은 劫外라고도 한다. 가령 어느 것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라고 묻는 말에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한 것이라던가 혹은 어느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물음에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대답이 모두 格外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모든 公案이 이러한 格外로 학자를 갈등에 빠뜨려 공부를 시키고 있 는 것이다. 出格이라는 말도 쓰이고 있으니 永明延壽의『山居詩集』에 보면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온다. 拂石閒題出格詩 출격이라는 말은 선가에서 애용하는 말중에 하나이다. 흔히 발심하여 한소식 얻은 사람을 出格大丈夫라고 부른다. 三界를 훤출히 벗어나 자유자재로 무애한 삶을 누리는 이들을 말한다. 또한 離四句 絶百非라고도 하며 8不中道로 나타내기도 하고, 慧能은 36對法을 설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부정의 논리로 긍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독특한 선의 진리 접근방법이다. 그래서 선에서 말하려면 언제나 역설적으로 문자를 쓰게 된다고 스즈끼는 말한다. 格外와 역설은 언어의 파라독스로서 역설이 바로 格外로 나타난다. 또한 이런 경우에 반어적 논리는 무한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사물도 고정불변의 자성을 갖지 않는다고 보는 佛敎思想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의 格外의 모습이 시에 와서 언어의 사용함에는 모순어법으로 나타난다. A=A 인 반논리의 등식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선학대사전에는 格外를‘규격에 구속되지 않는 위대한 역량을 말하며 또 격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人天眼目』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온다. 臨濟宗者 大機大用 脫羅籠出과臼 虎驟龍奔 星馳電激 轉天關翰地 軸負衝 天意氣 用格外提持 臨濟는 大機大用을 써서 三界의 구속을 벗어났으니 이를 格外라고 하며, 여기서도 格外를 구속을 벗어난 것으로 말하고 있다. 格物致知는 유교에 있어서『大學』의 대명제이다. 유가에서 格物의 명제는 인격수양의 최후의 단계에 속한다. 여기서의 格의 의미는 꼭 들어맞는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물건에는 物格이 있고 사람에는 人格이 있고 모든 존재가 다 格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그 格을 벗어 날 때 破格이 된다. 때로는 格을 초월한 超格이 되기도 하고 이를 모두 格外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격을 벗어난 세계라서 出格大丈夫의 세계라고 한다. 그래서 劫外歌를 부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한 수행자를 세속적 입장에서 方外之士라고도 부른다. 아무튼 格外는 바로 이런 활달한 자유자재의 세계이다. 전통적인 文學에서도 格을 말할 때 풍격으로 설명하는데 원래 사람의 풍채나 품격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며 개인의 외형적인 모습에서 느껴지는 전체로서의 인상 내지 개성을 말하는 것이다. 문장에 있어서 風格이란 文學 예술 작품이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특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風格이라는 말 이외에도 體, 格, 品, 風貌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文心雕龍』에서는 體性에 대하여 작가의 개성과 기질의 선천적인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아울러 학문과 습성의 후천적인 요소를 중시하여 이 네 가지 요인이 문장 풍격을 결정짓는다고 보았다. 王昌齡도『詩格』에서 시에는 高格, 古雅, 閑逸, 幽深, 神仙 등 다섯종류의 취향이 있다고 하며, 또 皎然은『詩式』에서 열아홉 글자로서 문장의 특징을 구분하여 高 逸 貞…力 靜 遠 등 열하홉 가지 풍격에 대해 그 특징을 언급하고 있다. 司空圖(837~908) 역시『詩品』에서 風格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열두구의 사언시 형식으로 시의 스물 네 자의 풍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공도의 풍격 분류가 나온 뒤에 문장가들은 그 풍격상의 특징에 걸맞는 작가나 작품을 대비시켜보려는 시도를 하였고, 각 풍격에 들어맞는 시구를 취하여 다시 그 풍격을 설명하고 있다. 이같이 격의 다양한 설명에 따라 그 의미의 폭이 매우 넓다. 선가에서 쓰는 격외는 이러한 격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한산시에 있어서 이같은 格外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한산은 세간의 어떤 형식적인 틀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시를 썼던 것이다. 267 여기 한 왕가의 수재 있어 격에 맞지 않다고 내 시를 비웃나니 가로되 벌의 허리도 알지 못하고 또 학의 무릎도 알지 못하며 높고 낮은 요도 알지 못해서 그 말이 모두 분명하지 못하다고 그러나 나는 너의 시를 비웃나니 장님이 해를 노래하는 것 같네 有箇王秀才 笑我詩多失 云不識蜂腰 仍不會鶴膝 平側不解厭 凡言取次出 我笑爾作詩 如盲徒詠日 한산이 일정한 형식적 틀을 벗어나 시를 쓰는 것에 대하여 비판을 하자 오히려 한산은 진정한 정신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시에는 복잡한 구성법이 있는데 이중에 平仄法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한산은 이러한 平仄도 무시하고 韻도 무시하여 格外로 활달하며 자유롭게 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그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형식을 잘 꾸며도 장님처럼 해를 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寒山詩에 있어 그 형식상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半格詩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半格詩도 格外정신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半格詩의 전통은 특수한 상황을 갖고 있다. 半格詩란 한시의 정형률에 완전히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시를 지으며 어느 정도만 형식적 틀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半格詩는 시의 특수한 형식으로 寒山詩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半格詩는 古體인 古詩와 樂府를 종합하고 있으며 생동감이 넘치고 활발발하며 음악성이 넘치는 시다. 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半格詩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唐人의 발음을 硏究한『聲調譜』1권 속에는 半格詩가 있다. 즉 전 6구는 古體이고 후 6구는 제양체로 歌가 반을 이루기에 半格이라고 한다. 半格詩는 특수한 풍격을 갖고 있으며 寒山子 이후 별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처럼 寒山의 시세계는 매우 독보적인 것이다. 이같이 寒山의 半格詩는 높이 평가 할만 하다. 半格詩의 시발은 王梵志를 거쳐서 寒山에 이르러 완전하게 구현되고 있으니 寒山의 생활경험은 王梵志보다 풍부하여 시형식 또한 더 넓다. 半格詩는 寒山에 이르러 이루어진 독특한 시형식으로 寒山詩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다음 시는 半格詩로서 寒山詩의 독특한 형식과 품격을 잘 말해준다. 9 사람이 있어 寒山길을 묻는구나 그러나 寒山에는 길이 통하지 않네 한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고 해는 떠올라도 안개만 자욱하네 나같으면 어떻게고 갈 수 있지만 내 마음 그대 마음 같지가 않네 만일 그대 마음이 내 마음과 같다면 어느덧 그 산속에 이르르리. 人問寒山道 寒山路不通 夏天氷未釋 日出露朦朧 似我他由屆 與君心不同 君心若似我 還得到其中 시의 형식이 기존의 형식과는 다른 이야기식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는 寒山의 독특한 가풍이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담겨있는 시의 내용도 이야기 식으로 산문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寒山詩에 있어 半格詩는 무척 많이 있다. 半格詩는 오늘날 자유시가 정형적 틀을 완전히 거부하고 자유롭게 시를 써나가듯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때로는 파격이 대중들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이다. 다음 시는 寒山詩가 당시에 얼마나 이해되지 못하였는지를 잘 나타내주는 시라고 보여진다. 137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내 시를 읽고 알지도 못하고 비웃고 비방하리 중간 선비는 내 시를 읽고 왈칵 반기며 온 얼굴에 웃음 지으리 양수는 어린 여자를 보자 이내 묘할 묘 자를 알았느니라. 下愚讀我詩 不解각嗤초 中庸讀我詩 思量云甚要 上賢讀我詩 把著滿面笑 揚脩見幼婦 一藍便知妙 위와 같이 시에서 寒山은 자신의 시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를 말하고 있다. 그의 삶의 길이 얼마나 고난과 역경의 길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寒山이 독특하게 창작한 半格詩는 전통적 형식을 부정하고 또 종합하며 인습을 뛰어넘어 고정된 틀을 벗어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는 매우 넓고 깊은 신천지이다. 그리고 시대조류에 따르지 않는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매우 고독한 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四海無人의 고독한 심경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의 생명력은 무한하고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 있는 것이다. 라고 평가 받을만 하다. 寒山은 기존의 인습적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이 점에서 寒山의 시세계는 佛敎文學的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또 하나 寒山詩의 형식상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3言詩을 들 수 있다. 寒山詩集의 뒷부분은 3言詩가 여러 수 들어 있는데 직절하면서도 단순하게 한산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3言詩 또한 寒山이 매우 비전통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다음에 3언시를 살펴보자. 309 한산이 깊어 내 마음에 맞다 오로지 흰 돌로서 황금이 아니어라 샘물 소리가 백금 퉁기면 자기가 있어 이 소리 아네. 寒山深 稱我心 純白石 勿黃金 泉聲響 撫伯琴 有子期 辨此音 위시는 伯牙와 鐘子期의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천태산의 자연 경계를 눈 뜬 자만이 안다고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의 3언시는 매우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또한 寒山詩가 보여주는 독특한 시세계이며 전통에 대한 철저한 반항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寒山의 3言詩는 표현이 비상한 것이고 특출한 것이며 또 기이한 것이다. 3言詩와 半格詩는 寒山子의 독특한 시세계를 나타내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을만 하다. 이상에서 寒山詩의 특징을 格外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寒山詩가 格外적인 입장을 시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半格詩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寒山의 半格詩는 오늘날 현대의 자유시와도 그 성격상 정형적 틀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기조의 맥을 함께 한다고 보여진다. 寒山詩의 특징으로 또한 구어적인 면을 들 수 있다. 白話詩는 구어체 시의 성격이 상당히 강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선의 언어관과도 상통하는 면이 매우 많다. 白話詩의 연원에 대하여 胡適은『白話文學史』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白話詩의 여러 근원은 첫째는 민가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자세 한 설명이 필요 없이 일체의 어린이들 노래와 민가가 모두 白話詩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 둘째로는 시인들의 시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문인들이 구어체로 서로 희롱하며 시를 짓고 하는 것으로 陶淵明의 시도 이에 속한다. 세번째는 가무이다. 노래 속에서 文學도 자연과 가까워진다. 네번째는 종교철리이다. 종교의 전파함에 많은 偈頌을 운에 맞게 지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 초에 와서 佛敎가 성하게 되고 선종이 흥할 때 白話詩가 가장 많이 나왔다. 초당의 白話詩人으로 王梵志와 寒山 拾得등이다. 寒山詩의 白話詩적인 전통은 王梵志로부터 영향 받았음은 이미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胡適의『白話文學史』에 의해 그 사실을 밝히고있다. 寒山詩의 구어적 특징을 보면 전통을 무시하고 여러 시 형식을 썼으며 운과 평측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偈 歌 散文의 합류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속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寒山의 詩속에는 언어에 대한 독특한 입장이 드러나 있다. 이는 寒山의 언어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하나의 도구적 개념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언어에 대한 고민은 언어를 통하여 어떻게 진리를 표현하는가의 문제였다. 이는 선과 시가 언어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 차이를 잘 엿볼 수 있다. 언어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선에서만큼 극명한 것도 없다. 노자에서도 언어에 대한 한계를 말하고 비판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나 선가에서만큼 강력하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노자에 있어 참다운 세계는 언어 이전의 것이라는 신념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道德經』의 첫장에 나오는 귀절인“ 길을 길이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라던가 맨 마지막 장의“믿음이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아니하다.(信言不美,美言不信; 善者不辯,辯者不善)”라는 말은 다 언어를 대하는 동양사상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禪家에서도 언어에 대한 극단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으니“입을 열면 그릇쳤다(開口卽錯).”