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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지석불좌상 | | 폐사지 순례
◇신복사 터 경내에 보존된 삼층석탑(보물 제87호)과 석불좌상(보물 제84호). 탑을 향해 공양하는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보살좌상의 모습이 매우 정겨우며, 이례적으로 머리위에는 팔각의 지붕돌을 얹어 눈비를 가리고 있다. 사진=고영배 기자 ◇한송사터에서 출토된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 드물게 흰 대리석으로 조각되었다. ◇신복사터 석조보살좌상의 정면 모습. ◇한송사터에서 출토된 기왓장과 돌조각을 봉분처럼 쌓아올렸다. 강릉 길은 언제나 즐겁다. 해발 865m의 대관령을 넘는 적당한 긴장감과 어둠을 헤치고 성긋 솟는 검붉은 일출과 마주치는 설레임은 일탈의 짜릿함을 맛보게 한다. 경주나 부여같은 왕도(王都)가 아니면서도 수많은 문화유적과 독특한 ‘지방문화’를 보듬어온 강릉은 만월(滿月) 그윽한 경포호반 등 빼어난 관동 제일의 자연경관과 더불어 조선의 지성인 사임당 모자와 만고의 연인 허난설헌 같은 정인들의 체취가 서려 있기에 언제 찾아가도 속도조절이 안된다. 강릉은 고대국가인 예(濊)로부터 시작하여, 고조선의 영토가 되었다가, 한사군 시기에는 임둔군이 설치되었고, 다시 고구려시기에는 하슬라라 불렸으며, 세력 다툼 끝에 신라의 영토가 된 이후에는 명주(溟州)로 개칭되었다. 1955년 명주의 중심부인 강릉이 시로 독립되고 1995년에는 명주군이 다시 강릉시로 통합되었으나 강릉과 명주의 구별은 행정구역상의 편리일 뿐 강원 문화의 중심지로 오랫동안 역사의 궤적을 같이하며 독특한 문화적 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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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지3층석탑 | | 를 공유해 왔다. 강릉 지방에 독자적인 ‘지방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시기에 무열왕의 5대손인 김주원이 명주군왕으로 봉해져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김주원은 선덕여왕의 뒤를 잇는 왕권 다툼에서 김경신(원성왕)에게 패해 명주로 밀려난 후 통치권 차원에서 명주군왕으로 봉해졌으며, 보현사, 한송사, 굴산사,신복사 같은 사찰들의 창건을 적극 지원하여 독자적인 정치 및 종교세력을 구축했다. 특히 김주원의 후손으로 이 지역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던 호족 왕순식은 후삼국 제국들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했던 인물로, 왕건을 도와 후백제의 신검군대를 격파하여 고려의 건국에 기여하면서 실질적인 명주의 주인 노릇을 했다. 강릉, 명주 지역에 왕도에 버금가는 불교문화가 깃들었던 배경에는 이렇듯 신라 왕손들이 건설한 ‘강원왕국’이 있었으며, 강릉의 지방문화는 곧 ‘강원왕국’의 불교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강릉시내에는 대창리나 수문리 당간지주처럼 뚜렷한 사지의 흔적은 있으나 사명(寺名)도 사격(寺格)도 짐작할 수 없는 절터들이 더러 있다. ‘강원 왕국’에 의해 크게 선풍을 떨치며, 고려 건국에 사상적 주초가 되었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를 없애는 폐찰정책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가람들이 있으니, 한송사, 신복사, 굴산사 같은 절들이 그렇게 희생된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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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사지석불좌상 | | 한송사(寒松寺)는 남항진 버스 종점 옆 우거진 송림속에 지금도 풍상을 추수리며 세한도(歲寒圖)처럼 걸려있는 폐사다. 절 입구 안내문에 아직도 한송사지가 아닌 한송사라는 절 이름이 그대로 적힌 것은 아마도 옹색한 암자 하나가 한송사 빈터에 슬며시 세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없는 한송사지에 세 들어 있는 것은 비단 움막같은 암자만이 아니라 굴뚝새와 청설모 같은 것도 무단으로 입주해 있다. 폐사지도 한송사쯤 되면 경포 호반의 한폭 세한도가 되어 오가는 일월의 소매를 잡아 당길 것이다. 한송사의 창건과 폐사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문수와 보현에 얽힌 설화가 해풍에 바래 오늘에 전한다. 지혜의 보살인 문수와 자비의 상징인 보현이 천축을 떠나 남섬부주의 인연있는 교화처를 찾아 떠돌다가 사선(四仙)이 노니는 해동의 이곳 남항진에 당도하여 한송사를 지었는데, ‘한 절에 두 보살이 있을 수 없다’하여 보현보살이 활을 쏘아 떨어지는 곳에 절을 짓고 떠나니, 그 절이 곧 대공산성 밑의 보현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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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송사지석불상 | | 조선시대 이곡이 지은 동유기(東遊記)에는 이 절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두 석상이 있었고, 절터 동쪽에는 4기의 비석과 귀부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전성기에는 200여칸에 이르는 대찰이었다는 구전도 전한다. 폐사지에도 봄은 움트는가. 