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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인도그림기행] 孝의 성지에서 만난 천진 여래
★ 어린 천사여, 초원의 빛이여
상카시아 마을에 도착하자 우리를 반겨준 사람은 오랜지색 승복을 입은 인도스님 몇 분이었다. 일교차 때문인지 모두 털모자를 썼고 매우 반갑다는 표정으로 빛바랜 명함을 나누어 주었다. 쓸쓸한 상카시아 성지를 지켜내는 외로운 스님들.
그러나 잠시 후 마을 아이들이 하나 둘씩 달려오더니 마침내는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형편껏 각양각색의 옷을 입고 일행에게 달려드는 아이들. 그 특유의 큰 눈망울을 굴리며 미지의 나라에서 온 나그네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순수하다 못해 성스럽다. 인간애의 지고선(至高善)인 ‘효(孝)의 성지(聖地)’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붓다의 ‘삼계보도(三階寶道)’, 그 참뜻을 알기나 할까. 아니 모르면 또 어떠리. 천진(天眞)은 성인(聖人)의 품성이요, 여래의 참모습으로 비추어 진다.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다는 것은 진리의 거울을 지닌다는 뜻이다. 참사랑은 천진으로부터 나투는 자비의 행위이다. 따라서 천진한 미소는 흐르는 샘물과도 같이 맑고 순수하다. 그 물은 그윽히 바라보는 이의 마음속으로 흘러든다. 아니 그 크고 맑은 어린 천사의 눈에 나그네가 찍혔다. 마침내 저도 나도 응현(應現)하여 한 마음이 된다.
어린 왕자와 천사들. 그들에 둘러싸여 화첩을 펼치니 붓다가 천상에서 몰고 온 싱그러운 바람과 지상의 흙내음이 함께 일어난다. 인류의 살붙이로서 오늘 만난 인연이 참으로 소중하고 거룩하다. 한때 아프리카 탄자니아 마시아부락에서 만났던 쇠똥마을 아이들의 눈망울, 그리고 그 먼 타국에서 만난 한국교민 2세의 아이들. 그 어린 천사들의 눈빛이 새삼 뜨겁게 마음속에 달아오른다.
무슨 큰 구경거리나 난 것처럼 아이들은 그림 그리는 나를 에워싸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깔깔거린다. 살펴보니 큰 아이가 갓난아이를 업는 모양새는 꼭 박수근 그림(‘아이업은 소녀’)을 닮았다. 어느 분의 시인가 잊어버렸지만 박수근의 ‘아이업은 소녀’ 그림을 보고 쓴 싯귀가 기억난다.
온 종일 아기를 업었다 내려놓으니 그만 내 작은 허리가 없어진것 같아요.
우리의 예전처럼 아마도 저 아이의 부모들은 일터로 나가고, 칭얼대는 아기는 저 어린 천사가 업고서 망연히 들녘을 바라보며 해질녘을 기다리리라. 이처럼 적막하고 심심한 오지마을에 외지인의 발길은 모처럼 새로운 구경거리요, 무료함을 깨는 놀거리로 마을은 생기에 차오르는 것이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어린 천사들과 작별하고 돌아보니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마을입구에 세워둔 버스로 이미 떠난 모양이다.다급한 마음에 화구를 챙겨 길을 재촉하는데 호숫가 들녘에서 한 소녀가 목동이 되어 밀레의 그림처럼 떠 있는게 아닌가.
척박한 토질이 아닌 모처럼의 초원과 아늑한 호수, 그리고 엷은 안개가 잦아든 나무들은 숲을 이루어 환상의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호숫가로 달려가자 풀을 뜯고 있는 동물은 다름 아닌 의외의 돼지들이다. 가축을 방목해 키우는 현실속에 가축과 야생의 경계를 허무는 각별한 느낌이다. 소녀는 염소같은 양을 모느라 고삐를 잡고 씨름하는데 나를 보자 매우 당황하며 수줍어한다. 조금 전 왁자지껄 함께 어울려있던 아이들과는 달리 외딴 호수에 홀로 목동이 되어 초원의 빛에 녹아 떠도는 어린천사. 지평이 넓을 수록 하늘은 끝없이 높아가고 그 천지는 자연스레 호수에 얼굴을 내비친다. 물이 귀한 인도, 아니 물이 성스러운 인도의 삶은 창세기에서부터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태초에 무(無)도 없었고 유(有)도 없었다. 공계(空界)도 없었고 그것을 덮을 하늘도 없었다. 그 무엇이 활동할 수 있었으리? 어디에, 그 누구의 보호아래! 오직 깊고 헤아릴 길이 없는 물은 존재하였도다.(‘리그베다’ 경전에서)
그 깊은 물을 마시며 푸른 빛으로 번져가는 초원. 한가로운 돼지의 팔자가 복되어 보이는데 한 쌍의 까마귀마저 돼지의 등을 타고 놀아난다. 무릇 공생(共生)의 드라마를 저 풍광보다 더 아름답게 빚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무숲은 초원의 바람을 온전히 막아주면서 호수에 실바람을 실어 보낸다. 그 바람의 파문이 햇살을 받아 은물결 되어 잔잔히 번져가는 것을 보노라니 모처럼 나그네의 심회가 한갓지다.
사실 여행은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도, 여정속의 깨달음도 삶의 성찰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한갓져야 하는 것이다. 조용히 풍경속에 점경(點景)되어 무심히 거닐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화첩사생으로 항시 분주한 내게 오늘의 풍광은 긴장속에서 모처럼 해방되게 해준 고마운 선물이다. 무릇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때때로 정화시키는가 보다. 이렇듯 한눈을 파느라 주차장 주변에서 이미 함께한 점심시간을 넘겨 끼니는 건너뛰었지만 다행히 일행과의 합류는 무리가 없었다. 흐르는 시간속에서 작가에게 ‘찰나’와 ‘영겁’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조금 전 내가 만난 순간의 느낌들을 어떻게 마르지 않는 강물속으로, 그 이야기들을 담아 띄워 보낼 수 있을까.
오늘은 다만 나의 연인, 어린천사여! 초원의 빛이여! 그 눈빛속에, 바람속에 잠들고 싶어라.
글/사진: 이호신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199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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