라던가“이 문 안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두지말라(入此門來 莫存知解).”고 경계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언어에 대하여 신뢰하지 않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서양의 언어를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 얼마나 선가의 언어관이 철저히 부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지 알 수 있다. Heidegger 같은 사람은 언어를‘존재의 집’이라고 하고 있으며 언어를 통한 사유에 의해 인간 존재를 해명하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상반되게 변화하는 언어에 신뢰를 주기보다는 언어 이전의 본질을 추구했던 동양의 사유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인간의 삶의 행위중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언어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언어가 또한 인간의 존재를 구속하고 벽에 가두는 역기능을 한다면 매우 역설적인 것이다. 선가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허구성을 철저히 꿰뚫어 통찰하고 그에 대하여 부정적 어법과 역설로 그를 극복하려고 했다. 이런 점을 가장 잘 지적하고 있는 사람으로 언어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 Ludwig ?~195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論理哲學論考』(Tractatus)에서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않된다” 고 하고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으면 않된다고 말 하는 그의 언어에 대한 태도는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와 언어에 대한 유한한 입장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어떤 면에서 선의 언어관에 가까이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분석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 언어게임이론을 내세우는 것은 이제까지 언어에 의하여 실재가 가려지고 환상과 관념만이 활보하는 현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태도와 선가의 언어를 인정하지 않고 格外로 나타내려는 태도는 매우 흡사한 것이다. 馬祖와 趙州의 平常心의 가르침에서도 이런 일상언어에 대한 자각이 깊이 깔려 있다고 보여진다. 다음은 선과 분석철학의 언어에 대한 태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선에 있어서 깨닫는다는 것은 모든 사유로부터 벗어나 살아간다는 것이 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 교환을 가능케 하는 행동 역시 사유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은 사유에 관한한 佛 敎의 교리와 일맥 상통하는 훌륭한 언어관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언어가 비트겐슈타인이 묘사한 대로 기능을 한다면, 선사의 방식처럼 사유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과 그날 그날 언어를 사용하는 것 에 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 사이에 양립 못할 것이 없다. 더욱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언어의 토대는 바로 선에서의 종교 생활의 정점―동시에 출발점―을 이루는 존재 양식과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 선의 언어관과 분석철학의 언어관은 일상언어에서 만나게 된다. 이점은 둘다 기존의 잘못된 허구와 환상을 깨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의 태도는 더욱 철저하고 극렬하며 언어 자체를 포기하고 인간존재의 근저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뵨 바와 같이 선에서는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언어의 관념화를 부정하기에 철저히 언어에 묶이는 것을 벗어나려고 한다. 寒山詩에 있어서 구어적인 詩는 선종의 語錄文學과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구어적인 성격은 한산시에서 첩어를 많이 아용한다던지 일상적인 언어를 아무런 여과 없이 시에 도입해서 쓰고 있는 것은 시적 비범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는 寒山詩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현대 중국 文學에 있어 白話詩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寒山詩의 특징중에 또 하나는 寒山 이전의 시에서 볼 수 없는 현상으로 시 속에 이야기를 넣는 것이다. 寒山의 시는 주로 시 속에 비어나 속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경전이나 세상의 삶의 모습에서 이야기를 따와서 시 속에 넣는 것이다. 이같이 口語詩의 전통을 일찍 열어준 寒山은 대단히 비중이 큰 존재라고 할 수 있다. 2. 直 觀 寒山詩의 특징으로 直觀的 미학을 들 수 있다. 直觀은 형식논리를 뛰어 넘어 본질을 바로 드러내어 파악하는 것이다. 선이 지향하는 세계는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세계이다. 선의 세계는 어떤 논리적 접근도 용납하지 않는다. 철저히 비논리의 세계에서 초논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 세계는 늘 직관적 형식을 빌려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선가의 話頭가 상식을 초월해 있고 선사의 언어가 초월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드러내는데 여러가지 방편을 쓰고 있으며 때로는 격렬한 언어나 행위로 나타내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을 第一義諦로 삼고 있으며 고도의 수행을 통하여 이루어가고 있다.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은 말 할 나위가 없지만 그러나 의사소통의 방법이 언어문자를 떠나서 달리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부득불 언어문자를 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언어는 다분히 역설적이기도 한 것은 어떤 언어로도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간의 존재는 사유하는 존재이고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결국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시각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고정된 틀에 빠져버릴 때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틀을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이해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오류를 줄일 수 있는 틀을 갖고 바라보려는 노력을 우리가 포기 할 수 없다. 이런 시각을 갖고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현대 서구의 해석학(hermeneutics)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해석학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시각은 이해의 폭이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다. 이해라는 현상을 단순한 텍스트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서 다루려고 하는 지속적인 노력은 통상적으로 人文學이라 불이우는 모든 분야들에 대해서 해석학이 가질 수 있는 의의를 잠재적으로나마 크게 높여 놓았다. 이러한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이해방식은 바로 우리 인간의 세계 내 존재(beintg-in-the-world)와 연결된다. 그러기에 하나의 작품은 실존을 벗어난 개념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속에 있다고 하는 개인의 체험인 것이다. 해석학은 두 영역으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이고 또 하나는 근본적으로 실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佛敎에서 모든 경의 머리에는‘如是我聞’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하여 인식과 이해의 폭을 무한히 열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란에 의하여 송출되었다고 전해지는 대부분의 경들이‘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경의 태도가 해석학의 통로로 무한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해석과 이해의 통로에 따라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이기에 인간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인간존재의 실상은 직관을 통하여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잘 나타내고 있는 한산시를 보자. 192 물이 맑고 고요하고 환히 밝으면 모든 것 속속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마음 가운데 진실로 한가지 일도 없으면 모든 경계가 움직일 수 없느니라 마음이 망령되이 일지 않으면 영원히 옮기거나 변하지 않나니 만일 그대 능히 이렇게 알면 이 지헤는 등과 앞이 없느니라. 水淸澄澄瑩 徹底自然見 心中無一事 萬境不能轉 心旣不妄起 永劫無改變 若能如是知 是知無背面 이처럼 사물은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바로 파악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앞과 뒤가 따로 없다고 한다. 오직 있는 현상 그대로 나타나며 인식하여 알게 되는 것이기에 부처님도 일찌기 나는 한 법도 더하거나 감춘 바가 없다고 말씀 하셨다. 깨달음의 순간을 偈頌으로 읊을 때는 直觀的으로 진리의 눈을 뜨는 것이다. 이때 형식적 논리로는 도저히 본질의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悟道頌은 直觀的 언어라 할 수 있다. 直觀은 선의 언어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동양적 直觀을 直覺的 세계라고도 하며 이는 서양의 直觀과는 좀 다른 것이다. 이러한 直覺의 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선사가 학자를 제접할 때 흔히 쓰는 棒과 喝이다. 특히 雲門의 一字觀은 직절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가장 文學的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경험적 세계와 분별을 뛰어넘어서 청정하고 맑은 심성은 누구나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사상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의 생명이 일치하기를 희망하였고 해탈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사물의 본질을 直觀的으로 통찰하여 근원에 도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수행의 목적은 삼매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삼매(Sammadhi)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요목으로 수행에 있어 선정과 지혜를 함께 아우러 나아가는 것이다. 분명히 선의 언어는 일반적인 시의 언어가 함께 할 수 없는 내면적인 깊이를 갖고 있다. 定과 慧는 함께 닦아져야 한다. 三昧를 닦지 않으면 지혜가 나올 수 없다. 이러한 삼매를 통하여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으며 지혜를 이루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한산은 다음과 같이 시를 읊고 있다. 193 밥을 말해도 끝내 배 부르지 않고 옷을 말해도 추위를 못 면하네 배 부르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추위를 면하려면 옷을 입어야 하네 깊이 생각해 헤아릴 줄 모르고 다만 부처 구하기 여렵다 말할 뿐 마음 한 번 돌리면 곧 이 부처니라 아예 멀리 밖으로 구하지 말라. 說食終不飽 說衣不免寒 飽喫須是飯 着衣方免寒 不解審思量 祗道求佛難 廻心卽是佛 莫向外頭看 아무리 서구의 합리적 형식 논리가 잘 다듬어져 있다 해도 본질 그 자체는 영원히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은 언어에 대하여 크게 신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한산은 <밥을 말해도 끝내 배는 부르지 않고/ 옷을 말해도 추위를 면할 수 없다>고 읊고 있는 것이다. 한 숫갈이라도 떠먹어야 배는 부르며 한 쪽이라도 입어야 따뜻해지는 것이다. 한산은 바로 미망의 그물을 끊어버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간곡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실천 없는 공허한 이론의 헛됨을 지적하고 있다. 선가 언어의 특징으로 平常言語를 들 수 있다. 馬祖의 平常心是道라고 하는 말이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것이 모두 이러한 경지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吉洲의 靑原惟信禪師의 상당설법에 노승이 30년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그뒤 선 지식을 만나 공부길에 들어서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쉬고 보니 여전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대중 은 이 세가지 견해가 같은가 다른가 누구든지 터득하면 노승과 같은 경 지임을 허락하겠노라.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의 3단계는 첫째는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인 상식적인 단계이다. 둘째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상태이다. 이것은 과거의 고정된 관념으로는 현상의 세계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셋째는 다시 산은 여전히 산이요, 물은 여전히 물인 것이다. 이 경지는 바로 완전히 깨달은 후 일상의 차원으로 돌아온 세계이다. 尋牛圖에서의 返本還源과 같은 것이다. 첫째 단계와 셋째 단계는 말은 같으나 경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선의 일상적이고 평상적인 세계는 바로 이런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상의 마음을 떠나 달리 어디에서 도나 진리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선가의 언어중에 그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活句와 死句일 것이다. 