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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 답사 - 절 터
 
 
  명주 학산리 굴산사터
 
굴산사지
 
 
폐사지 순례

굴산사 당간지주
◇방대한 농경지와 마을이 들어선 명주 학산리 굴산사터. 전성기에는 사찰 당우의 반경이 300m에 이르고 스님들의 수가 2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높이 5.4m의 당간지주(보물 86호).
◇세련된 조각의 부도에서 범일국사의 법향이…
◇범일국사 탄생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석천.
우리나라의 폐사지는 모두 3천2백여 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세상에 알려져 세인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1백여 곳. 나머지 대부분은 아직도 역사의 뒤뜰에 방기된 채 무심한 풀벌레들의 서식지가 되었거나 세월의 그루터기가 되어 삭아가고 있다.
얼마전 강원도 양구군 동면 군부대 작전지역 안에 있는 심곡사 터가 국가소유라고 인정한 대법원 판결은 씁쓸함을 자아낸다. 심곡사 폐사가 6.25 전화(戰火)로 인한 소실이라면 그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보상은 실종된 채, 아예 그 터전마저 국가 소유라는 판결은 재판이 아니라 억지라는 인상이 짙은 것이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헌법의 기본조차 무시한 ‘마왕 파순(波旬)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천년을 대 물려오던 당대의 유산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언제 잃어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폐사지의 존재와 가치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그러나 노선이 분명한 길은 행선지가 멀어도 가야 하고 역사의 행렬은 동행자가 없어도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가는 것이기에 다시 또 부지런히 거친 산하를 향해 길을 떠난다.
영동지방의 마지막 폐사지 탐험으로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堀山寺) 터를 찾아간다. 강릉에서 남서쪽으로 6㎞ 떨어진 학산 마을에 소재한 굴산사 터는 강릉이 왜 독자적인 ‘지방문화의 상징적 도시’로 꼽히는 가를 보여주는 영동지방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이다.
아흔아홉칸 짜리 선교장이나, 오죽헌, 어설픈 낭만으로 경포호반의 정취에 취했다고 해서 강릉의 문화를 접했다고 하면, 그것은 큰 실수다. 해안선에 바짝 붙은 한폭의 ‘세한도’인 한송사터나 내곡동 야산의 ‘가르빙가 둥지’ 같은 신복사터가 아니더라도 굴산사터를 순례해야만 강릉문화의 진수를 접한 포만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산과 강은 영토의 경계를 구분할 뿐만 아니라 문화의 경계를 긋는다. 백두대간의 주릉에 걸터앉은 대관령이 있기에 영동과 영서가 갈라질 수 밖에 없었으며, 강릉과 명주는 대관령을 든든한 ‘지킴이’로 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피해 강릉문화를 고스란히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대관령에서 학의 날개인양 웅장한 산세가 동해를 향해 펼쳐져 있는데, 이 산이 바로 96년 ‘강릉 북한잠수정 침투 사건’ 당시 북한 공작원들이 북으로 도주하던 길목인 매봉산이다. 학산리는 바로 대관령 자락인 이 매봉산 아래 고즈넉히 자리잡은 마을로, 대관령 동편에 이렇듯 큰 평야가 자리잡고 있음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옛부터 ‘놀기 좋은 곳은 성산이요, 살기 좋은 곳은 학산’이라 불릴만치 풍요가 넘치던 학산 마을. 이 마을 전체가 굴산사터다. 가히 통일신라의 5교9산 중 일문을 이루웠던 사굴산파의 본산이 있었을 법한 명당중의 명당이다. 굴산사터의 불교 유적은 전국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는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사방 4천~5천평의 대지에 흩어져 있다. 이 방대한 불사를 일으켰던 범일(梵日 810~889)국사는 도대체 누구이며, 이 대찰이 역사 속에 폐허로 남게된 사정은 또 무엇인가.
범일국사
범일국사는 강릉단오제에서 ‘대관령국사서낭신’으로 추앙받는, 강릉일대에서는 신격화된 존재이다. 속명은 김품일(金品日).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 탑호는 연휘(延徽)라 전한다. 범일국사의 탄생에 얽힌 설화는 매우 실증적이다. 학산리 마을로 진입하는 송림(松林)을 지나 삼거리에는 지금도 석천(石泉)이란 돌우물이 남아 있는데, 옛날 학산 마을 한 처녀가 이 우물에 물길러 왔다가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 속에 계속 해가 떠 있어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처녀는 그 물을 마시고 곧 잉태하여 아기를 낳았는데 아비가 없는 자식이니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아이를 버린 죄책감에 처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튿날 그 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짐승들이 모여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보살피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아이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데려다 키우니, ‘학이 키운 아이’, 그가 곧 범일국사라는 것이다.
