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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 순례
법기보살 主處, 화엄내력 지닌 사찰
◇소실문화재 남북공동복원의 첫 사례가 될 신계사의 복원을 위한 지표조사가 지난해 11월2~10일 금강산 신계사터에서 실시됐다. 현재 신계사터에는 삼층석탑만이 남아있는데 석탑조차 기단이 깨어지고 화재로 손상을 많이 입었다. 신계사터 발굴조사단이 현장조사전 탑 앞에서 예불하는 모습. ◇신계사는 6·25 한국전쟁때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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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신계사 | | 김유신 등 이곳서 3국통일 발원
폐허위엔 쓰러질듯 3층 석탑만 폐허도 아름다운 산, 그 산이 바로 금강산이다. 산 전체가 하늘의 층계에 분재(盆栽)를 올려놓은 듯 아기자기한데, 그 향기로운 속내마다 세월의 삭정이인 듯 망가진 절터들이 뒹굴고 있으니, 폐허조차 한 폭 ‘꾸밈’으로 들어 앉힌 산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의 격조는 변화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언제 보아도 같은 얼굴인 고정미(美)가 아니라, 철따라, 갈 때마다, 찾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때마다 적절한 미를 연출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골짜기도 봄에 보면 ‘금강’이요, 가을에 보면 ‘풍악’인 것이다. 살아있는 아름다움이 금강의 아름다움이며, 폐허조차 살아있는 폐허가 또한 금강의 폐허인 것이다. 금강의 미를 구경꾼이 아닌, 폐허조차 아름다움으로 탐험하려는 이는 보았을 것이다. 밤 새워 뱃길을 달려 휘청이는 발길을 ‘창터 솔밭’으로 접어들면 이내 종아리가 뻣뻣해 지고 도열한 미인송(松)들처럼 일어서고 싶은 것을. 미인송들의 팔장을 끼고 쉬엄쉬엄 ‘극락고개’를 넘으면 거기 문필봉(文筆峰) 무릎아래 아직도 한 폭의 폐허가 고즈녘히 숨쉬는 것을… 그렇다. 신계사의 폐허는 한떨기의 연꽃이다. 붉은 솔잎 한뜸한뜸 수(繡)를 놓는 비탈 밭 한 가운데 쓰러질 듯 3층석탑만이 빈 꽃대인냥 홀로 서서 완벽한 폐허의 아름다움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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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신계사 | | 금강산의 수많은 폐사지 가운데서도 유독 신계사의 폐허가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유점사나 장안사의 폐허를 아직 상면조차 못한 까닭도 있겠지만 신계사 터만은 다른 폐사지들과 달리 어디선가 마른 연꽃향내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물기조차 말라버린 세월의 밑바닥에 주춧돌만 듬성듬성 드러낸 이 나라 불교 역사의 하상(河床)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원산을 거처 삼일포로 가던, 속초에서 설봉호를 타고 장전항에 하선(下船)하던, 아직은 영신동(靈神洞)이나 선왕목을 거쳐 외낙재령을 넘을 수 없기에 당장은 외금강 입구를 기웃거리며 온정리의 향기인 신계사 터 폐허와 만나야 한다.
금강산이 비록 법기보살의 주처이고 신계사가 화엄(華嚴)의 내력을 지닌 사찰이라고는 하나, 오직 망가진 돌탑 꽃대 하나만을 드리운채 철 되면 뜰 앞 가득 복사꽃을 터트리는 신계사는 분명 고은(高銀) 선생의 말씀대로 상제보살(喪啼菩薩)을 닮았다. 선생은 삼년 전 북녘의 산하를 탐방하면서 이 곳 신계사에 올랐을 때 ‘반야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늘 울기만 한다’는 그 상제보살을 떠올리셨다. 근대의 고승인 스승 효봉(曉峰)스님이 출가한 절로 그 아련한 구도의 체취를 느끼셨으니, 어찌 상제보살의 심정이 되지 않으실 수 있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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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신계사 | | 신계사는 신라 불교의 전래초기인 법흥왕 6년 (519년) 보운조사(普雲祖師)가 창건한 고찰이다. 1951년 6월24일 미공군의 폭격으로 전소되기 까지 역사의 구비마다 피고지며 이 나라 민중들에게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부처님의 법음을 함께 전해왔다.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기 무섭게 보운조사는 신라 영토의 최북단인 이곳까지 올라와 신계사를 창건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신계사는 예나 지금이나 통일을 발원하는 불자들의 원력을 대물림 하고 있다. 기왓장도 향로도 다 잃어버렸어도 오직 이 전통만이 신계사의 유적인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번 맺은 인연은 결코 쉽게 떨치지 못하는 것이 법계의 정(淨)한 이치이리라. 일찍이 김유신(金庾信)과 그의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이 이 절에 들어 삼국통일을 기원하였고, 고려 초에는 법인국사(法印國師)가 이 절에 들어 후삼국의 진정한 통일을 염원하였으며, 이제는 남북의 불자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민족 재통일의 진원지를 삼고 있으니, 반도의 통일은 어쩌면 금강산 신계사로부터 열리는 것이 이 땅 깊이 숨겨진 통일의 비전(秘傳) 아니겠는가.