참선의 요제는 活句를 참하는데 있다고 분명히 말 하고 있다. 아무리 많은 말이라도 뜻이 살아 있지 않으면 죽은 사구요, 제비와 참새의 지저귐도 뜻이 살아 있으면 활구다. 活이라는 말은 사는 곳에서 이치를 본다(活處觀理)를 가리킨다. 선종의 선리를 깨닫는 방식은 초기의 佛敎와 달리 내심의 사색에 완전히 의존하 지 않았으며 중국 전통의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한다(近取諸身)는 즉물 적 체험 방식에 의거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祖師關이라고도 하니 옛부터 수행의 관문으로 조사관을 뚤어야만 크게 활구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하고 또한 깨달음은 종요로이 마음길 이 끊어져야 한다고 했다. 참선이란 말할 것도 없이 활구선을 말한 것이 다. 활구선이라야 조사관을 뚫을 수 있고 마음길이 끊어져 확철대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위 말은 바로 이런 소식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活句參禪은 본래의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직각에 의한 체험, 순간적 頓悟, 현묘한 표현등으로부터 활 구참선에 의한 깨달음에 이르러 선종은 독특하고 체계를 갖춘 하나의 사 유방식을 구성하게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은 印度佛敎의 단순한 사색과 달리 내심과 외계사이에 하나의 통로를 열어놓았으므로, 외물에 대한 체 험과 선리의 깨달음 모두에 있어서 그것은 훨씬 생동적이고 활발한 것이 었다. 이것은 일종의 비이성적이면서 도약적인 것으로 노장과도 가까운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老莊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시각을 보여주는 주장을 볼 수 있다. 물론 선이 노장과의 관련을 전연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노장에 지나치게 관련을 맺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선은 선의 독자적이며 고유한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선종이 중국화 되는 과정뿐 아니라 본래의 불타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으로 새롭게 이해 되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定과 慧를 아울러 닦을 것을 선에서는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수행의 근본이 3학에 있으며 3학을 구체화 하고 있는 것이 8정도이다. 3學과 8正道는 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서로의 관계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戒;正語 正業 正命 定;正精進 正念 正定 慧;正見 正思惟 이처럼 8정도는 삼학에 포섭되고 또 일체의 불법 또한 삼학에 다 수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의 근본은 戒와 定과 慧를 온전히 고루게 닦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定慧의 닦음은 北方佛敎의 看話禪 수행이나 南方佛敎의 위파사나(觀法) 수행에서 다 같이 중요하게 행하고 있다. 直觀은 진리의 법을 파악함에 어떤 방편이나 언어적인 형식을 빌리지 않고 직절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은 寒山詩의 直觀的 특징이 잘 드러나는 시를 살펴보자. 247 홀로 너럭바위 위에 올라 앉으면 개울물 소리 차거이 그윽해라 고요히 둘러보면 못내 아름다운데 바위 골짜에는 실구름 헤매이네 호젓이 앉아 그윽히 즐기나니 나무 그림자 해 따라 낮아졌네 내 고요히 내 마음 관하나니 연꽃 한 송이 진흙 속에 피어나네. 盤陀石上坐 谿磵冷凄凄 靜玩偏嘉麗 虛巖蒙霧迷 怡然憩歇處 日斜樹影低 我自觀心地 蓮華出어泥 直觀은 어떤 형식적 논리를 통하지 않고 바로 본질을 드러낸다. 이러한 경지를 寒山은 <내 고요히 내 마음 관하나니 연꽃 한 송이 진흙 속에 피어나네.>라고 읊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본질을 드러냄에 어떤 형식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直觀의 세계를 禪文學의 한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寒山詩에 있어서 이러한 直觀的 성격은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런 것은 동양정신에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直觀의 세계에서는 자연과 인간과 시가 하나를 이룬다. 또한 이러한 경지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寒山詩가 보여주는 세계 또한 바로 이런 直觀과 다름 아닌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벽중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분법적 사고라는 것이고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의 가능성은 바로 佛敎의 가치관을 통하여 새롭게 열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 대하여 이는 서구의 합리적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늘어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하겠다. 寒山詩의 세계는 이런 점에서 매우 깊이 直觀的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禪文學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하겠다. 3. 詩 禪 一 如 寒山詩에서 禪과 詩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寒山詩의 특징으로 禪詩一如를 꼽을 수 있다. 禪과 詩는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시는 서로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있으니 이러한 면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禪文學의 특성으로는 일반 文學的인 언어와 달리 깨달음을 제일의 목표로 추구하고 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증득하여 살아 있는 언어로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수도의 길이란 엄숙한 것이어서 예술의 세계에서 노닐 여유를 허 용하지 않는다. 시와 종교의 관계는 벼랑에 꽃을 던지는 것과 같다. 합치 하는 순간도 있지만 이내 양자는 갈려야 할 운명에 있다. 종교라는 말을 선이라고 바꿔놓고 보면 선과 시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선과 시의 관계는 위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통하는 면도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다. 수행의 길이 결코 시적인 감성의 세계와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으며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어 합쳤다가는 이내 다시 갈라지는 것이다. 벼랑에 던져진 꽃은 다시는 건져 올릴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란 종교에 있어 벼랑과 꽃과 같은 관계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영원히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이내 서로 갈라서야만 하는 운명이 곧 선과 시의 관계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선과 시와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입장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선과 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니 시는 감성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상을 추구하지만 선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함께 뭉쳐 나아가는 것이라서 선 에 있어서는 그 모든 생각이 하나로 응집되어 오직 일념으로 나아가는 것 이요. 이 일념의 현상은 모든 상념의 순일상태로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과 시는 이와 같이 감성의 세계와 총체적인 통각의 세계와의 차이만큼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상을 달리고 펼치고 하는 것이겠지만 선은 모든 상념을 한군데 꽉 묶어서 집중시킴으로서 그것이 본성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 있 어서는 이것이 최상의 자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만일 의식 적으로 시를 쓰기 위하여 선을 한다거나 선을 하기 위하여 시를 배운다 면 그것은 안될 것이다. 선과 시가 그 출발점이 다르고 그 취향이 서로 다른 것임은 두 말 할 것 없다. 다만 그 출발이 감성이건 지성이건 시경 의 극치에 나간 어느 지점에서 취향을 달리 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선에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선과 시는 출발점이 다르기때문에 서로의 분명한 입장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여 서로의 입장을 혼동하여 시를 위해 선을 복속시키거나 한다면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시는 여러가지 유사점을 갖고 있다. 선이나 시에 있어 모두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명하느냐의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옛부터 선과 시에 관한 논의가 있어 왔다. 禪詩一如를 내세우는 사람으로 嚴羽와 王謝楨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흔히 妙悟論者라고 불려지는데 禪詩一如의 정신은 그들의 文學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선과 시의 일여의 근원에는 寒山子가 보여주는 禪詩一如의 모습을 도외시 할 수 없다. 寒山詩의 禪詩一如의 경지를 그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266 높은 산 봉우리 꼭대기 올라 사방을 돌아봄에 끝이 없구나 나 혼자 앉았음에 아는 사람 없고 찬 샘물에 외로운 달이 비쳐 있다. 샘물에는 원래 달이 없거니 달은 스스로 저 하늘에 있었다. 내 노래 한 곡조를 불러 보나니 이 노래 속에 곧 선이 있지 않은가? 高高峰頂上 四顧極無邊 獨坐無人知 孤月照寒泉 泉中且無月 月自在靑天 吟此一曲歌 歌中不是禪 寒山詩에서 禪이라는 말을 직접 쓰는 예는 흔치 않다. 이 시는 드물게 선과 시의 경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산 속에 홀로 앉아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건만 샘물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노래를 읊는 한가로운 마음속에 본래 선의 진수가 있다는 그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 어떤 대상과도 상대적인 대립관계가 무너져버린 절대의 자유와 안온을 얻은 것이다. 샘물에 비친 달이 본래는 샘물에 있지 않으며 스스로 하늘에 본래 있는 것이다. 寒山의 많은 시들이 자연속에서 선과 시가 일여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볼 때 얼마나 그의 시가 선의 세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寒山의 선과 시가 한 세계로 담겨 있는 다음 시를 다시 살펴보자. 274 찬 바위 밑에 깃들어 살면 별스레 그윽한 일 새삼 신기해 때로는 시름 없이 바구니 들고 나가 빨간 여자랑 산과실 캐어 오고 베옷 그대로 떼풀을 깔고 앉아 질금질금 생으로 자초도 씹어 보네 맑은 개울물에 바리를 씻고 한데 뒤섞어 아욱국을 끓인다 볕 바른 양지에 누더기 안고 앉아 옛사람 시를 한가로이 뒤적이네. 棲遲寒巖下 偏訝最幽奇 携監采山茹 擊籠摘果歸 蔬齊數茅座 철啄食紫芝 淸沼濯瓢鉢 雜和烹稠稀 當陽擁袋坐 閑讀古人詩 위 시 또한 寒山의 시와 선이 일여한 경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이다. 이같이 寒山은 자연과 선과 시가 하나가 된 세계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寒山詩의 特徵을 살펴보았다. 寒山詩는 禪文學의 초기애 존재하는 인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시세계의 특징은 格外와 口語體文學인 白話詩의 일상언어, 그리고 直觀의 세계를 통하여 선과 시를 하나로 이룩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그의 格外的인 시로서 半體詩는 가장 두드러진 한산시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Ⅶ.後代 寒山詩의 受容 寒山詩는 후대에 내려와서 그의 眞面目이 더욱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寒山詩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정통문단으로부터 소외를 받아왔으나 禪家와 민중에 의해 많은 지지를 얻어서 꾸준히 읽혀져 왔던 것이다. 현재는 中國, 韓國, 日本은 물론이고 멀리 美國에까지 많은 독자를 얻고 있어 이제 寒山은 대중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후대 寒山이 어떻게 평가되고 수용되었으며 다양한 세계속에서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다. 편의상 寒山詩가 후대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中國, 韓國, 日本, 美國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禪詩가 禪畵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보겠다. 寒山 拾得圖는 禪畵로서 매우 널리 알려진 화제이다. 이는 寒山의 신화성과 깊이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1. 中 國 寒山詩가 대중에게 알려지고 읽혀지기 시작한 때는 唐末 五代에서부터라고 보여진다. 晩唐의 시인 杜牧이“한 생이나 두 생을 지나 시를 읊고 짓는 것도 老杜의 경지에 이르거늘 하물며 또한 寒山에 있어서야”하고 술회한 것을 보면 寒山詩集이 상당히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禪家에서 貫休(832~912)가 寒山에 대해 설하고 있으며, 『宋高僧傳』 11엔 위산과 寒山子, 13권에는 本寂의 寒山子詩 주해를 소개하고 있다. 그후 淸代에 와서『四庫全書』(1792)에 들어가고 1707년에 편한 『全唐詩』에 들어갔으며 正統文學 비평가들이 평가하고 民國 5.4 운동후 현재까지 크게 주목 받고 있다. 寒山詩는 고래로 선문에서 많이 독송되어 왔으며 佳句는 여러 語錄과 偈頌에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寒山詩를 이제까지 일반 시인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宋代의 朱憙등 일부 학자가 주목하고 애호하며 전해져 왔을 뿐이다. 宋代 이후에 시집이 간행될 때 그 시집이 재평가 되고 있다. 선가에서는 당말부터 널리 애독되었다. 그래서 때때로 公案에도 이용되어 提唱의 텍스트로 쓰여지게 되었다. 寒山을 모방하여 擬作의 시도 선승들이 많이 남기고 있다. 종래에는 寒山詩의 해석이 선적 입장 일변도였다 는 지적을 받을 만큼 寒山詩는 선가에서 많이 애송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결과 寒山詩를 禪詩로 보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寒山과 선가와의 인연은 傳燈史書에도 잘 나타나 있으니『傳燈錄』에는 寒山詩를 曹山本寂禪師가 주석하고 있음(曹山本寂禪師 注釋謂之對寒山子詩)을 밝히고 있다. 