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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산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그 산이름이 유래한 왕사성(라즈기르)의 영축산(독수리 봉우리 이름을 딴산)은 정다움을 넘어 순례자에게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들려준다. 영축산에 머물던 붓다께서 설법도중 한 송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내 보이자 모든 대중이 어리둥절할 때 유일하게 마하가섭(마하카샤파)만은 그 뜻에 응화(應化), 빙그레 웃음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 그 환한 얼굴을 비추었을 그날의 빛이 영상처럼 떠오르고 열락(悅樂)의 세계가 여전히 꽃비를 뿌리는 듯 지금 영축산 독수리 봉엔 오색 깃발이 찬란하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천지의 산능선이 출렁이니 모든 봉우리는 마치 독수리봉을 에워 싸고 둘린 느낌이다.
마침내 붓다의 부촉(咐囑)은 그날 “여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비로소 열린 세상을 향해 꽃내음이 진동할 때 영산회상곡은 산천으로, 삼천대천 세계로 울려 퍼졌으리라. 그런데 오늘 일행을 위해 붓다께서 이곳에서 설한 <법화경>의 중대성을 갈파하던 김영태(金煐泰)박사(불교사상사, 전 동국대교수)님이 우연히도 설법 후 잠시 삼매경에 들어 천상에 나투신 붓다와 불·보살을 친견했노라고 감읍해 한다. 평생 불성(佛性)속에 정진해온 노학자의 오랜 숙원과 간구, 영축산의 가피가 결코 우연만은 아니리라. 사생을 위해 살펴본 산봉우리는 어김없이 독수리 형상을 띠었고 두 날개를 펼친 형국도 산이름에 걸맞다. 산정상엔 설법좌, 즉 여래향실(如來香室)의 기단부를 복원(1903년)했고 이곳에서 출토된 붓다상 및 기타 유물은 나란다 박물관에서 보존중이라 전한다. 무엇보다 붓다가 영축산에서 설한 <법화경>의 ‘견보탑품’ 중 주목되는 내용은 경을 설하는 붓다 앞에 다보여래의 탑이 솟아올랐다는 것과, 경을 설하고 계신 붓다를 탑으로 묘사하여 ‘석가탑’이라 명한 대목에서 경주 불국사의 다보, 석가탑의 유래를 보게 되는 내용이다. 이로써 불국사 뜨락의 이형탑 조성 근거는 명백한 진원을 얻게 된다. 하산 길에 산봉우리 아래 굴은 사리불 존자가 수행했다는 말에 다급히 화첩을 펼치는데 사진엽서를 파는 아이들로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그들은 그림 그리는 나를 처음부터 구매객으로 점찍어 두었기에 어쩔 도리 없이 여러 아이들에게서 다양한 사진을 구했다. 결국 권력의 세계는 허망한 것인가. 타즈마할을 지은 사라한이 아들에 의해 아그라성에 유폐되어 죽어갔듯이 빔비사라왕 또한 그의 아들 아쟈타샤트루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축산을 바라보며 죽어간 감옥터를 찾아간다. 그 감옥터에서 올려다 보이는 칠보산과 영축산 능선에는 자이나교 사원과 일본 사원이 우뚝 솟아 있다. 모두 보란 듯이 산정상을 차지한 사원에 비해 한국의 가람은 사실 얼마나 소박한가. 오로지 산을 둥지로 삼아 숨겨진 알터에서 조용히 향을 사르니 자연과 문화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일행은 이제 온천지로 유명한 데바닷타 석실을 향해 가자 온천 뒤쪽으로 옛날 박칼리라 불리우는 비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불과(佛果)를 증득했다는 바위가 있다. 그의 몸에서 흘린 피가 붉게 물들었다는 ‘피로 얼룩진 바위’를 지나 ‘타포다 나디(Tapoda Nadi)’온천 및 ‘핍팔라 석실(Pippala stone house)’에서 바라보는 왕사성의 전망은 일망무제, 장엄의 극치다. 길을 이어 산을 오르는데 맨발의 소년과 강아지가 길라잡이 되어 앞서서 뛰어 오른다. 또 산길에서 마주친 나무짐을 가득 머리에 인 여인은 거친 손마디에도 온갖 장식과 화려한 색감의 옷을 걸쳤는데 그녀 역시 맨발의 청춘(?)이다.
목적지는 칠엽굴(七葉窟). 반시간여 땀을 씻으며 또 산을 오르자 두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나타나고 조금 비탈길을 내려가자 사진에서 본 칠엽굴이 마침내 드러났다. 이곳은 붓다 입멸 6개월 후, 마하가섭이 500명의 비구를 모아 붓다가 설한 경(經)과 율(律)을 집대성한 최초의 경전결집 장소라고 한다. 즉 불법의 꽃씨를 심은 뜨락이요, 그 꽃을 피운 다음 마침내 민들레 꽃씨가 되어 천지로 날아가게 한 불전(佛典)의 진원지 였음에랴. 예전에는 이곳 동굴 앞에 수백 명의 비구들이 모여 앉을 수 있는 넓은 회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장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다. 그 동안 깊고 넓었던 동굴은 풍화작용으로 굴이 무너져 내렸다. 즉 1939년 인도 고고학국에서 동굴을 실측했을 때만해도 6개의 동굴이 남아 있었고, 동굴 앞 공간은 36.57×10.36m(길이×넓이)나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동굴에서 뒤돌아보자 깎여나간 암반이 벼랑처럼 가파르고 시야는 아득히 허공을 비껴난다. 오늘은 이른 새벽부터 진종일 가야산과 영축산, 그리고 칠엽굴을 찾아 산을 오르내린 피로가 그새 몰려오니 땅거미 짙고 일몰이 잦아드는 시간이다. 하지만 순례의 길은 고단해도 마음은 달뜨는가. 아니 이 무슨 행운의 조화인가. 산길을 돌아서는데 일몰의 붉은 해와 둥글고 흰 낮달이 동서로 조응하며 옛 왕사성 하늘 위에 떠있질 않는가. 결코 환상이 아닌 뚜렷한 풍광속에 모두들 말을 잊고 합장하는 경건한 모습들. 참으로 알 수 없는 은혜요, 뜻 깊은 시절인연이다.
글/사진: 이호신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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