신계사의 절 이름은 처음에는 신계사(新溪寺) 였으나 보운조사의 신이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신(神)자로 고쳐 썼다고 한다. 보운조사는 절 옆을 흐르는 신계천의 물고기들이 살생을 피할 수 있도록, 주력(呪力)을 베풀어 모조리 창해(滄海)로 몰아냈는데, 지금도 이 계곡에는 그럴듯한 물고기들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다시 줄지어 저 동해를 헤엄쳐 이 계곡을 오르는 남녘의 물고기 떼들은 또 무엇인가.
세존봉, 관음봉은 찾아올 때마다 그예 마주보며 미소를 짓는다. 1995년 5월 삼일포
를 지나 ‘금강산 려관’에서 일박하며 벚꽃잎 흩날리는 구룡연 계곡
을 바라볼 때도 그러했다. 그 사이 동토(凍土)의 땅에도 해빙의 바람이 불어 신계사 복원을 기원하는 산신제가 열리고, 봉축 연등이 걸리기는 했어도, 신계사의 폐허는 아직도 국보유적 95호의 폐허인 채 그대로이다. 잡석들이 기단이 되어 적막을 떠받친 돌탑의 세월, 의좋게 거느리던 부속암자들, 하나도 그 기별을 듣지 못해도 무성의 한 그 세월, 묵묵히 참아내는 그대로이다. 이 땅의 백성들이 삼재팔난으로 뒤척일 때마다 신계사 역시 운명을 같이하며 역사의 이랑에 피고 지기를 거듭했으니, 지금은 꽃 지고 무상의 열매만 남은 다시 그 때인 것이다.
신계사는 지금까지 서너 차례 소실과 중수를 거듭하였다. 한번 태어나면 나고 죽음이 일여(一如)하여, 상(相)이 있거나 상이 없거나, 그 생명이 영원한 것이 사원의 속성이니, 신계사 또한 그러하여, 망친 이도 되살린 이도 지금은 모두 땅 속에 묻혀 사대(四大)법신으로 신계사를 외호하는 것이다. 신계사를 되살린 이들로는 고려 때의 묘청(妙淸)이 있었고, 조선조에는 뇌운대선사(瀨雲大禪師)와 대은선사(大隱大師) 같은 이들도 있었다. 또 근세에는 대응당(大應堂) 같은 고승이 이 곳에 머물며 화엄의 묘체를 설했으니, 한꺼번에 3천여 신도들의 귀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고려 말 비운의 주인공 정심(淨心)스님 묘청만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니, 그는 이 곳 출신으로 평양천도를 주장하며 민족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고뇌한 사문이었기에 요승(妖僧)이 아닌 시국사범이었음을 유념하고 싶다. 그가 역사에 남기고 싶었던 말들은 무엇일까. 지금도 울창한 저 송림들의 어깨에 주렁주렁 매달린 솔방울들이 그가 남기고 싶은 말들이었을까. 어디 묘청의 사연뿐이랴. 1천5백여 성상을 지나며 이 절을 거쳐간 무수한 운수납자들도 저 솔방울의 수 만큼 헤아릴 수 없으려니, 가로 세로 표식만 남은 대웅전, 극락전 터에도 그들의 남겨진 사리인냥 솔방울들이 함부로 뒹군다. 임진왜란에 이어 한국전쟁 시기에 두 번째로 다시 넘어진 신계사는 그 충격이 얼마나 강했던지 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어서지 못한다.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던 신계사도 이번만은 그 광기의 후유증이 얼마나 지독한지 좀처럼 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소문에 산 넘어 유점사, 장안사도 연이어 넘어진 뒤 무엇이 두려운지 아직까지 일어서지 못한다. 부처님 도량을 멸실하는 것도 4바라이(波羅夷)죄 가운데 하나라고 했던가. 지난해 8월 불교인권위원회 진관스님은 미군들의 이 행위를 범죄 행위로 규정, 배상을 청구하자는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 공허함은 이 땅의 불도량을 지켜내지 못한 불자들에게 자괴감만 더해주는 것이었다. 얼마 전 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은 신계사 터의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복원을 위한 지표조사였기에, 그 조심스런 첫 삽은 통일의 의지를 심는 매우 소중한 작업이었다. 기울어진 돌탑의 문양을 먹물로 찍어내어 배시시 눈뜨는 마애불의 미소를 탁본하며 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 얼룩진 민중들의 상처이며, 그 고통이 부처님의 가피로 치유된 연꽃의 문신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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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사 터 | | 을... 통일의 분위기도, 복원의 의지도 아직은 미덥지 않아 돌아오는 뱃길은 언제나 허전하다. 복원을 위한 지표조사는 비단 무너진 전각들의 사실조사도 중요하지만, 남북 불교간, 당국자간 신뢰 지표조사도 더 없이 중요하지 않을까. 지금 남북(南北)간, 남남(南南) 불자들간 신뢰지표도는 우회하는 공해상의 거리만큼 출렁이고 혼미하다. 그러나 한번 열린 신계사 뱃길은 기어히 열릴 것이다. 연꽃을 향해 벌 나비 춤추듯 뱃길이 아니면 육로로도 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점사 범종도 다시 울리고, 보덕암 쇠기둥에도 새순이 돋으려니, 신계사 마른 돌탑은 또 다시 연꽃으로 만개하여 온정리 큰 마당엔 법기보살 염주알인 듯 팔만사천 솔방울들 흘러내리리라.
글: 장지현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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