「志南의 記」에는 한산과 위산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趙州와 天台山에서 문답을 주고 받은 것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寒山과 趙州와 위산과의 나이를 비교해 보자. 재세기간 생존연령 寒山 710~820 105세 위山 771~853 83세 趙州 778~897 120세 趙州와 天台山에서 만나던 시기에 寒山子의 나이가 84세로 추정된다. 또한 위산은 23세 때이다. 趙州는 위산보다 7세 연하이니 趙州의 나이 16세때이다.『趙州語錄』에는 趙州가 天台山 國淸寺에 이르렀을 때 寒山 拾得을 보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趙州와 만났을 때 趙州가“오래전에 寒山 拾得을 들었는데 이제 와서 물소뿔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니 寒山 拾得이 곧 소가 싸우는 모양을 하자 趙州는“이랴 이랴”하였다. 寒山 拾得은 이를 맞물고 서로 바라보았다. 趙州는 곧 堂으로 돌아왔다. 라고 趙州와 寒山의 만남을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奉恩寺本에 실려 있는 志南記에는 내용이 좀 다르게 나타나 있다. 조주가 천태산에 가서 소의 자취를 보자 한산이 말하기를‘상좌가 소를 아는가? 이것은 오백나한이 산에서 놀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주가 ‘이미 나한일진대 어째서 소가 됩니까?’라고 물으니 한산이 ‘가소롭 고 가소롭도다’라고 탄식했다. 조주는 하하 크게 웃었다. 한산이‘무엇 때문에 웃느냐’고 묻자 조주는‘가소롭고 가소롭습니다.’하고 말하자 한산이‘어린 아이가 도리어 어른의 행이 있구나’라고 말했다. 趙州到天台行 見牛迹 寒曰 上坐還識牛摩 此是五百羅漢遊山 州曰 旣是羅 漢爲甚摩作牛去 寒曰 蒼天蒼天 州呵呵大笑 寒曰 笑作甚摩 州曰 蒼天蒼天 寒曰 這小시兒 却有大人之作 이로 미루어 보아 조주가 어릴 때 한산을 만났으며 한산시와 선가와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禪學大辭典』에는 寒山詩에 관계된 문헌으로 寒山詩를 모방한 擬寒山詩를 자세히 들고 있어 주목된다. 擬寒山詩란 寒山詩를 본 따서 후인들이 시를 지은 것을 말한다. 寒山詩에 대하여 특히 선가의 선사들이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만큼 寒山詩는 선가에서 많이 읽혔음을 알 수 있다. 寒山詩는 난해한 면을 갖고 있으며 皎然, 齊己, 貫休 등의 시승들의 작품과도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그의 난해함은 첫째로 기묘한 어귀가 적지 않으며 기묘한 어귀는 一般詩人도 사용하지만 다른 문헌에 나타난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또 특수한 佛敎 용어와 당대의 속어를 쓰고 있는 점이다. 게다가 시어에서 생경한 말도 많다. 또 평상적 시어법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寒山詩가 선종과의 관계에서 상당히 첨가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한다. 뒤에 선종에서 많은 擬作이 나오는 것도 寒山詩가 갖은 한 특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太平廣記』권 55의 寒山子條에는 唐 玄宗 때 徐靈府가 일찌기『寒山詩集』을 3권으로 나눠 편집하고 서문을 썼다고 전한다. 이는『寒山詩集』이 최초로 편집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曹山本寂禪師의 注를 단 寒山子 시집이 민간에 유행했다고 한다.『宋高僧傳』卷 11에는 위山 靈祐와 寒山의 얘기가 전해진다. 汾陽(947~1024)은 禪文學史上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頌古의 최초의 형태가 그에 의해서 시작 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汾陽은 臨濟宗의 법맥을 잇고 있으니 臨濟宗이 黃龍派와 楊岐派로 갈라지는 것은 慈明楚圓 代인데 바로 慈明楚圓의 스승이 汾陽善昭이다. 汾陽은 首山의 법을 이었다. 송대에 와서 당의 선문헌의 집대성과 사상의 체계화로 인해 송대의 禪佛敎는 禪文學의 발전적 기반이 확립되게 된다. 그 후 頌古百則이 여러가지가 나오고 있으니 雪竇重懸의 頌古에 園悟克勤이 評唱을 붙인『碧巖錄』을 비롯하여『擊折錄』,『空谷集』,『虛堂集』,『宗容錄』,『請益錄』,『無門關』,『絶中錄』,『 禪院蒙句』,『宗門拈古集』 등이 나왔다. 선가와 寒山詩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이 風穴 延沼가 상단 설법에서 寒山의 시를 들어 법문을 한 것이『傳燈錄』에 전해진다. 梵志死去來 魂識련閻羅 讀書百王詩 未免受隨苦 一稱南無佛 皆而佛成道 위시는『風穴語錄』에 나오는 것으로 胡適은『白話文學史』에서 인용하여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寒山詩集』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현존하는 한산자시집에서 마지막 귀절이 같은 시인 No.206 이 있으니 보자. 206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이여 어찌 모두들 제 정신을 잃었는가 얼굴 위에는 두 마리 악한 새요 마음 속에는 세 마리 독한 뱀 이것들이 모두 걸림이 되어 너의 일로 하여금 어지럽게 하는구나 손을 들어 높이 손가락을 퉁기나니 나무 불타야, 나무 불타야. 衆生不可說 何意許顚邪 面上兩惡鳥 心中三毒蛇 是渠作障애 使이事煩拏 擧手高彈指 南無佛陀耶 風穴延昭(896~973)의 법어에 인용한 시를 볼 때 王梵志와 寒山의 관계를 알게 해주며 이 점을 胡適도 위 책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寒山詩의 대중성 획득은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일찍부터 선가와 민가에서는 읽혀지고 애송되어 왔었기 때문이다. 『宋高僧傳』권 11에는 위山靈祐와 寒山의 얘기와 아울러 또 黃山谷이 寒山詩를 쓴 것이 전해진다. 天台德昭의 寒山詩 評을 보아도 선가에서 寒山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래로 선가에서 寒山詩를 즐겨 애송하고 寒山詩를 본 뜬 작품들이 많다. 慈受, 中峰, 楚石, 石樹, 貫休, 皎然 등 많은 선사들이 寒山詩를 본따 擬作詩를 남기고 있다. 擬作詩란 옛사람의 시를 본 받아 짓는 시를 말하는데 慈受 懷深과 楚石 琦梵과 石樹 濟岳의 擬作詩는 매우 훌륭한 시라고 할 수 있다. 한산을 본 떠서 擬寒山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를 남기고 있다. 의작시는 꽤 오래전부터 행하여져 왔으니 고래로 陶淵明의 擬古같은 시는 옛 고시를 본 받아 썼던 것을 의미한다. 특히 寒山詩가 선가에서 많이 읽혔을 뿐 아니라 또한 선사들에 의해 寒山詩를 본뜬 모방시가 많이 나온 것은 그 당시의 선가의 文學的 풍토`를 여실히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楚石과 石樹 두 스님의 擬寒山詩는 모두 寒山詩에 각각 시마다 대응하여 붙이고 있으니 이런 의작시는 매우 특이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두 선사는 여기서 寒山의 선의 경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慈受와 楚石 은 臨濟宗의 뛰어난 선의 거장이면서 또한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다. 이들 선사들에 의하여 寒山詩가 면면히 선가에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볼 때 선가에서의 수용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慈受懷深의 擬作詩 또한 이런 寒山의 시를 모방한 시중에 寒山의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慈受懷深이 寒山의 시를 본 떠서 시를 많이 남기고 있음은 선종에서 얼마나 寒山을 애독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봉은사 판본의 부록에 실려 있는 慈受深和尙擬寒山詩의 시집 서문에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늙고 병들어 동정호에 띠집을 짓고 종일토록 무사하게 지내기도 하고 또는 물가나 나무 그늘 아래의 반석에 앉아서 가지를 부여잡기도 하며 한 산시를 노래하고 습득의 게송을 흥얼거리다가 더불어 뜻이 모아진 것이다. 그 체를 본따서 148수를 이루니 비록 말이 졸렬하고 조악하여 문채는 빠 지지만 거의 앞의 성인의 자비의 뜻을 넓혔다. 余因老病 決茅洞庭 終日無事 或水邊林下 坐石攀條 歌寒山詩 아拾得偈 適 與意會 遂擬其體 成一百四十八首 雖言語拙惡 乏於文彩 庶廣先聖慈悲之意 慈受가 시집의 서문을 쓴 때가 建炎 4년이니 이 때는 南宋 高宗 4년으로 서기 1130년이며 慈受가 입적하기 2년전이다. 慈受懷深은 宋 神宗 熙寧10년(1077)에 태어났다. 나이가 14세 되던 해에 계를 받았다. 뒤에 長蘆崇信의 법을 이어 靑原아래 제 13세가 되니 雲門宗의 법계에 속한다. 宋 高宗 昭興2년(1132)에 示寂하니 세수 56세였다. 시자 善淸등이 엮은『慈受懷深禪師廣錄』4권이 전하여 온다. 그는 寒山詩를 본따서 많은 시를 남기고 있다. 다음은 스님의 시를 살펴보자. 내 한산자를 사랑하나니 몸이 가난하고 마음 스스로 같느니라 시를 읊지만 운과 법도가 없어 불을 때고 그저 공부만 있을 뿐이다. 헤지고 때 낀 옷은 씻기도 귀찮아 더벅머리는 산발인채 빗지 않으니 서로 만나 휘파람만 길게 불뿐이니 육안으로 어찌 그를 알겠는가. 我愛寒山子 身貧心自如 吟詩無韻度 燒火有工夫 弊垢衣용洗 붕승髮懶소 相逢但長嘯 肉眼豈知渠 위 시를 통하여 慈受懷深의 寒山詩 理解는 매우 깊은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범속한 중생의 눈으로 형색이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한산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고 그는 묻고 있다. 그래도 한산은 자수와 같이 눈 밝은 이를 만나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楚石梵琦선사는 휘는 梵琦이며 자는 楚石이며 당호는 西齋老人이라 하였다. 元 成宗 元貞 2년(1296) 에 태어나 9세에 天寧寺 訥翁謀公을 따라 經業을 받았고 16세에 杭州 昭慶寺에서 具足戒를 받고 大僧이 되었다. 뒤에 元搜行端의 법을 이어 南嶽의 大慧派의 법계에 속하게 되었다. 勅賜되어 佛日普照 慧辯禪師라 하였다. 明 太祖 洪武 3년(1370)에 示寂하니 세수 75세였다. 그의 문인 祖光등이 엮은『楚石梵琦禪師語錄』20권이 세상에 전한다. 石樹禪師는 寒山詩를 매우 좋아하여 많은 寒山의 시를 본 떠서 만든 시를 남기고 있음을 볼 때 선가에서 얼마나 많이 寒山詩가 유행되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合訂天台三聖二和詩集』에는 楚石과 石樹의 擬寒山詩가 함께 들어있어 도합900여수가 넘게 실려있다. 이것은 한산시에 낱낱이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다음은 石樹의 寒山詩 讚을 보자. 我讀寒山詩 勝讀經萬卷 忍俊不能榮 隨口和一篇 위 시는 선가에서 한산시를 얼마나 애송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음은 宋 行端禪師의 寒山詩를 본받아 지은 시를 보자. 원래 선사의『語錄』6권에 실려 있는 것이다. 黃潛이 지은 선사의 탑명에 이르기를 寒山子의 시 백여편을 본 받아 지으니 모두 眞乘의 流注여서 사방의 납자들이 많이 전하여 외웠다 한다. 지금 語錄에 수록된 시는 41수에 지나지 않으니 원작의 망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行端의 擬寒山子詩 이다. 세상에 위 없는 보배 있으니 그 보배는 푸르거나 누르지 않네 사람이 일용하는 사이에 있어 밝고 밝고 깨끗하여 당당하다네 만상이 그것을 주인 삼고 만법이 그것을 제왕 삼았네 그것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하면 눈 먼 노새처럼 맘대로 가리. 世有無上寶 其寶非靑黃 在人日用間 皎潔明堂堂 萬像他爲主 萬法他爲王 與他不相應 盲驢空自行 위에서 만법은 萬有事理란 말이고 법이란 자체의 뜻이며 궤칙의 뜻이다. 하나 하나의 체가 있고 궤칙이 있으니 그러므로 모두 법이라 이름한다. 行端선사는 南嶽의 제 19세가 되며 臨濟宗 楊岐派의 법계에 속한다. 元 順帝 至正 원년에 示寂하니 세수 87세였다. 문인 法林 등이 엮은『元수行端禪師語錄』8권이 세상에 전해진다. 선가의 많은 선사들에 의해 한산시는 이어지고 또한 시승들이 많이 나와 한산시는 더욱 깊게 수용되었다. 이같이 詩文에 뛰어난 스님들이 나오게 되고 이들을 시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학대사전에“당대 중기 강동을 중심하여 수도승과는 다른 시를 잘 짓는 스님들이 나와서 문인과 사대부와 교류하였다. 靈一, 曇一, 皎然, 靈徹 등이 그 대표적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기후가 온화한 강남은 당대의 詩僧 靈徹(746~816)등이 활약한 곳이며 雲門, 法眼등의 선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옛부터 文學性이 왕성한 풍토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臨濟宗의 4세인 風穴延昭(896~973)가“말하고 잠잠함은 이와 미에 빠지니 어떻게 통달해야 범함이 없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언제나 강남의 3월을 생각하노니 까마귀가 우는 곳에 백화가 향기롭다. (T,51.303,中) 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강남의 선풍은 매우 文學性이 풍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5家중에서 雲門宗은 文學的인 기풍이 넘쳐 흘렀다. 흔히 雲門宗의 가풍을 승중의 왕으로 표현한다. 이는 날카로우면서 文學性 넘치는 선문답의 철학적이며 文學的인 기교를 되살려 상징적이고 지극히 깊은 뜻을 함축한 단언, 촌구의 짧은 한마디로 학인을 지도하는 방법에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중당이후 발전해온 禪思想과 文學은 조화있고 훌륭한 결합을 이루고 있다. 3字 2字 1字등의 선문답은 명쾌하면서 활달한 가풍을 담는데 잘 활용되고 있다. 당대의 方外의 시인으로 皎然, 廣宣, 貫休, 齊己, 法震, 法照, 無可, 護國, 靈一, 處默, 淸江 등이 있어서 이들 시인의 작품이 佛敎文學으로 취급될 뿐 아니라 보통의 시인들도 또한 文學작품 속에서 佛敎的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승 가운데 오대의 시승으로 유명한 禪月大師 貫休(823~912)의 시에도 寒山에 대하여 존경하는 말을 남기고 있다. 不見高人久 空令鄙인多 遙思靑장下 無奈白雲何 子愛寒山子 歌唯樂道歌 會應陪太守 一日到煙蘿 이는 貫休가 赤松山에 은거하는 친구 서도사를 생각하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회포를 호소하고 있다. 산중에서 유거하며 도를 즐기는 고풍의 도사, 현실에서 친근하게 寒山詩를 두고 있는 것이다. <子愛寒山子>바로 이 귀절이 寒山子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다. 赤松山은 天台山 근처에 있는 산으로 옛적부터 도가의 성지로서 이름이 높이 나있다. 徐道士가 어느날 寒山子를 애독하고 락가를 애송하고 있었다. 여서 閭丘胤의 서문에서와 같이 신화화 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또한 산중에 유거하여 도를 즐기는 모습으로 서도사의 머무는 곳과 친근하게 寒山은 가까이 있다. 여기서의 寒山이라는 인물은 본래 신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윤색되기 이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貫休의 시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卽心卽佛 非心非佛 乃有與無 同出自性妙體 부처와 마음이 둘이 아니고 존재와 비존재 또한 다른 게 아니며 모두 하나의 묘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철학을 함축하여 보여주고 있는 시이며 貫休의 철학을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선가에서 寒山詩의 수용이 많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또 寒山詩가 많이 애송되기도 하고 특히 寒山詩를 모방하여 여러 선사들이 의 寒山詩를 많이 남기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이 寒山詩를 특징 지우는데 많이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寒山詩는 후대에 중국의 시단이 선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됨에 선의 直觀的 태도를 받아들이는 妙悟論者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그의 禪機가 풍부한 脫俗性, 時俗에 대한 諷刺라고 하는 詩風이 宋代 邵雍의 擊壤集의 一派에 繼承되었던 것이다. 