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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 순례
사방 30리 절터…천년을 保任 삼매에… 13개 건물지·탑지 등 흔적 곳곳에 ‘고달’ ‘원종’ ‘원감’등 고승법향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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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 | | ◇전성기에는 신륵사가 고달사의 입구에 해당할 만큼 사역이 광범했던 여주 고달사터(사적 제38호) 전경. 지난 98년 경기도박물관의 발굴조사에 의해 ‘고달사’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 등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기록에 부합되는 각종 유구와 유물이 발굴되었다. ◇고달사터 중심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생겼다는 평을 듣는 석불대좌(보물 제8호). ◇원감국사 부도탑 옥개석에 새겨져 있는 비천상(飛天像). ◇원감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터 부도(국보 제4호). 규모나 조형미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로 손꼽힌다.
사상 최악의 황사(黃砂)바람 속에서도 여주 고달사(高達寺) 터는 산수유 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고달사 터 산수유 꽃 축제는 축제의 오랜 내력을 말해주는 듯 수없이 회갈색 수피(樹皮)를 벗어던진 밑둥 굵은 산수유 나무들이 무너진 절터의 경계를 따라 일문일가(一門一家)를 이루며 번성해 있었다. 깨진 한 점의 도자기와 같은 고달사. 역사의 중심에 완벽한 모습으로 존재했을 때도 고달사에는 산수유 꽃 문양이 화사했을까. 깨달음의 앞과 뒤에는 산수유 꽃이 제격이라는 듯이 무너져 천년을 보림(保任) 삼매에 잠긴 뒤에도 절터는 온통 산수유 꽃에 뒤덮인 채 봄 신명이 지펴 들썩이고 있었다. 공(空)과 색(色)의 조화가 저토록 아름다운 것일까. 샘물처럼 맑아진 청자빛 하늘에 샛노란 가지를 치켜올린 산수유 꽃이 눈부시다 못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쌀과 도자기의 고장 여주. 여주에는 이 고장의 대명사인 영릉(英陵)과 신륵사가 자리하고 있지만, 실상 그 안쪽 깊숙한 곳에는 대표적 폐사지 가운데 하나인 고달사터가 옛 영화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도시의 한복판을 남북으로 길게 흐르는 여강(驪江)은 이규보가 찾아가 시심(詩心)을 적시고, 나옹선사가 임종의 인연을 만들만큼 수려한 풍광으로 이 고장의 역사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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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 비석 | | 여주 IC에서 내려 명성황후 생가터에 잠시 들러 원혼을 달랜 후, 새로운 여주의 명소인 목아박물관에 들리니 1천2백여 년 전 천하의 명당을 찾아 떠돌다가 이 근처에 이르러 홀홀단신으로 엄청난 불사를 일으켰던 고달(高達)이란 처사가 생각난다. 그도 어쩌면 목아박물관을 일으킨 박찬수 선생처럼 그저 미련하게 망치와 끌 하나만을 들고 숙명적인 싸움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행치고개를 넘어 상교리 마을로 들어서자 벌써부터 산수유 꽃들이 요란하다. 봄에 저리 꽃심지가 환하면 가을엔 또 붉은 열매가 가지마다 타래를 지어 텅 빈 창공을 원색의 만다라로 물들게 하리라.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개산되어 도봉원 희양원과 함께 고려 3대 선원으로 꼽히기까지 변혁기의 역대 제왕들의 비호를 받으며 큼직한 법등(法燈)을 역사의 시공에 내걸었던 고달사가 언제 향화를 멈추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그동안 농토로 변신한 채 숱한 역사의 질문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고달사 터의 수수께끼는 1998년도부터 시작된 경기도박물관 등의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전성기에는 신륵사가 고달사의 입구에 해당할만큼 사역이 광범했고, 창건 무렵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시기로, 남한강의 수로지 배후에 거대한 사원을 건축했다는 설도 있어 <봉은 본말사지>의 고달사가 혜목산(慧目山) 일대 1만2천평에 걸친 ‘사방 30리 절터’의 웅대한 가람이었다는 기록은 가감이 없는 것 같다. 고달사터는 폐사 이후에도 그 살림살이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사지 주변을 에워싼 산수유 군락이 고달사터의 큰 자산이지만 절터 입구에 당간지주 인양 홀로 선 가래나무도 새로 편입시켜야할 고달사의 기본자산이다. 그러나 역시 고달사터 자산은 역사의 숱한 흥망성쇠에도 아랑곳 않고 대물림한 세월의 손때묻은 유형 무형의 삼보정재 아니겠는가. 지난번 발굴조사로 사지 중앙에 위용을 드러낸 석불대좌(보물 제8호)는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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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 원감국사 부도 | | 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생긴 것으로 그 위에 앉아 있던 불상의 모습은 또 어떠했을지 얼른 상상이 가지 않는다. 거기서 서북쪽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종대사(869~958) 부도비(慧眞塔碑 보물제6호)의 귀부(龜趺)와 이수( 首)는 아직도 강렬한 힘을 분출하며 세월의 중량을 이기지 못해 아예 드러누운 향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날카로운 용의 발톱, 눈썹을 치켜올린 부엉이 눈, 콧등의 깊은 주름은 금강살타의 화신으로, 자신들의 부귀영달이나 빌던 지도층 인사들에게 일갈하던 원종대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여기서 다시 산 그늘 쪽으로 10여m 정도 걸음을 옮기면 머리마저 깨져 달아난채 비신도 이수도 잃어버린 작은 귀부 한기가 얌전하게 엎디어 반색을 하는데, 그 몸집이나 표정이 원종대사 부도비와 묘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어서 폐사지 답사의 묘미를 만끽하게 한다.
