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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불교 성지순례-인도 기행
 
 
  나란다 대학터에서
 
나란다대학
 
 
[인도성지순례]
[인도그림기행] 최초, 최대 불교대학의 유적
     -영겁의 진리 민들레 홀씨되어-



진정한 첨단은 고전과 통하고, 현대성의 획득은 본질 속에 녹아 있어야 함을 묵시적으로 느끼게 하는 나란다(Nalanda) 대학 터, 그 폐허지 위에서의 감회 어린 대화 한 토막. 먼저 스님께서 청하셨다.
“이 화백, 이쪽으로 올라와 사방을 둘러보세요. 저 무너진 기둥 위 감실(龕室) 공간에 모셔진 부처님을 상상해 한번 그려 보세요. 중앙의 스투파 형식 불단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통하는 모서리마다 불보살을 모셨기에 탑돌이 하듯 돌면서 참배할 수 있는 건축형식이 참으로 놀랍지 않나요?”
“네, 스님. 그러고 보니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 효율적인 가람의 형태를 갖춘 모델이 일찍이 이곳에 있었네요.”


‘발명’이 기존의 저항과 새것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라면 ‘발견’은 옛것의 가치를 찾아내고 그 의미를 되새겨 털어내고 닦아서 새롭게 응용하는 지혜가 아닐까.
“다음에는 꼭 건축가를 모시고 와서 함께 보면서 이곳 사원에 대한 설계와 실용미에 대해 상세히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네, 스님. 어떤 현대성을 띤 사찰보다도 아름답고 공간미가 살아나는 최상의 모델을 상상하게 합니다.”
5세기경 세계 최초, 최대의 불교대학이었다는 나란다대학터는 파트나(Patna)의 남동쪽 90km와 라즈기르(Rajgir)의 북쪽 11km에 위치하며 바르가온(Bargaon)마을에 인접해 있었다. 부지는 세로 5km, 가로 11km에 이르는 거대한 유적지로 그 옛날 현장법사가 이곳에 머물 당시 1만명의 학승과 1천5백명의 교수가 있었다니 가히 세계 최대의 대학이었을 것이다. 이른 아침 안개에 휩싸인 나란다 유적은 검붉은 벽돌의 상채기와 폐허의 광경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난다.

우리 신라의 고승 혜업(惠業), 현태(玄太), 현각(玄恪),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스님들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뼈를 묻기도 했다는 기록(의정의 <대당서역 구법 고승전>)은 언제나 순례자들을 감동에 젖게 한다. 선인(先人)들의 발자취를 온 심신으로 호흡하는 순간만은 영겁으로 통하게 마련이기 때문.
눈썹이 유난히 짙고 골격이 큰 미쉬라씨(52세, 나란다 대학 유적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살펴보는 11개의 승원 터와 14개의 사원 터는 대단히 다양한 용도와 독특한 사원 양식으로 눈길을 끈다.
불상을 모신 불단과 스님들의 주거 공간 배치, 우물과 빨래터, 주방과 목욕탕, 그리고 토의와 설법을 위한 터가 돋보인다. 또 승방마다 창문과 함께 감실이 발견되는 것은 늘 수행과 참배가 함께 이루어진 생활공간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예전 현장(玄奬) 스님의 생애를 기록한 혜립(慧立) 스님에 의하면 “이 건물들의 용마루나 대들보는 일곱가지 색깔의 동물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두공(枓控)은 오채(五彩), 기둥은 붉게 단청되어 갖가지 조각을 새겼으며, 초석은 옥(玉)으로 되어 여러 모양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고 전하는바 당시의 화려한 사원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오늘은 무너지고 불탄 흔적의 벽돌을 직시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런데 순간, 쏜살같이 한눈에 들어오는 초록의 생명, 그것은 벽돌 틈에 솟아난 민들레였다. 오, 틀림없이 우리 산과 들에 피어나는 민들레가 아닌가, 대학과 인걸은 자취 없어도 혼불 들은 저 민들레 꽃씨처럼 불광(佛光)이 되어 아시아로, 그리고 세계로 날아갔으니 구법승의 자취는 살아 숨쉬는 것이다.
<인도의 발견>을 쓴 네루수상은 그의 저서에서 “그 당시 나란다에 유학했다는 것은
교양의 증명서 였다. 특정한 기준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나란다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 대학은 졸업후의 연구를 전문으로 하였으며, 중국, 일본, 티베트, 한국, 몽고 등지에서 학승들이 모여 들었다. 인도문화의 해외 보급은 대개 나란다 출신학자들의 업적이었다”고 하니 종교를 떠나 나란다는 최고 명문대학의 권위로 자리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물이 차면 넘치고, 해가 기울면 지는 법. 당시의 하르샤왕 마저도 스스로를 ‘나란다 승원 스님들의 종’으로 자처하며 스님들에게 예우를 다했고, 마을과 농장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을 공양으로 받음으로써 탁발하지 않고 모두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원의 번영과 함께 부작용을 낳게도 하였다. 즉 오늘과 같이 명문대학 출신임을 내세우거나 혹은 허위로 자처하는 자들의 행각이 사회적인 문제와 종단에 폐해를 초래했을 것이다.
한편 기록상으로는 붓다도 이전에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붓다의 제자 목갈라나(Moggalana, 目連) 비구와 사리뿟다(sariputta, 舍利弗) 비구의 출생지 이자 아쇼카대왕(BC 250년경)도 이곳에다 석주와 사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나란다대학은 굽타왕조(5세기)때 건립, 7세기 경에 이르러서는 세계최대 대학으로 발돋움 하였고, 중국의 현장(玄奬), 의정(義淨), 현조(玄照) 그리고 티베트불교의 창시자 상따라끄쉬따, 빠드마 삼바바 스님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무엇보다도 대승불교의 사상적 모태로서 자리했던 나란다 대학은 8세기 이후 탄트라(Tantra : 밀교사상)로 이어졌으나 1199년 무슬림의 침공을 받아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 폐허의 현장을 돌아본 나그네는 쓸쓸한 심정이 되어 박물관과 현장스님 기념관 앞에서 다시금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했다.
참된 진리는 오로지 발견하는 것. 그 진리의 길은 ‘열린 문’과 ‘흐르는 물’처럼 닫히지 않고 걸림이 없어야 하는 것.
지금쯤 나란다에 핀 민들레는 마침내 꽃이 지고, 그 꽃씨가 사방에 흩어지겠지. 그리하여 미지의 세상을 향해 또 날아가겠지….


글/사진: 이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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