妙悟說은 송대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선가에 대한 상식적 이해가 보편화 되어가고 이에 따라 以禪喩詩의 풍조가 성행하게 되는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妙悟란 본래 涅槃無知論에 깊은 이치는 오묘한 깨달음에 있고 오묘한 깨달음은 참에로 나아가는데 있다( 玄道在於妙悟, 妙悟在於卽眞) 라는 귀절이 있듯 이치를 깨우치는 直觀的 인식을 가리킨다. 선종에서는 법을 전수하거나 깨닫는 일은 언어문자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오직 마음이 깨끗하고 사심이 없는 사람이 비유적인 가르침을 얻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후에 선종은 남·북 양파로 분리되는데 남종에서는 頓悟를 내세웠고, 북종에서는 漸修를 주장했다. 묘오설의 완성자라고 볼 수 있는 嚴羽의 경우 그가 주장하는 묘오의 성격에는 頓悟와 漸修가 결합되어 있다. 묘오설은 남송 말기 嚴羽에 의해 완성되지만 그에 앞서 선이나 선가의 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시론을 전개한 이는 적지 않았다. 嚴羽는 滄浪詩話 詩辨에서 禪道는 오직 妙悟에 있으며 詩道 역시 妙悟에 있다고 하여 시를 짓는데 있어서의 관건이 참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묘오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滄浪詩話』에서 선과 시를 시론적 입장에서 관련시켜 禪詩 일치를 주장하는 시 본질론에 있어서의 묘오론을 내세웠다. 이와 같은 禪詩論은 그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嚴羽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遮禪喩詩와 遮悟喩詩의 시론이 비롯되었다. 이와 같은 禪詩論은 淸나라의 王漁洋에로 이어져 본격적인 詩論으로 전개되었다. 王漁洋은 그의 『漁洋詩話』와『帶經堂詩話』에서 시와 선은 그 悟境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神韻說을 내세워 禪詩論을 펼쳤는데 이와 같은 禪詩論들은 중국시학의 한 줄기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寒山詩는 禪家에서는 많이 독송되어 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寒山詩의 禪文學的 자리는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고, 뒤에 와서는 묘오론자들에 의하여 선과 시가 일치됨을 주장하게 되는 뿌리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韓 國 寒山詩는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韓國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韓國의 佛敎文學的 전통은 멀리 신라의 鄕歌에서부터 비롯된다. 향가에 대한 硏究는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佛敎文學쪽에서도 그에 대한 硏究로 김운학에 의한 硏究 저서가 나와 있다. 향가의 대부분은 佛敎思想의 바탕에 의한 것이거나 佛敎와 인연이 있는 것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佛敎文學의 전통은 이땅에 선이 들어오면서 禪文學으로 접맥되어 내려 왔음을 또한 잘 알 수 있다. 신라 하대에 道義 국사에 의해 처음 선이 전래된 이후 여러 선사들의 문집과 偈頌을 남겼으나 현존하는 자료는 별로 없다. 韓國에서 寒山詩가 보여지는 최초의 자취는 高麗 때부터이다. 고려조에 寒山詩가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 특히 선가에서 寒山의 영향을 받은 바에 대해서도 자료는 극히 적은 상태이다. 일본에 비해 寒山에 관한 자료가 적은 것은 아마 전란으로 문서들이 유실된 탓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절의 주련에 자주 寒山詩가 걸려 있는 것을 보면 韓國에서도 寒山詩가 상당히 대중 속에서 읽혀졌을 것이라고 짐작 된다. 寒山詩는 옛부터 선가에서 많이 애송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한국 禪文學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眞覺國師 慧諶의 語錄에서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曹溪眞覺國師語錄』의 室中對機 중에 眞覺 스님이 寒山詩를 들어 어떤 학인에게 묻자 학인이 대답을 못하여 대신 진각 스님이 대답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을 볼 때 眞覺國師는 이미 한산시를 많이 읽었음을 알 수 있다. 問僧 寒山詩云 微風吹幽松 近聽聲逾好 好在甚處 僧無對 師對云 如是我聞 어떤 스님에게 묻기를 한산시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그윽히 소나무에 불고 가까이 들으니 소리 더욱 좋다라고 읊고 있는데 좋은 것이 어느 곳에 있는 가? 라고 묻자 학인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스님이 대신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하였다. 위 시는 한산시 20번에 나오는 귀절이다. 원시를 전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20 이 몸 편히 간직할 곳 얻으려거든 이 한산 길이 가져 버리지 말라 그윽한 소나무에 실바람 일어 가까이 들으면 그 소리 더욱 좋네 그 밑에 어인 반백 노인이 있어 황로를 중얼거려 읽고 있나니 깃든 지 십년 돌아갈 줄을 몰라 들어올 때의 길을 이미 잊었네. 欲得安身處 寒山可長保 微風吹幽松 近聽聲逾好 下有斑白人 남남讀黃老 十年歸不得 忘却來時道 眞覺國師의 한산시를 들어 학인을 제접하였던 자취는 한산시가 당시 선가에 매우 보편적으로 읽혔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普照禪 계통에서 특히 한산시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면에서 國師의 無衣子詩集은 한산시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겠다. 眞覺國師語錄의 書狀에서 국사는 역시 한산시를 들어 편지에 답하며 화두 참선을 가르치고 있다. 但參此話 休於言下覓 莫向意中求 想公讀至此 必發一笑 如寒山詩云 上士見 我詩 把着滿面笑 楊脩讀幼婦 一覽便知妙 若不然者 每於十二時中四威儀內 時時提斯 時時擧覺 作生是本分事 啞 或但擧啞字 不離日用 다만 이 화두를 참구하되 말에서도 찾지 말고 생각에서도 구하지 마십시 요. 아마 공은 여기까지 읽으면 반드시 크게 웃을 것입니다. 저 한산시에 훌륭한 선비가 내 시를 읽으면 온 얼굴에 웃음을 띈 것이요. 양수는 유부를 보자마자 묘자를 알았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거든 십이 시와 사 위의 안에서 때때로 분발하고 때때로 들어 어떤 것이 본분의 일인 가? 아 하여 다만 아자만 들되 일상생활에서 떠나지 마십시요. 위와 같이 國師는 한산시를 들어 학인이나 사대부들에게 화두 참선법을 지도하였음을 볼 때 한산시가 상당히 많이 읽혔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國師는 禪門拈頌이라는 방대한 公案集을 편집하여 발간하기도 하였으니 당시의 모든 선적을 총 망라하여 수집하고 열람하였을 것이다. 위에서 國師가 인용한 시는 한산시집에 있는 다음시의 後句를 들고 있는 것이다. 137 下愚讀我詩 不解각嗤초 中庸讀我詩 思量云甚要 上賢讀我詩 把著滿面笑 揚脩見幼婦 一藍便知妙 인용한 시는 원시와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뜻에 큰 차이가 없다. 賢자가 士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어리석은 중생은 한산의 시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여 비방할 것이나 진리의 눈을 뜬 지혜 있는 사람은 한 번 보면 척 이해 할 것이라는 점은 옛고사를 들어 말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삼국시대 曹操가 楊脩와 함께 강남에 이르러 曹娥의 비를 읽고 뜻을 몰라 양수에게 묻자 양수는 바로 알고 대답하였던 것으로 뛰어난 사람은 한산 자신의 시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圓鑑國師 沖止가 그의 시에 寒山詩를 인용하고 있음을 볼때 寒山詩가 선가에서는 많이 애송되었을 것이라고 짐작 되고 있다. 충지의「又作十二頌呈似」란 연작중 起句를 寒山詩 50번 절구를 따오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를 볼 때 寒山詩의 영향 또한 상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달로 비유된 마음은 달처럼 분별 없이 만물에 통해 있다. 그리고 이때의 마음은 무애자재한 불심이다. <吾心似秋月>의 일구만이 아니라 전체의 시상이 寒山詩의 그것과 동일하다. 고 보여진다. 이 시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寒山詩와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이 寒山시는 일찍부터 선가에서 읽혀져 왔고 애독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자취가 사찰에 아직도 남아 있으니 제방의 선원에 주련으로 寒山詩가 걸려 있는 것도 이런 자취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寒山詩와 沖止詩와는 매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같이 충지에 이르러 대중과 더불어 깊이 호흡을 하고 살아있는 민중의 삶 속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일종의 속화로 비판적 시각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긍정적인 점은 많이 있다고 보여진다. 충지는 普照禪의 전승자이면서 동시에 매우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 그 밖에 일반 문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얼마나 많이 읽히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고려시대의 崔滋는 그의 시론집 『補閑集』下에서 詩僧 無己의 시를 인용하고 평하는 가운데“말은 성긴듯 하나 붙인 뜻이 깊은 바 거의 寒山과 拾得의 무리가 아니던가”라고 하고 있어 당시 佛敎시단에 寒山詩가 널리 읽혔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韓國 禪文學의 금자탑은 역시『禪門拈頌』이 될 것이다.『禪門拈頌』은 혜심이 그의 제자 覺雲등과 함께 禪書의 公案을 망라하여 총 1125則을 수록한 선서로 중국의 어떤 선서보다도 방대한 것이다.『禪門拈頌』이 선가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다.『禪門拈頌』의 대부분은 인도와 중국의 선사들이 차지하고 있으나 그 26권에는 신라의 泊암和尙, 大嶺和尙, 雲住和尙 등 3명의 고승의 語錄을 싣고 있기도 하다. 염송은 고려조의 禪思想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諸家의 語錄과 관련하여 讚, 頌, 偈, 詩 등이 당시의 禪詩의 발흥에 직접 작용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후대에 주석서로 覺雲의『禪門拈頌說話』, 一然의『禪門拈頌事苑』, 有一의 『禪門拈頌看病』, 義沼의『禪門拈頌記』, 白坡亘旋의『禪門拈頌私記』가 있다. 선사들에게서 문집을 만드는 것이 대단히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佛敎文學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렇한 전통은 멀리 중국 선가의 語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여진다. 韓國에 선종의 수입되던 신라말에서부터 문집의 편찬은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때 많은 선적이 들어오고 禪詩와 禪詩論이 소개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많은 선승들이 직접 중국에 가서 공부를 했던만큼 이 때부터 禪詩가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 전하는 문헌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당시의 선종이 오랫동안 안정된 교단을 유지하지 못했던 관계로 禪詩의 창작이 그렇게 왕성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禪詩의 발흥과 전개는 麗朝 중엽 知訥의 조계종 개창 이후, 지눌의 禪思想에 그 정신적 모태를 두고 전개되었던 慧諶의 禪詩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전술한『禪門拈頌』이란 역대 禪文學의 총서를 엮어냄으로써 禪詩의 발흥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이렇게 그에 의해 발흥된 禪詩文學은 당시 修禪社를 중심으로 圓鑑, 一然 등으로 이어지고, 여말에 와서 景閑, 太古, 懶翁 등으로 발전되며, 조선조를 거쳐 현대시에까지 이어짐으로써 韓國 禪詩文學의 원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 전통속에서 眞覺國師의『禪門拈頌』은 禪文學의 전통을 세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고려 시대부터 선가의 詩文學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많은 문집들이 나오고 朝鮮朝에 들어오면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누구나 문집을 내게 되고 문집의 많은 부분은 시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 이런 분위기에서 자연히 禪文學은 성숙하게 되었다. 그래서 뛰어난 禪詩人들이 선가에서 나오게 된다. 고려조의 眞覺 慧諶, 沖止, 一然, 太古 普愚, 懶翁 慧勤, 白雲 景閑을 비롯하여 조선조에 넘어와서는 훨씬 활발한 禪文學이 이루어진다. 이런 속에서 寒山과의 인연은 많이 있었으리라 짐작 되지만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 매우 적다. 조선조에 나온 스님들의 문집의 대부분이 시집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그만큼 시가 불가의 스님들에게 보편화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할 수는 없다고 보여진다. 조선조의 정치 사회는 문치주의로서 누구나 시를 교양으로 갖춰야 하는 풍토였으며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스님들도 다투어 시를 짓고 문집을 만들고 출판을 하였던 것이다. 『韓國佛敎全書』를 살펴보면 조선조 때 寒山詩를 모방하여 쓴 시작품이 약간 보인다. 다음은 드문 자료 중에 寒山詩를 모방한 시가 있어 소개한다. 조선 후기의 好隱有璣의 『新編普勸文』에 들어 있는 것으로 寒山, 拾得, 慈受和尙에 시를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시의 출처는『三聖集』이다. 有璣(1707-1785)스님의 호는 好隱, 雲客, 海峰이라고 하며 16세에 출가하여 학문을 닦았고 해인사 사적비를 짓기도 했다. 79세에 입적하니 법랍 63년이다. 저서로는『好隱集』4권이 있다고『李朝佛敎』,『朝鮮圖書解題』에 해설하고 있다. 다음 시는 그가 한산자와 습득과 자수를 위해 써서 바친 시이다. 