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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인도그림기행] 숭고한 믿음, 초절한 기원의 ‘끌’ 흔적
인도의 수도 뉴델리의 하늘. 그 하늘 아래 대지위의 풍광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지러운 파장으로 번져간다. 고대와 현대의 공존, 유산과 현실의 간극이 극명한 실체감으로 나그네에게도 엄습한다.
고대왕조의 흥망, 13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한 이슬람정권, 그리고 무굴제국의 성쇄, 20세기 영국에 의한 식민지 본부의 도시. 그 흔적은 곳곳에서 병풍처럼 늘어선 중세의 성탑 형상에서 살펴지고 코노트 플레이스(connaught place), 즉 영국인에 의해 설계된 도시계획은 식민지 델리의 역사를 또 다시 바꾸어 놓았다. 방사선 형태의 도로와 주요 건물의 집산은 지도만 보아도 둥근 광장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고 내뿜어져 나오는 만다라식 공간구조로 펼쳐져 있다.
그 지도의 중심 광장에서 차는 남쪽으로 직선으로 내달아 국립박물관 인근에 멈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앞으로 몰려드는 걸인들.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고 “기부미 머니, 기부미 머니”를 외쳐대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가 예전 미군들에게 “헬로우 헬로우” 해야했던 사정이 차마 저러했을까. 인정사정 보지 말라는 경험자들의 충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앞 뒤 가리지 못하는 동행들은 벌써 루삐, 볼펜 등이 손에 들려있다. 간난아이를 꿰찬 젊은 여자, 악기를 앞뒤로 둘러멘 소년의 절규어린 외침. 땟국물 흐르는 맨발의 소녀가 깡통을 찬 어린 동생을 껴안고 손을 내미는 상황이라니.
실로 난감한 현실을 겨우겨우 뚫고 박물관에 이르니 일행 중 자랑스런 효도관광(?)의 노인들 중에는 난생처음 박물관 문턱을 밟아보는 사연인즉, 조국의 국립박물관 경험없이 남의 나라 문화유산을 먼저 접하는 경우이다. 다 이것이 시절 좋은 지구촌 시대이려니. 하지만 자꾸만 헛갈리는 여행길에선 그저 ‘인연’ 하나로 세상일을 긍정, 위안 삼는 얼굴빛이 역력하다. 언제나 찰나와 영겁의 흙먼지를 덮고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들. 기원전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지는 인더스문명의 자취. 간다라 불상과 힌두 사원의 조각과 신상등이 숨막히게 즐비하니 화첩을 든 손은 땀에 젖어 자꾸 미끄러만 진다.
특히 초기 불교 발상지답게 불교조각의 풍부한 형식과 내용을 보여주는, 붓다의 전생과 탄생설화. 그리고 불상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불두(佛頭). 간다라 출토의 불전도 조각의 뛰어난 구성과 솜씨는 실로 호흡을 멈추게 한다. 저 무명으로 남은 장인들의 숨결과 영혼이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진 까닭은 무엇일까. 숭고한 믿음. 경외를 넘어선 초절한 기원은 결코 강제가 아닌 집합의 정신과 결속의 저력이 하나하나 끌을 댄 흔적으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꽃이 피고 지듯 씨앗으로 남긴 인류의 서원, 그 향기가 시간을 거스르는 길이요, 삶의 추구와 대 긍정을 위한 아름다운 열매로서 빛난다.
특별히 여러 신상(神像)의 나라답게 빚어진 에로틱한 신상들의 자태는 눈요기를 더해 주는데 12세기 남부 인도 출토의 ‘춤추는 시바신상’은 더욱 이채롭다. 활활 타오르는 둥근 불꽃 원속에서 4개의 팔을 흔드는 가녀린 손길은 나래치며 가이없고, 요염한 자태에 한발을 든 동세는 청동조각에 생명을 투사한 솜씨로 빛난다. 그 부드러운 발길로 지긋이 악귀를 누르고 선 모습은 나비 날개처럼 뻗힌 머리 장식만큼이나 우화적이며 장식적이다. 엄숙한 신상이라기보다는 장식과 공예 요소가 짙은 작품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사실 신(神)은 때때로 우리를 위해 춤추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빛과 꽃향기를 조건없이 전해 주듯이. 한편 벽화의 이미지를 축소한 세밀회화의 색채와 치밀함은 누구든 잃어버린 시력의 회복을 염원하게 한다.
이렇게 쏜살같이 박물관 기행이 끝나자 모두들 먹먹한 표정,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꿈벅이니 다들 거대한 ‘유산 항아리의 술’에 취한 낮빛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중식을 위해 모여서 차를 타려는데 아까 보았던 걸인들 모두가 두서너 시간을 꼼짝없이 우리 일행들을 기다리며 출입문에 서성거리며 서 있지 않는가. 한 푼의 동냥을 위해 끝끝내 기다려야 하는 저 존재의 처연함. 달라드는 기세는 더욱 필사적인데 한 소녀의 눈빛은 애원을 넘어 마치 구원을 청하는 애절함으로 사람의 심연을 흔든다.
도리 없이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자 소녀는 미소 띠며 성호를 긋고 마침내는 합장을 하더니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마저 흔들어주는게 아닌가. 결국 나그네의 마음못에는 방금 전 과거의 유산 그림자가 어리고 현실의 감회가 파문을 그리며 함께 흔들린다. 하지만 무엇이 ‘가치’이고 ‘진실’한 삶인가를 따지기엔 아직은 너무 모자라고 또 여행중이지 않은가. 결국 가슴에 함께 새기고 묻어야하는 명백한 존재의 흔적들. 저 팽팽한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배우고 현실속의 나를 깨닫는 오늘의 풍경들이 방금 다녀갔다.
절도(絶島)의 삶을 사는 박희진 시인은 ‘회복기의 환자처럼 인생을 살 일이다’고 하였거니와 이 같은 겸허 속에서도 또 오늘에 마주한 ‘현실과 문화유산’ 그 사이에 나는 존재한다.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입니까? 오늘입니다. 내 삶에서 가장 절정의 날은 언제입니까? 오늘입니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날은 언제입니까? 오늘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오늘이고 미래는 다가올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벽암록>
글/사진: 이호신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199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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