멀리 솔 능선에 숨어있는 고달사터 부도(국보 제4호)와 원종대사 부도(보물 제7호)는 고달사 터 답사의 절정으로, 역사 탐험의 경험이 부족한 체력으로는 환각상태에 빠질 수 있는 것이기에 뒤로 접어놓고, 우선은 암갈색 유구와 유물들의 흡인력에 끌려 역사의 회랑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방 30리 절터’ 설에 걸맞게 13개의 건물지와 탑지, 석등지, 장대석 및 축대 등이 그 흔적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웅대한 대 가람의 밑그림을 본다. 마치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토분(土粉)을 찍어 바르고 여기저기 봄 햇살 속에 나뒹구는 듯 하다. 누구의 발상이었을까. 절 터 위쪽으로 산수유나무 숲 속에 조그맣게 새로 터를 잡은 법당 마당에는 사지에서 나온 돌멩이와 기와조각, 분청사기 조각들을 꿰어 맞춰 낟가리 같은 돌탑들을 세워 놓았다. 산수유 꽃무덤마냥 그 솜씨가 여간 예쁘지가 않다. 고달사 터는 굵직굵직하게 남은 성보 못지 않게 이 나라 국보급 고승들의 발자취가
즐비하다. 누구보다 먼저 만나야 하는 인물은 ‘고달’이란 석공이다. 고달사 석조물들은 모두 고달이 조성했다는데, 그는 가족들이 굶어죽는 것도 모르고 불사에 혼신을 받쳤다고 한다. 불사를 모두 끝내고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 훗날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었으므로 고달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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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 석불좌 | | 사지 한가운데서 지금도 그 귀부가 용트림을 하는 원종대사 혜진탑비에 의하면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로 고달선원으로 불렸다. 경남 창원에서 봉림선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854~923)는 30여년 가까이 이 곳에 머물며 선풍을 떨치던 고승 원감국사 현욱(?~869)의 법통을 이어 받은 제자였다. 진경대사는 다시 원종대사 찬유에게 법통을 잇게 하였는데, 원종대사는 고달선원의 제3대 정신적 지주로 고려 역대 왕들의 돈독한 귀의를 받으며 고달사를 전국 제일의 사찰로 가꾼 명실상부한 고달사의 중건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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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달사지 원종국사 | |
원종대사의 비범한 흔적은 혜진탑비 말고도 오른편 양지바른 산 골짜기에 유려하고 아름다운 부도로 남아 있다. 혜진탑비와 부도는 대사가 입멸한지 20여년이 지난 975년 경에 세워졌는데 하나같이 원종대사의 법력과 덕망이 응축된 진신사리와도 같은 모습이다. 혜진탑비 비신은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였다고 한다. 원종대사 부도는 할아버지뻘 되는 스승 원감국사 부도를 빼닮은 것으로 고려시대의 불교는 부도의 시대였음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절 터 맨 위쪽 솔 능선에 자리 잡고있는 국보 4호인 고달사터 부도를 친견할 때가 되었다. 이 부도는 원감국사 현욱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장중함과 완벽한 조형미는 전국의 부도 가운데 으뜸자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산 아래 원종대사 부도와 같은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으로 몸돌 중앙에 거북을 두고 구름에 노니는 네 마리 용을 두른 것까지 같지만 세련미와 균형미에서 뜯어볼수록 차이가 느껴진다. 원감국사는 문성왕 2년(84 0)부터 혜목산에 주석, 당대 최고의 선법을 떨친 ‘혜목산 화상’으로 그가 입적하자 경문왕은 원감화상(圓鑑和尙)이란 시호를 내려 공적을 기렸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저마다 승천을 꿈꾸는 이 땅의 이무기 정치인들이 이 산 저 산 찾아다니며 큰스님들의 한두마디 덕담을 듣고 만용을 부려 논밭도 망치고, 가축도 망친다고 야단들이다. 그들이 한번쯤 고달사 터 산문에 든다면 원감, 원종 국사들께서는 무슨 법문을 내리실까. 길옆이며, 계곡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장대석들이 마냥 편안해 보인다.
글: 장지현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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