寒山子詩 岩前獨靜坐 圓月當天耀 萬象影現中 一輪本無照 廓然神自淸 含虛洞玄妙 因指見其月 月是心樞要 拾得子詩 君見月光明 照燭四天下 圓暉掛太虛 瑩淨能蕭灑 人道有虧盈 我見無衰謝 狀似摩尼珠 光明無晝夜 慈受和尙詩 不貪以爲寶 日用無欠少 一구聊禦寒 百味無過飽 堪嗟塵世人 經營長擾擾 衣底摩尼珠 光明都昧了 위 시는 寒山詩를 본 떠서 지은 것으로 寒山詩가 적지 않게 조선 새대에도 선가에서 많이 읽혔음을 말하여 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豊干이 빠지고 대신 慈受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자수의 시가 상당히 중요시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봉은사 판본에도 자수의 擬寒山詩가 부록으로 판각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자료적인 의미로서는 봉은사 판본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봉은사본은 현재 가장 보편화된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奉恩寺本『寒山子詩集』은 寒山詩集중에 비교적 많은 시를 수록하고 있으며 특히 寒山詩를 본뜬 慈受懷深의 시를 싣고 있어 매우 주목되고 있다. 여러 선사의 擬寒山詩가 있지만 봉은사본에서 慈受懷深의 시를 싣고 있음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모두 148수의 시가 실려 있다. 현대시에 와서도 寒山詩의 전통은 살아 있으니 趙芝薰은 그러한 자연주의와 선의 전통을 잘 물려 받고 있는 편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에 佛敎文學에 흐르는 寒山의 영향은 자연주의적 禪文學의 경향에 있어서 매우 깊다고 하겠다. 韓國의 佛敎文學 그리고 禪詩의 흐름과 한산시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중요한 분야로서 좀 더 충실한 앞으로의 硏究를 요한다. 특히 眞覺國師와 寒山詩와의 관계가 밀접하게 맺어져 있음을 살펴보는 것은 기회를 달리 하여 연구하도록 하겠다. 3. 日 本 日本에서의 寒山詩는 일찍부터 읽혀졌다고 보여진다. 현존하는 寒山詩의 最古本이 역시 일본 宮內廳書陵部에 소장되어 있으며 많은 주석서가 있음을 볼 때 寒山詩가 얼마나 널리 애송되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오래 된 寒山詩 주석서는 3가지가 있다. 이는 모두 江戶時代에 제작된 것이다. 『寒山詩管解』 7권 交易 1671년 『寒山詩闡提記聞』 3권 白隱 1741년 『寒山詩索색』 3권 大鼎 1814년 이 모두 선승에 의해 이루어진 주석서이다. 이 중에 선가의 입장에서 가장 잘 寒山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白隱의『寒山詩闡提記聞』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비교적 시의 고증이 충실하고 상세하게 되어 있으며 선가의 입장에서 여러가지의 사례를 들어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入矢義高도 여러가지 자료적 사실성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白隱의『寒山詩闡提記聞』3권은 선가의 寒山詩觀을 잘 엿볼수 있는 자료로서 白隱이 佛典을 끌어다 禪義를 설하였는데 상세하고 세밀하며 솔직하게 해석하고 있다. 때로는 시귀의 해석에 무리함도 보이나 훌륭한 해석을 위해 노력한 어귀도 많다. 주석서로 가장 괄목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白隱(1685-1768)은 江戶시대의 선승으로 15세에 출가하였다. 24세 때 越後의 英巖寺에서 철야로 좌선하고 있을 때 먼 절의 종소리를 듣고 견성하였다. 信州의 正受老人 아래에서 眞參實修하던중 하루는 성 아래에서 탁발하다가 철저하게 大悟하였다. 42세 때 어느 날 밤에『法華經』읽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正受老人 평생의 受用을 徹見하였다. 이 후 正受를 嗣法하고 松蔭寺를 중심하여 사부대중을 접화하니 일본 臨濟宗의 中興祖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저서로는 위에 든『寒山詩闡提記聞』외에『毒語心經』,『息耕錄開筵普說』,『槐安國語』,『荊叢毒蘂』,『普 鑑貽照』등 한문으로 된 것을 비롯하여 일본어로 된『坐禪和讚』,『遠羅天釜』,『夜船閑話』,『藪柑子』,『於仁安佐美』등 무수히 많은 것이 놀랍다. 그가 한평생 주석하였던 松蔭寺는 무척 가난하여 몰려오는 대중을 다 수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의 事績으로는 독자의 公案체계를 확립하고 방대한 저술로 일본의 禪宗文學의 일대 금자탑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白隱의 寒山詩에 관한 평론서는 일본 禪文學의 백미라 할 수 있으며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에서 지어진 위와 같은 주석서들이 모두 江戶시대의 것이며 또한 선승의 저술이다. 寒山詩의 영향은 시인이며 탁발승으로 살아갔던 良寬에게도 寒山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세상을 초월하고 깊이 은둔한 삶과 시의 세계는 寒山과 같은 맥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明治 이후에도 여러 종류의 주석서가 보이고 있다. 일본인은 오래전부터 寒山의 像을 남화풍의 세계로 만들어 두고 있다. 寒山詩의 세계는 일본 주석가들에 의해 종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선적 경지를 이끌어 이해하고져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禪佛敎의 기본 정신은 道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기본태도는 붓다의 근본으로 돌아감에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일관된 순수한 선의 수행정신을 바탕으로『正法眼藏』을 통하여 한결같이 일생을 일관되게 살아간 수행승이 바로 道元禪師이다. 道元의『正法眼藏』「坐禪儀」에서 坐禪은 習禪이 아니라 대안락의 법문인 것이며, 不汚染의 修證인 것이다. 일본 禪文學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형식은 俳句라고 할 수 있다. 俳句는 가장 일본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매우 간결한 형식을 갖고 있는 시이다. 하이꾸에서 드러내는 자연과 삶의 직절한 표현의 완결미는 선의 直觀的 세계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俳句는 禪文學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하이꾸의 명인이라고 불리는 芭蕉에서도 寒山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하이꾸 중에 이 길이여 가는 사람도 없이 저무는 가을 라는 귀절은 寒山詩중 <寒山更深好 無人行此道> 라는 귀절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이꾸의 명인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로 一休를 들 수 있다. 그 또한 선승이며 시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寒山의 禪詩는 일본의 禪文學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문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4. 美 國 근래에는 미국에서도 寒山詩가 상당히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다. 이제까지 미국에서 寒山詩는 모두 세번 번역 되었으나 전부 완전 번역은 아니고 부분 번역이다. 세 번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Arthur Walay, 27수, Encounter, 1954. Gary Snyder, 24 ,Evergreen ,1958. Burton, 1962. 寒山이 미국에서의 대중적 지지를 획득함에 Gary Snyder 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일찌기 일본에 와서 10여년 동안 臨濟宗의 선원에서 참선을 하고 미국에 돌아가 캘리포니아 북부 네바다시 산중에서 암자를 짓고 그 곳에서 참선을 하면서 수행하고 있다.또한 현재 자연환경 보호운동을 벌리고 있기도 하다. 그가 일본에서 참선할 때 寒山詩를 만났던 것이다. 그가 寒山詩를 번역 소개하고 있는 것은 1958년에 Ever Green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개리 스나이더의 소개는 미국의 젊은 이들에게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Beat 세대의 히피족들에게 새로운 정신의 세계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나이더는 상당한 선의 세계를 깔고 시를 쓰고 있다. 그의 번역시를 살펴보면 맨 앞에는 寒山 拾得圖를 소개하고 있으며 寒山詩의 해설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24수의 시를 번역 소개하고 있으며 뒤에는 간략한 주를 달고 있다. 그의 번역시를 1958년에 Evey Green 에 24편과 閭丘胤의 서문을 옮겨 싣고 있다. 그는 한산시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Men ask the way to Cold Mountain Cold Mountain:there's no through trail. In summer, ice doesn't melt The rising sun blurs in swirling fog. How did I make it? My heart's not the same as yours. If your heart was like mine You'd get it and be right here. 9 人問寒山道 寒山路不通 夏天氷未釋 日出露朦朧 似我他由屆 與君心不同 君心若似我 還得到其中 개리 스나이더의 소개에 힘 입어 寒山은 상당히 미국에서 대중성을 얻고 있다 할 수 있다. 미국에 전해진 선은 크게 정통선(square zen)과 비트선(beat zen)으로 나뉘어지는 바 후자는 히피들의 선으로 샌프란 시스코 르네상스에 속하는 비트시를 탄생시키며 본격적인 의미의 서구 禪文學의 발상이 된다. 미국에서의 寒山詩는 Beat 세대와 인연이 많다. 미국의 1950년대 젊은 세대들이 중심이 된 beat세대들은 새로운 문명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웠다. 그래서 그들은 반문명적으로 생활하였고 기존의 형식을 무시하였다. 비트세대라는 말의 뜻은 곧 허위와 가식의 가면을 쓰고 있는 관습적인 사회에 싫증과 역겨움을 느끼고 그러한 사회의 부패하고 상업적인 모든 규범과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소신을 갖게 된 세대를 말 한다. 비트세대가 동양의 禪佛敎 사상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이유의 배경에는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문명의 잘못된 면에 대하여 비트세대들은 문명을 반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고져 하였으며 寒山을 이런 자아회복의 새로운 정신적 스승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트 세대가 禪思想에 그들의 정신적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寒山詩는 이런 점에서 히피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히피들은 寒山을 오해하고 있었다. 히피들은 寒山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고 있었으며 그들은 반 합리적이고 반 문명적 태도를 보이며 마약과 프리섹스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생활태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마약과 환각제는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寒山은 그들에게 매우 잘못 이해되고 있다. 寒山은 신선술을 철저히 비판하는 것과 같이 단을 만들고 특별히 신선도를 술법으로 익히는 것을 부정하고 강력히 비판한다. 이 점을 히피들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랙마운틴파의 긴스버그, 개리 스나이더 등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로 불리는 1950년대 미국의 禪詩는 즉흥적이며 낭독을 위한 쉬운 리듬으로 단순한 즐거움에서 고백한다. 자기들의 노래의 리듬에 몸을 내맡기는 이들 비트닉스(beatnix)들은 아카데믹하며 실증나는 세련됨이 없는 뇌리에 떠오르는 그대로 이루어진 口頭詩로 말이 흐르는 대로 생각이 가는 대로 기록한다. 이들의 목소리의 먼 배후에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이나『金剛經』의‘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자유정신이 있다. 긴스버그의 말처럼‘자기 정신의 신비’가 실제로 일어나는 그대로 시 형식으로 옮긴다. 인습적이며 논리적인 사고 방식과 모든 유의 선입관념을 철저히 배제하는 이들 비트 세대는‘추상성이나 장황한 해설이 없는 구체적이고 순수하게 사물에 접근하는 하이꾸와 같은 정신의 수련을 받고 있다.’ 1960년대 미국의 文學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소비자본주의 전반에 걸친 문화 현상으로서, 이합 핫산(Ihab Hassan)은 그 특징을 세분화 하여 불확정성, 단편성, 탈 정전화, 주체의 상실과 깊이의 상실, 현전의 불가능성과 재현의 불가능성, 아이러니, 혼합성, 축제화, 행위와 참여, 구축성, 내재성으로 나눈다. 지금까지 타자로서만 존재해왔던 동양은 서양의 이성중심주의적 사고 체계와 대비되는 直觀中心主義的 사고 체계로 이제까지 서양의 힘에 의한 지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동양은 왜곡되고 지배의 대상으로서의 동양이 아닌 제 모습을 가진 동양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동양의 사상과 철학이 탈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친 영향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깊고 넓다. 그 중에서도 선의 본체에 대한 頓悟, 자성에 대한 直觀的 자각을 특징으로 하는 바, 우선 선에서는 이성에 의한 추상화와 개념화를 반대하고 구체적인 체험의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있어 중심의 다변화라는 면은 선의 정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과 비트 세대의 정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寒山의 文學的 창작 정신은 강렬한 것이며 불후의 영원성으로 살아남을 것이고 이는 세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명 앞에서 인간과 자연은 무한이 열려져 있고 한산시의 세계 또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여주리라 본다. 5. 寒山詩와 禪畵 다음은 寒山詩와 선화에 대하여 살펴보자. 寒山詩의 선적 예술의 다양한 전개는 특히 미술과도 깊은 관계를 보여준다. 선화는 선종의 예술적 표현의 한 분야로 선과 미술이 만나는 자리에 선화라는 독특한 예술이 탄생한다. 寒山詩는 선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寒山 拾得圖는 선화의 대표적인 화제중 하나가 되고 있다. 寒山 拾得圖는 선화중에 달마도와 더불어 매우 잘 알려진 소재로 꼽을 수 있다. 寒山이 선화 속에서 그림으로 나타날 때 은자의 寒山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모습을 갖게 된다. 이것을 중국 회화에서 주의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고 본다. 선화의 대표적인 것은 達磨圖이다. 달마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신비한 존재로 인상 지워져 있다. 그래서 흔히 선화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선화에서 가장 일반화 된 형식중 하나가 尋牛圖라고 할 수 있다. 