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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 순례
◇거북의 모습과 용트림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홍각 선사 비(碑)의 귀부와 이수(보물 제 446호). 없어진 비신의 파편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홍각선사 부도(보물 제447호). 기단부만 남고 상륜부는 없어졌으며, 부도 중대석에 운룡문이 나타나는 최초의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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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귀부 | | 선림원 터로 가기 위해서는 남쪽에선 영동고속도로 속사리재에서 이승복기념관 쪽으로 꺾어들어 운두령을 넘으면 되고, 북쪽으로는 양양에서 오색약수 터 쪽으로 방향을 잡아 논화삼거리를 지나면 되는데, 우리는 이왕 진전사터 방향으로 길을 잡았으니, 56번 국도를 따라 이 길을 택하도록 한다. 논화리에서 우회전, 구절양장으로 몸을 뒤튼 육중한 산세에 압도되어 시오리쯤을 나아가면, 개울가의 억새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부터가 미천골 계곡이다. 기다림에 지친 억새풀들은 인적이 하 그리워 허리가 꺾인 채로, 봉두난발로 지나가는 손님이면 아무나 붙잡고 아는 체를 한다. 행정구역 상으로 양양군 서면 황이리 424번지. ‘하늘 아래 끝 번지’라 불리는 바로 그 동네다. 지도상으로는 태백산맥 줄기의 등고선이 겨울나무의 나이테처럼 빼곡이 에워싼, 양양군 인제군 홍천군 명주군이 살을 맞댄 곳이다. 선림원은 통일신라 시기인 804년(애장왕 5)에 순응(順應)법사가 창건했다. 신라불교의 ‘반역자’ 도의선사가 외설악 둔전리에 와서 진전사를 짓고 선종의 싹을 틔운 것이 821년으로 추정되니, 그보다 한발 앞서 화엄의 계보인 순응스님이 해인사(802년)를 창건한 직후, 무슨 생각에선가 부지런한 발길을 다시 이 곳으로 옮겨 남몰래 초막을 치고 화전을 부쳤던 것이다. 순응스님은 당나라 유학승 출신이면서 일찍이 가야산에 들어 초막을 짓고 도반인 이정(理貞)스님과 함께 수도를 하다가 애장왕 왕비의 등창을 고쳐준 대가로 하사금을 받아 해인사를 창건한 바로 그 인물이다. 순응법사 이후에 선림원에 들어와 사찰을 크게 중수한 사람은 홍각(弘覺)선사(?~886년)이다. 홍각선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사문(鳳林寺門)으로, 가지산파로 이어진 진전사 문중은 아니나, 이무렵 들어 하대 신라불교가 크게 사상적 요동을 치면서 그 와중에 화엄종의 스님들을 대거 선종으로 이적시킨, 실질적인 선림원의 주인인 것이다. 선림원터 한 켠에는 지금도 몸체는 잃어버리고, 탑신과 기단만 남은 홍각선사의 부도와 탑이 용트림을 하고 있다. 선림원터가 폐사지이면서도 유명세를 타는 것은 선림원 그 자체가 이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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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림원지 3층석탑 | | 화엄의 밭을 갈고, 선종의 싹을 가꾼 불교사적으로 독특한 향기를 내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뚝심의 강원도가 새롭게 터득한 시절 방편의 덕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림원 터가 위치한 미천골 계곡 안 쪽에는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1만2천여㏊에 이르는 자연휴양림이 있다. 산림청은 이 심산 오지에 숲 속의 집, 야영장, 산림문화휴양관, 통나무집 등을 지어 물욕에 찌든 도시의 영혼들이 이용료 4-5만원을 주고 찾아들게 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덤으로 무너진 천년 고찰의 풍치를 가슴에 안고 가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또 양양군청에서 여름에는 송이축제, 봄에는 남대천 연어 축제로 부지런히 소문을 내, 입맛 까다로운 외지 사람들이 향토음식인 뚜거리탕을 먹으러 왔다가 토종벌들의 날개짓을 따라 애기똥풀, 마타리꽃 향기에 취해 미천골 계곡 깊숙이까지 흘러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천골 계곡은 한낮인데도 다 저녘때처럼 어둡다. 늦게 떠서 일찍 지는 보폭 좁은 겨울해는 그새 다녀갔는지 얼음으로 미끄러지는 가파른 물길과 골 안의 그늘이 흑백의 조화를 이룬다. 