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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그림기행] 염원속에 사르는 전단향 -옛것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공덕의 터-
거대한 보리수를 마치 지기(知己)로 마주하고 있는 듯한 수닷타 집터와 앙굴리마라
스투파. 그 언덕 위로 우물터와 연못이 발견된 곳을 둘러보는데 주변은 온통 분주하게 발굴이 진행 중이다. 복원의 역사(役事)가 새로운 역사(歷史)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옛 뜻을 되살려 기필코 오늘에 쓰여야 할일. 가두는 못이 아니라 옛 강이로되 썩지 않고 출렁이며 흘러가는 생명수가 되어야 하리. 자이나교, 힌두 사원을 지나 시야가 툭 트인 외길을 따라 벗어나니 드디어 기원정사에 이른다.
내심 화첩을 낀 나는 예불시간 동안 틈을 내 기원정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밑그림을 그려 화실로 돌아가 지형에 따른 복원도를 구상 중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입구에 들자마자 도면을 파는 아이들이 덤벼들자 생각은 더 간절하다. 승원터는 붓다께서 24하안거를 지냈다는 코삼바쿠티(Kosambakuti)와 당시 7층 건물 규모에 전단향목으로 만든 불상을 모셨다는 간다쿠티(Gandhakuti). 그 향전(香殿)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사의 뜰은 매우 계획적이다. 그 규모가 남북 457m, 동서 152m에 이르는 넓은 뜰엔 특히 거대한 아난다의 보리수와 두개의 탑이 눈길을 끈다. 사연인즉 붓다께서 우기(雨期) 때만 머무시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제자 아난다는 붓다께 성도하신 보드가야의 보리수 묘목을 가져다 심기를 청한바, 이를 허락하자 제자 목갈라야나(목련존자)의 신통으로 마침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사(精舍)안의 지류(池流)는 청정하고 수풀은 무성하여 갖가지 꽃들은 울연히 피어 가관이니, 여기가 이른바 기원정사이다”라고 한 법현 스님(A.D407년)은 “동문 좌우에 높이 70여척(21m)에 이르는 2개의 아쇼카 석주가 세워졌는데 우측에 소, 좌측에는 법륜형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 이후 현장 스님의 순례(A.D 637년)때 까지 여러 차례의 화재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건재했다는 전단향목으로 만든 불상마저도 오늘은 폐허 속에 찾을 길 없으니 세월은 다만 무상할 뿐인저. 쌓인 사연의 키만큼이나 깊은 우물을 들여다 보고 홀로 돌아서 가는데 일행 중 유일한 비구니인 혜윤(慧允) 스님(문경 고선사)과 마주쳤다. 그런데 반겨 주시는 스님은 오늘 따라 더 해맑은 표정이다.
“스님,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란 하늘을 덮는 공덕을 쌓아야 이루어지는 법이라는데 그리되셨으니 참으로 감축드립니다.” “예, 제가 이 기원정사에 와서 아주 실감합니다. 부처님 법 인연에 정말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한국을 떠나올 땐 자그마한 키에 지긋한 연세의 혜윤 스님은 날이 갈 수록 젊어지더니 오늘은 마치 어린아이 처럼 맑고 천진해 보이는게 아닌가. 하여 속내를 밝혔더니 스님은 그새 얼굴을 붉히면서도 환희에 찬 모습이시다. 한편 승방 주변을 노랑, 주황색 승복을 입고 서성이는 인도 스님들. 기후 차에 민감한지 모두 털모자를 썼는데 동자승도 함께 보인다. 그런데 현지 스님 중에는 카스트제도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일종의 가짜 승려가 있어 문제라는 점. 승복만 걸치고 이곳 순례객들에게 생활비를 벌어 우기철에는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이비승이 많다는 것이다.
확인할 길은 없는 풍문 속에 마침내 승원터에 오른 송암 스님(도피안사)의 집전아
래 도반들 모두가 참배에 임하니 가는 구름도 머물고 지저귀던 새들도 숨을 죽인 듯, 예불송의 뜨거운 기운은 온 누리를 향해 번져 나아간다. 지금껏 이토록 절절한 기도의 전율에 휩싸여 본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비장하기까지 한 저 간구의 노래를 어찌 잊으랴. 결국 기원정사 밑그림을 포기한 나는 합장한 도반들의 뒷모습을 화첩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 달이 떠오를 때 까지 끊임없이 지속되는 염원의 광경을 화폭에 담고 싶어졌다. “수닷타 장자여, 위대한 자비 보살이여, 여기 모인 우리는 그대 뜻을 따르리라. 새 인연으로 다시 전단향을 사르리라.” 모두들 상기된 마음으로 정문을 나와서는 기원정사 주변에 세운 한국절, 천축사(天竺寺)를 찾아간다.
길 주변엔 스리랑카, 태국, 일본 절들이 살펴지고 천축사와 벽을 마주한 곳에는 티베트 절이 한창 신축을 서두르고 있다. 반갑게 맞아주는 대인(大忍) 스님, 오랜만에 듣는 처마 아래의 풍경소리. 그 청량하고도 맑은 소리는 단아하면서도 수행자의 기품이 배인 스님 모습에 닿아있다. 집은 사는 이의 향기가 배이는 까닭일까. 법당은 물론 숙식을 위한 방도 깨끗하다. 스님은 무엇보다 현지 인도 스님을 길러내기 위해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목표를 두고 있다고 한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한국 스님 보다는 인도 스님을 통해 불교 발상지의 정통성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일이 인도의 삶과 문화를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란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고, 그 실천을 위해 의지하는 것’ 이라고 볼 때 스님의 방편은 참으로 바람직해 보인다.
남은 생을 마칠 때 까지 이곳 불사에 전념하리라는 스님의 맹서는 인도 전역을 세 차례나 배낭여행한 끝에 얻은 결론으로 필생의 서원이요, 굳은 의지이다. 이에 문득 스님을 통해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의 푸른 달밤, 팔각구층석탑 앞에 조아린 ‘일체중생 희견보살상(一切衆生憙見菩薩像)’을 떠올렸다. 석탑 앞에 지그시 눈을 감고 탑을 향해 공양을 올리는 보살은 무려 1200년 동안이나 몸과 팔을 태우는 소신(燒身) 공양으로 마침내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이 되었다 한다. 비가 오나 눈보라를 맞으나 일체 중생을 위해 형상이 마모될 때까지 온 몸을 사르는 자비의 보살은 아직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아쉬운 이별은 해후의 그 날을 그리워하기로 하고 부디 스님의 뜻과 건강이 청안(淸安)하기를 빌었다. 그런데 스님은 순례의 기념으로 방명을 부탁하니 나그네 또한 붓을 들었다.
‘佛流花開’ 불(법)은 흐르고 꽃은 피네.
글/사진: 이호신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199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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