宋代에 많이 만들어진 頌古文學에서 깨달음의 과정을 소를 찾는 목동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尋牛圖 혹은 牧牛圖나 十牛圖와 같은 것은 지극히 체계적이고 교묘하게 수행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지식화 고정화 되어버린 느낌을 주며, 이미 선의 본래적 생활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라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十牛圖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이른바 體·用의 사상을 엿볼 수 있으니 宋의 廓庵의 十牛圖등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체와 용은 둘이 아니면서도 하나가 아닌 것이지만 어느 사이에 그것이 직접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로 되고 둘이 아니면서 또한 하나도 아닌 것이 되어 이윽고 절대적인 一者의 생성발전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宋初의 이러한 禪佛敎의 문화적인 체계화와 조직화에 의해서 당대 선종의 뛰어난 사상과 유산으로 새롭게 송대 지식인들의 교양을 풍부하게 하였으며 많은 지식인들이 참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尋牛圖중에 寒山詩와 연관이 있는 楚石 梵琦의 尋牛頌이 있다. 이는 寒山詩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선사이기에 그의 尋牛頌에 나타난 사상을 살펴봄은 寒山詩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필요할 것이다. 寒山拾得圖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현재 寒山寺에 석비로 남아 있는 寒山拾得圖이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가장 낯 익은 寒山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세상의 시비를 다 여의고 근심 걱정을 모두 쉬어버린 은자의 모습을 통해 함께 새겨 있는 시와 같이 寒山의 초탈하며 자재한 세계를 유감 없이 잘 드러내고 있다. 寒山 拾得 두 성인께서 항란시에 이르길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자. 걱정않고 웃는 얼굴 번뇌 적도다. 이 세상 근심일랑 내 얼굴로 바꾸어라. 사람들 근심 걱정 밑도 끝도 없으며 대도는 도리어 기쁨 속에 꽃피네 나라가 잘 되려면 군신이 화합하고 집안이 좋으려면 부자간에 뜻이 맞고 손발이 맞는 곳에 안되는 일 하나 없네 부부간에 웃고 사니 금슬이 좋을시고 주객이 서로 맞아 살맛이 나는구나 상하가 정다우니 기쁨속에 위엄 있네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자. 寒山拾得二聖 降亂時曰 可可可 我若歡顔少煩惱 世間煩惱變歡顔 爲人煩惱終無濟 大道還生歡喜間 國能歡喜君臣合 還喜庭中父子聯 手足多歡刑樹茂 夫妻能喜琴瑟賢 主賓何在堪無喜 上下情歡兮愈嚴 呵呵呵 寒山 拾得圖는 선종화의 화제로 되어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사랑 받고 친근한 위치에 있다. 이러한 한산의 모습은 민간 신앙으로 상당히 신화화 된 모습이라고 보여진다. 이제 한산은 새로운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寒山詩가 후대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中國과 韓國과 日本과 美國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寒山詩는 선가에서 주로 애송되고 많은 독자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선승으로부터 전승되어 寒山詩를 본 딴 禪詩를 낳게 되었다. 韓國에서도 일찍부터 寒山詩가 읽혀져 왔으며 애독되었음은 奉恩寺 판본을 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한산시는 훨씬 많이 읽혀지고 禪文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 미국에도 한산시가 소개 되어 상당한 대중성을 얻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寒山詩가 대중속에 스며드는 데에는 寒山 拾得圖가 단단히 한 몫을 하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음 또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寒山은 文學을 지나서 인간의 보편적 정신세계에 나아가 있다. 이는 동양의 많은 사람들이 일천여년 동안 寒山의 시를 읽고 사랑을 베푼 것은 종교적 정서와 詩文學的 세계에 깊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寒山이 비록 天台山의 깊은 한암에 은거하였으나 그의 정신은 天台山에 갇혀 있지 않고 역사를 관류하여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 줄기 빛이 일천년을 넘어서 天台山에서 세계를 향하여 인류의 영혼에 비춰지고 있다. 고 후세인들은 寒山을 높이 찬탄하고 있다. Ⅷ. 結 論 이상과 같이 寒山의 詩世界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연구 과정에서 한산시를 살피기에 앞서 禪文學의 맥락에 대해서 알아 보았고, 佛敎文學 속에서 어떻게 위치하고 있으며 그 형식적인 여러가지 모습들을 살펴 보았다. 禪文學에서 게송문학과 어록문학과 송고문학은 대단히 중요한 분야라 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다음에 寒山詩의 형성배경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寒山詩의 형성배경에는 물론 사회적 혹은 역사적 배경이 깊이 깔려있다. 현재 한산의 생애를 전해주는 유일한 일차 자료라 할 수 있는 閭丘胤 서문 속에서 한산자가 어떻게 신화화 되는 과정을 거쳤는가도 살펴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로서 豊干과 拾得과의 교유관계이다. 뒷날 이 세사람의 관계는 신화로 윤색되어 불보살의 화현으로 숭앙되기에 이르른다. 아울러 王梵志를 이어 白話詩의 전통 위에 더욱 심화된 모습을 寒山詩는 나타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뒤에 선가의 禪語錄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禪文學의 발전적 방향에 기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불교사상으로서 法華思想이 많이 배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으며 한산이 天台山에 은둔한 사상적 배경으로 중국전통의 은일사상과 맥을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寒山의 禪詩에 대한 분류를 살펴보았다. 禪詩 분류의 문제는 硏究方法論上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일반문학적 입장과 불교문학적 입장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한산시중에 승가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寒山詩의 禪思想에 대하여 알아보고 寒山詩가 가장 성공을 거두고 있는 禪詩에 있어 그 思想의 바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寒山詩의 선사상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南宗禪의 祖師禪 영향을 받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이는 선종이 형성되던 시기에 한산이 살았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맥락에서 寒山은 선과 자연의 어우러짐 속에서 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寒山詩의 가장 빼어난 작품은 바로 이런 부류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寒山詩의 특징으로 格外性을 들어서 살펴보았고 또 선의 언어관과 분석철학의 일상언어와 유사한 언어적 태도를 비교하여 보았다. 半詩 혹은 半格詩의 시적 형식은 寒山詩가 갖는 가장 이채로운 모습이라고 볼 수 있으며 格外的 입장에서 전통적 시형식을 벗어나 半格詩라는 독특한 시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야말로 한산시의 특징에서 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뒤에 선가의 어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구어체 문학의 중요한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寒山詩가 보여주고 있는 특징으로 直觀的 언어의 입장을 들 수 있다. 진리를 파악하는 태도에 있어서 동양의 직관적 태도는 형식논리를 거부하며 어떤 상대적 관념도 배제한 순수직관의 입장을 세우고 있는데 한산의 시는 바로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한산시가 성취하고 있는 선과 시가 일여한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寒山詩가 후대에 어떻게 수 용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선가에서 많이 읽혀져 왔으며 한산시를 본 딴 많은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찌기 고려 때부터 소개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특히 眞覺慧諶과 한산시와의 관계는 매우 긴밀한 영향을 받았음을 그의 어록은 전하고 있다. 眞覺國師는 선종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존재로서『禪門拈頌』은 바로 공안의 집대성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선문학사에서 높이 평가 받을 수 있는 탁월한 작업이다. 眞覺國師와 한산의 관계는 기회를 달리 하여 연구할 과제로 남겨둔다. 일본에서도 오래된 여러가지 주석서를 찾아 볼수 있으며 가장 활발하게 주석서와 평론서들이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白隱의 한산시평은 매우 괄목할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근래에는 미국에도 소개되어 상당히 대중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여러가지의 고찰을 통하여 寒山詩의 진정한 세계와 우리 삶과의 관계를 새롭게 풀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연구 결과 몇가지 특징으로 드러난 것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寒山詩가 성공을 거둔 분야는 특히 선과 관련 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寒山詩의 다양한 세계중에서 禪思想을 바탕으로 한 시적 성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寒山詩가 드러내고 있는 靑山과 白雲의 상징 세계는 體·用 구조라 할 수 있는 바 體用思想은 佛敎的 사상을 바탕한 동양정신의 보편적 세계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寒山이 우리에게 제시하여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조화를 통하여 삶을 이루어 가는 지혜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새로운 문명에 맞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할 때 우리는 體·用의 구조야말로 인간과 자연을 통일시키고 인간의 본래성을 회복시킬 수 있으며 불교의 중도사상에 입각한 가장 훌륭한 매러다임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삶의 지극한 경지가 寒山에 있어서는 任運思想이라고 할 수 있다. 任運思想은 자유자재의 세계며, 절대 해방과 해탈의 걸림 없는 무애자재의 경지인 것이다. 寒山은 이미 신화적인 세계로 싸여 있으며 寒山의 의미는 天台山의 특정한 지명에서 유래된 寒山子를 나타냄과 동시에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마음에 은둔자로서 상징적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寒山은 隱者이면서 禪子이고 詩人이면서 哲人으로 영원히 동양의 정신적인 세계를 표상하며 모든 이에게 살아 있다.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佛敎文學중에서 禪文學 분야이고 그 중에서도 禪詩라고 할 수 있다. 선은 언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나 시는 언어를 떠날 수 없는 입장에 있는데 그러나 역설적으로 禪과 詩가 만나서 이루어내는 세계에 대하여 우리는 새롭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禪詩 역시 살아있는 인간활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고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으로 禪詩의 지향하는 바는 다름 아닌 正法의 회복이라고 하겠다. 내가 보고져 했던 한산시의 세계는 그의 禪文學的 입장이다. 내가 바라보는 寒山의 세계는 寒山의 세계가 보여주는 극히 한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인 해석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寒山詩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禪詩로 연결시켜주고 있는 점에서 매우 훌륭하다. 인간은 결코 자연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일찌기 寒山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생사해탈의 자유로운 경지를 그는 任運의 경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寒山에 대한 이해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의 진정한 정신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다시 인식하지 않으면 않될 것이며 오늘의 현실에서 寒山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寒山은 과거의 존재이면서 늘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존재이기도 하며 寒山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현실적 존재로 만날 때에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는 은둔으로 일생을 숨어 살았으나 결코 역사에 무관심하지 않고 투철한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그의 비판시를 통하여 확인하게 되었다. 본 논문을 통하여 寒山詩의 세계를 일부분이나마 해명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궁국적으로 寒山에 대한 이해는 寒山으로 돌아가 그를 이해해야만 옳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오늘의 나의 시각에서 寒山을 바라보고 잴 때 빠지기 쉬운 문제점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모든 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현재와 과거가 함께 하는 열린 공간이어야 하기에 나의 고정된 자로 寒山을 재단한다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한 태도라고 보여진다. 이는 마치 寒山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몰이해 하였던 오류와 같은 잘못이라고 본다. 이것은 바로 二元論의 함정이라 할 수 있으며 한산시의 靑山과 白雲이 상징하는 것은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는 體·用의 논리이며 體用의 논리는 바로 이런 이원론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靑山과 白雲이 상징하는 바 體·用 의 사상은 동양의 세계인식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寒山의 세계는 무한이 열려져야 할 해석의 지평인 것이다. 