무너져 가는 건물 한 켠에 출토된 기왓장과 돌조각을 선사시대 조개무지처럼 쌓아올린 봉분에 솔숲을 뚫고 내린 햇살이 유난히 맑아 보인다. 정체 모를 짐승들의 발자국이 찍힌 오솔길 주변에도 겨울의 끝자락을 비집고 나온 버들강아지들이 토실토실 살이 붙었다. 한송사 터에서는 두 점의 귀중한 문화재가 출토되었다. 하나는 보물 제81호로 오죽헌 내 강릉 향토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송사터 석불상이며, 또 한점은 국보 제124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이다. 이 두 보살상은 서로 짝을 이루는 것으로 지금은 떨어져 각기 사료관과 박물관에 전시물로 나앉은 신세이지만 한때는 신심 깊은 불제자들에 의해 조석으로 등촉 공양을 받던 복 많은 성보였다. 이 가운데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1912년 일본인 화전웅치가 일본으로 밀반출한 것을 1965년 6월 한일협정에 따라 이듬해 5월 돌려 받은것으로 수난의 민족사와 함께 영욕의 세월을 보낸 소중한 문화재다. 또한 이 석조보살좌상은 여타의 석불상들이 화강암으로 조성된데 비해 특이하게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한층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보여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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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불상 - 한송사 보살좌상 | | 으로 고려시대의 대표적 불상으로 주목된다. 내곡교 건너 동해고속도로 교각 밑 얕으막한 야산에 깃들어 있는 신복사(神福寺) 터는 새둥지처럼 깔끔하고 안온함이 느껴지는 절터이다. 누군가 제대로 돌보는 듯 잘 다듬어진 잔디와 무궁화 울타리에도 바야흐로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청대 숲과 아카시아 나무, 그리고 훤칠한 소나무들이 이중삼중으로 후불탱화의 불보살처럼 둘러선 신복사 터는 이곳이 중생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불도량이었다기 보다 동승(童僧)과 산짐승들이 어울려 뛰놀던 뒷동산처럼 부담을 주지 않는다. 절터로 오르는 산길 옆에는 사임당 어린이집이라는 보육시설이 들어서 있는데, 신복사 당대에도 어쩌면 댕기머리 동네 아이들과 동자승들이 모여 제기차기를 하며 놀았을지도 모른다. 폐사지도 신복사쯤 되면 극락조 가르빙가가 날아들어 한번쯤 미륵 세상을 품었다가 날아갈 일이다.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 범일국사(梵日, 810~889)가 창건하였다. 범일국사는 명주 출신으로 고향인 이곳에 굴산사(847)와 신복사를 연이어 창건하여 신라선종의 최대 산문인 굴산사파를 일으켰으며, 입멸 후에는 대관령의 서낭신이 되어 강릉 일대에서는 신격화된 존재이다. 그는 헌강왕, 경문왕, 정강왕 등이 차례로 국사로 모시고자 청하였으나, 모두 마다하고 40여 년 간 이곳 명주일대에 머물며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으니, 보현사를 창건한 낭원대사(835~930)도 그의 문하에서 공부한 제자였다. 신복사 터에는 볼수록 정겨움을 느끼게 하는 예사롭지 않은 유물 두 점이 다감하게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물 87호인 삼층석탑과 그 탑을 향해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물 제 84호 석불좌상이 그것이다. 왼쪽 무릎을 세운 채 석탑을 향해 꿇어앉은 석불좌상의 얼굴은 부드럽고 복스러우며 입술은 꼭 다물었으나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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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불상 - 한송사 보살좌상 | | 출세간을 떠난 불보살이 시공을 넘어 석탑을 향해 공양하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원히 멈추어서 안될 그 공양은 수인(手印)으로 상징한 그것이었일까. 오로지 바라느니 삼한의 통일이었다면 또 다시 국토가 양분된 지금도 보살의 비원은 차라리 돌이된 채 계속되는 것일까. 신복사터 석불이 다른 석불들과 다른 점은 머리 위에 지붕돌로 얹은 보관이 이례적으로 팔각의 형태를 띈 까닭도 있지만 가슴까지 끌어올린 단정한 지권(智拳)과 석탑을 향해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나도 반듯한 것이다. 불상의 머리 위에 지붕돌을 얹는 양식은 눈이나 비로부터 불상의 손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이는 고려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논산 관촉사나 부여 대조사의 석조보살이 사각 지붕돌을 얹은데 반해 신복사 터 석보살상은 팔각돌을 얹어 단순한 듯 하면서도 평범 속에 함몰되지 않는 관동인들의 소박하고 섬세한 불심을 엿보는 것 같다. 강릉의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백사장의 조약돌처럼 세월의 물결이 수없이 갈고 닦아 이루워낸 것이다. 얼마나 강릉 길을 더 찾아야 마음의 얼룩이 다 빠질 것인가. 업력에 끌리듯 귀로를 재촉하는 대관령 마루턱에는 꽃샘바람에 해산을 미루려는 산동백의 산기(産氣)가 눈부시다. 글: 장지현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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