범일국사는 15세에 출가하여 흥덕왕 6년(831) 대당 유학 길에 올라 중국 마조선사의 제자인 제안(齊安)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문성왕 6년(844) 계림으로 돌아온 범일은 851년까지 박달산에 머무르다가 문성왕 9년(847) 명주 땅에 들어 굴산사를 창건했다. 굴산사는 명주군왕 김주원 일파의 후원을 받아 크게 선풍을 떨쳤으며, 이후 그는 여기서 40여년 간을 주석하며 서라벌 왕들의 끈질긴 국사 요청에도 불응한 채 낭원(835~930), 행적(832~916) 같은 후학의 지도에 힘쓰니 여기서 사굴산파의 일가가 크게 번성했던 것이다.
범일의 큰 뜻을 닮았음인가. 굴산사터 초입에는 보물제 86호인 높이 5.4m에 이르는 최고의 당간지주가 도도한 세월의 격랑을 거슬러 당당하게 서있다. 보통 건물 3층 높이에 해당하는 그 우람한 자태는 매봉산 산세를 제압하고도 남는다. 여기에 불사나 법회를 알리는 당간(幢竿)이 세워져 펄럭이고 있었다면 아마도 사방 10여리, 대관령 영마루에서도 그 위용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거대한 통돌을 일으켜 세운 범일국사의 통돌같은 진면목을 여기서 발견한다.
신라의 천년 사직을 이끌어 온 사상적 지주였던 불교는 통일 전에는 교종의 5교로, 통일 후에는 선종의 9산으로 전국 도처에 큰 숲을 이루었다. 5교는 경전을 중시했던 교종으로 계율종, 법상종, 열반종, 법성종, 화엄종의 다섯 종파요, 9산은 좌선과 수양을 중시하던 선종으로 가지산, 실상산, 사굴산, 동리산, 사자산, 성주산, 희양산, 봉림산, 수미산의 아홉 선문(禪門)인 것이다. 그 가운데 이 곳 관동에서만 제1문인 가지산파와 제3문인 사굴산파가 위풍당당한 선풍을 드날렸으니, 이 지역이야 말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고대했던 변혁의 발원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변혁의 물길이 샘솟던 석천은 어느새 물이 말랐다. 변혁의 물줄기가 범일국사의 상징이라면 국사의 잉태 설화를 간직한 석천 샘터는 단순한 우물이 아닌 사상의 새암인 것이다. 물길은 이미 말라 ‘해가 담긴 물바가지’는 커녕, 목조차 축일수가 없는데 샘터 머리맡에는 무두불(無頭佛)인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 덧없음에 더욱더 목이 탄다. 굴산사터에서는 모두 3기의 비로자나불상이 발견되었는데, 농토 한가운데 작은 솔숲에 간판을 건 지금의 굴산사 법당에 본존불과 협시불로 모셔져 있고, 그와 짝을 이룬 불상 하나가 지금 이 마른 샘터에서 다시 물길 뚫리기를 갈망하고 있다. 마을 입구 보호각 안에도 투박한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굴산사가 가지는 교리적 의미나, 범일국사의 원력이 바로 비로자나불이 꿈꾸는 만다라 세상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범일국사의 부도(보물 제85호)는 마을의 북쪽 뒷동산에서 마을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부도를 만들 당시부터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굴산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던 가를 다시금 실감케 한다. 범일국사가 입적한 이후, 고려 조에 들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부도 자체의 구조와 조각수법이 빼어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부도 하대석의 구름 조각은 마치 피어오르는 듯 하며 중대석에 조각된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과 공양상의 모습은 뜯어볼수록 아름답고 화려하다. 고승의 열반은 이렇듯 맑고 향기로운 것일까. 탑신을 에워싼 봄 향기가 고승의 법열을 느끼게 한다.
굴산사가 폐사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 광종과 성종 시기에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왕권 강화 정책에 의해 신복사와 함께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1936년 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노출되었을 때 문굴산사(門堀山寺)라는 기왓장이 발견되어 굴산사라는 명칭과 함께 절의 면모를 짐작하게 되었을 뿐, 사찰 당우의 반경이 300m에 이르고 수도 승려가 200여명에 이르며 쌀씻은 물이 동해까지 흘렀다는 굴산사 터는 이제 방대한 농경지로 변해 있다. 옛날에는 범일국사의 우직한 법력이 뭇 중생들의 마음의 양식을 채웠으나, 지금은 그 터전 가득 농토가 되어 농부의 생계를 이어주며 영원 무량한 불문의 대자비를 베풀고 있다.

글: 장지현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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