寒山의 詩世界를 살펴보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선가에서 애송되는 한산시의 眞面目이 어디에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산이 보여주고 있는 자연과 일여한 경지에서 禪과 詩가 하나로 표출되어 나오는 세계는 바로 다름 아닌 우리들 모두의 心性속에 내재해 있는 영원히 귀의해야 할 보편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靑山과 白雲이 상징하는 표상이며 體·用의 뿌리라고 본다. 參 考 文 獻 原 典 『寒山子詩集』(奉恩寺版). 『寒山子詩集』(四部叢刊集部). 『合訂天台三聖二和詩集』. 『金剛般若波羅密經五家解』 『全唐詩』 8. 『新修大藏經』 4. 『新修大藏經』 48. 『續藏經』117. 『韓國佛敎全書』 5. 『韓國佛敎全書』 6. 『韓國佛敎全書』 9. 『祖堂集』. 『景德傳燈錄』,권22. 『普照全書』(불일출판사,1989). 『古尊塾語錄』. 『嚴羽,滄浪詩話』,藝文印書館. 『莊子』. 『朱子語類』. 著 書 韓 國 葛兆光,『禪宗과 中國文化』,정상홍.임병권역,(동문선,1991). 거해 편역,『법구경』(고려원,1992). 高亨坤,『禪의 世界』(태학사,1971). 金達鎭 譯註,崔東鎬 解說,『寒山詩』(세계사,1991). 金聖坤,『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미국소설』(열음사,1990). 金煐泰,『韓國佛敎史槪說』(經書院,1986). 金容沃,『절차착마대기만성』(통나무,1987). _____,『石濤畵論』(통나무,1992). 金雲學,『佛敎文學의 理論』(일지사,1981). 金學主.李東鄕『中國文學史』(한국방송통신대학,1986). 杜松柏 편저,『부처님 가신 길도 따라가지 않으리라』,조달순 역,(부루칸모로,199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논리철학논고』,이영철 옮김,(천지,1991). 리차드팔머,『解釋學이란 무엇인가』,李翰雨 譯,(문예출판사,1989). 백련선서간행회,『碧巖錄』(장경각,1993). 斯波六郞,『中國文學속의 孤獨感』,尹壽榮 역,(동문선,1991). 徐敬浩 編,『國內中國語文學硏究論著目錄』(정일출판사,1991). 石田端磨,『般若·維摩經의 智慧』,李元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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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ansmission of Buddhism in he poetry of Han Shan, Ph.D.Dissertaion, University of California-Berkeley, 1974. summary A ZEN APPROACH TO THE POETRY OF HAN SHAN by Lee Il Jae (Ja Myung) Department of Buddhism Graduate School Dongguk University Zen literature may be considered of the most important areas of Buddhist literature, while Zen poetry may be regarded as its representive genre. In this respect. Zen poetry is a universal form of Buddhist literature. The origines of Buddhist literature date far back to the time of the Buddha. In his sermons the Buddha combined prose and poetry and used various literary techniques such as metaphor and symbolism. After his death, the Tripitaka and the Twelve Divisions were compiled; thereafter appeared Asvaghosah' Buddhaccarita, the great monument of Indian Buddhist literature. In China, first came a period of translating Buddhist scripture into the Chinese; one may say that Buddhist literature did not appear until the sixth century. There is a very close relationship between Buddhist literature and T'ang culture. T'ang culture may be considered to have been rooted in the Buddhist way of thinking, while T'ang poetry may be regarded as its representative. Zen literature came to flourish since the T'ang period; this had much to do with the cultural climate of the time in which it rose. Through such a historical process, Zen literature gained its firm foundation, and eventually its flowering came about as there appeared many collections of Zen sayings, including The Blue Cliff Record, the foremost book of Zen School, the summit of Zen literature. The meeting of Zen and poetry came with the ascendancy of Zen School during the T'ang dynasty. By then, T'ang poetry had reached its maturity in form, and numerous poets and men of letters were immersed in Buddhist ideas. It was at the time of Hui-neng that Zen School, for the first time since Bodhidharma's arrival from the West, opened a new world in the climate of China. And eventually it bloomed to dominate the whole land, displaying the resplendent legacies of its five schools and seven sects. Han Shan occupies this historical space of Zen tradition, and none can deny him a place among its early masters. His poetry belongs to the early period of Zen literature. Han Shan is a rere hermit poet, of whose life little is known to us. At the age of about thirty, he went into T'ien-T'ai Mountain and lived in a cave called Han-Yen, using Han Shan Tzu as his pseudonym. He would often visit Huo_Ching Temple and collect food from Shih Te, his soulmate. Together with Feng Kan, they were called the Three Holy Men: Han Shan the incarnation of Manjusri, Shih Te the incarnation of Samantabhadra, and Feng Kan the incarnation of Amitabha. Today, there still stands in Kuo-Ching Temple a shrine dedicated to these three men. The dating of Han Shan to around the eighth century seems persuasive. His poetry, both carefree and open-spirited, reveals well the profound world of Zen. For this reason, it has been loved not only within Zen School but also among the general public-unlike the way it has been received by has always remained estranged. Nevertheless, the study of Han Shan has been done mainly in the field of literature; it has rarely attracted the attention of Buddhist scholars. However, the importance of Buddhist literature is not at all small within the field of Buddhist studies, while the place of Han Shan poetry, which opened the early stage of Zen literature, is very important indeed. This thesis consists of eight chapters. The first chapter deals with the purpose, methodology and sources of this study. The second chapter examines the historical veins of Zen literature. In the third chapter I investigate the background of the genesis of Han Shan poetry. In the fourth chapter I make an attempt to classify Han Shan? poems under different types. Classification of Zen poems is one of the important methodological issues facing students of Zen literature. The fifth chapter studies Han Shan's Zen thinking expressed in his poetry. Here I explore the t'i-yung (substance/function) thinking, by analyzing the symbolic structure of green mountain and white cloud. One may say that the t'i-yung relation is a unique paradigm of Eastern thought. T'i and yung are two and one at the same time. The structure of this way of looking at the world opens the new possibility of overcoming the dichotomic way of thinking. The sixth chapter discusses the unique features of Han Shan petry especially from the standpoint of Zen literature. In the seventh chapter I examine the influence of Han Shan poetry on the later generations and its reception by them. I state my conclusion in the eighth chapter. As my text for Han Shan's poems, I have used the Bong-Eun_sa copy, which follows the Kuo Chai Chih-p'u edition. This collection has been translated into Korean by Kim Taljin. Han Shan's poems could see the light of day and have been able to come down to us chiefly thanks to Lu Ch'iu Yin as well as to Tao Ch'iao's, the bonze of Kuo-Ching Temple. Though there remains a question regarding the historicity of his existence, it is said that Lu Ch'iu Yin was the patron who made Tao Ch'iao collect for posterity Han Shan's poems, which had been scattered a 2round in T'ien-Tai Mountain, some written on rocks or trees and some on walls. The preface to Tao Ch'iao, collection has been attributed to Lu Ch'iu Yin. It was Hu Shih who raised certain new, modern issues in his study of Han Shan. Subsequently, numerous articles and monographs have appeared in China, Korea, Japan and America. However, most of these studies have been done from the standpoing of philology, history or literature. In my opinion, the correct understanding of Han Shan poetry cannot be accomplished apart from the study of his Zen world. One may say that Han Shan resided in two poetic worlds. In one group of his poems he is critical or didactic toward society, whereas in the other he is altogether above human civilization, living an ascetic life in nature. These two perspectives define the main currents of Han Shan? poetry. His poetic success seems more evident in the latter group than in the former. One may say that the latter represents the world of Zen literature. The same critical spirit that we find in his attitude toward society makes no exception vis-a-vis the sangha. He sharply criticizes the sangha of his days in order to restore its commitment to monastic life. The spirituality which Han Shan realizes in his Zen poems is amply manifested through his world of absolute freedom and detachment, that is, of the spirit of complete let-go (jen-yun) Han Shan poetry is most successful when he connects man and nature in his Zen poems. On this account, he is not only an excellent poet but also an outstanding Zen man. In my opinion, the importance of Han Shan will become clearer as the study of Zen literature reaches its maturity. Insofar as there exist infinitely many ways open to the understanding of man, there also exist infinitely many paths in the field of Buddhist literature. Insofar as our goal is none other than the understanding of man, I believe, the world of Buddhist literature must also be illuminated ever anew. To come to a new understanding of man through Zen literature and thus return to the right teachings of the Buddha--this is indeed the objective of the present study. -------------------------------------------------------------------------------- E mail; nobul@chollian.net , 1999년 3월 10일 씀, 모든 권한이 노불 자명스님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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