한 때 스님들이 운집했던 전성기에는 아침 저녁 쌀씻은 물이 계곡 가득 흘러넘쳤다 하여 지금도 ‘미천(米川)골’이라 불리는 맑고 투명한 물살이다. 인적이 없을 때는 만월봉(滿月峰 1281m)에 솟는 달을 보고 심심풀이 삼아 짖기도 했을 외딴 집의 개는 일단 외지인이면 경계부터 하고 보는지 민망할 정도로 산중 적막을 깨운다. 이왕 이 골 안에 들어왔으면, 선림원터에 가서 마음을 씻고 가든지, 휴양림에 들어가 몸을 씻고 가든지 둘중의 하나는 하고 가라는 압박이다. 휴양림 안내소에서 우리는 절터로 가는 답사객이라 해도 굳이 휴양림 주차장 이용료 2천원을 내란다. 폐사지 답사에도 돈을 내라니,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이내 축대 위에 자리한 선림원터에 이르자 산초나무 향기가 살속까지 파고들어 모든 번민을 단번에 털어버리게 한다. 험준한 태백산맥 준령인 응복산(1360m) 자락에 바짝 등을 붙이고 일어서려다 그만 힘이 부쳤던지 주저앉은 형국인 선림원터는 무너진 채로 천년을 지났어도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다. 어느 게으른 사문이 산비탈에 모로 누워 긴 잠을 청한 것 같기도 하다. 일대를 다 둘러 보아도 고작 삼천여 평 남짓한데, 절 이름인 선림원에서 보듯 중생들의 기도처가 아닌 스님들의 수도처였기에 굳이 포대화상처럼 몸집만 키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선림원 터에는 형색은 망가졌으나 다가설수록 산중 진품의 향기를 풍기는 네 가지 보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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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림원지 석등 | | 윤생(輪生)하던 녹백색 잎새도 다 떨구고, 줄기도 사윈 채 삼층석탑(보물 제444호)과 석등(보물 제445호) 하나, 그리고 폭포소리같은 할(喝)을 던지던 홍각선사의 탑(보물 제446호)과 부도(보물 제447호) 만이 명약의 향내를 풍기며 소담하게 서 있다. 그저 안타까운 심정이 가슴을 뎅뎅 울리니, 한국 전쟁의 불 길속에 망실된 선림원터 범종이 생각난다. 상원사범종, 봉덕사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신라시대 3대 범종으로 일컬어지던 선림원 범종은 1948년 해방공간의 어지러움 속에 발굴되고 돌보기가 마땅치 않아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때, 퇴각하던 국군에 의해 절과 함께 소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순응법사에 의해 창건 당시의 절의 조성 내력과 연대가 적힌 이 기념비적 보물은 어찌하여 세상에 나왔다가 잘못된 시절인연을 만나 사라지고 말았는지 진한 그리움이 긴 여운을 남긴다. 선림원터는 1985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단에 의하면 금당터의 주초와 유물들이 고스란히 집단적으로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 역시 진전사터처럼 어느 시기에 산사태에 의해 일순간에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유물이 모두 9세기 후반의 것이고, 그 이후 유물이 단 한점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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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림원지 부도 | | 폐사된 후, 한번도 복원된 적이 없어 보인다. 동국대 발굴팀은 선림원이 지형 때문에 강당을 없앤, 전형적인 일탑식 가람임을 밝혔고, 금당터 서북 편에 석등을 앞세운 조사당도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지금 선림원터를 지키고 있는 네 점의 석조유물들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에 복원한 것이다. 동국대 조사단에 의해 원래의 위치에 재복원된 삼층석탑은 언뜻 보기에 진전사터 3층석탑과 매우 유사하지만 그보다 어딘지 중후한 멋과 기품을 풍겨준다. 폐사지의 발굴은 아마도 선림원터처럼 그 존재의 비밀은 최대한 밝히되, 남은 유적들은 정성을 다해 복원을 꾀하고, 원형은 원래대로 보존하는 것이 복원의 순리일 것이다. 현대식으로 성급하고 어설프게 되살리기 보다 있는 그대로 보살피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것이 모든 폐사지에 대한 합당한 예우라 생각된다.
글: 장지현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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