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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 순례
산골 강마을 서정 듬뿍‘성보 자연박물관’ 통일신라 홍양사 터 추정…寺名·내력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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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감국사부도 | | 삼층석탑만 제자리, 대승사가 절터 관리
지혜와 자비의 화신들
◇물걸리 절터 보호각속 대좌 하단에 새겨져 있는 다양한 모습의 보살상들.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보호각 안에 보존된 불상들과 불대좌. ◇물걸리 절터는 발견된 문화재의 규모나 주변 산세로 보아 당대에는 홍천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대찰로 보여진다. 그러나 지금은 사명도 불분명한 채 삼층석탑이 외롭게 절터를 지키고 있다.
◇절의 규모를 가늠케 하는 큰 대좌. 깨져있는 것을 한 곳에 모아놓았다. 뫼는 높고 골은 깊어 골 안에 옛 절터가 있는지 아는 이 드물다. 골짜기를 흘러내린 물길은 마을을 에돌아 가축을 살찌우고, 인심을 풍요케 하니 부지런한 드렁칡넝쿨은 이 산 저 산을 타고 넘어 천지간 경계를 허문다. 고요만 덧쌓인 불대좌 앞에 살포시 앉은 밀잠자리는 누구의 후신인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치던 선열의 숨결은 길섶마다 붉은 산딸기로 익어 들짐승들처럼 입맛 거친 동심들을 유혹한다. 태백산맥 서사면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악지방 홍천. 홍천은 횡성과 함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동북방 전역에 1천m 이상의 장중한 산봉우리들이 어깨동무를 하여 숨막히고 외진 산골 오지쯤으로 보이나 골안으로 들어서면 듬직한 산그늘 사이로 수심 깊은 강물이 흐른다.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까지 뚫려 험준한 산의 고도를 낮추고, 마을의 지형을 바꾸어 강심(江心)에 노니는 각시붕어 만큼이나 걸출한 인물들이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
얼마 전 월드컵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한 태극전사 가운데 해맑은 동안(童顔)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초롱이 이영표 선수도 이 곳 홍천 출신이고, 작가 전상국씨도 우리가 찾아가는 내촌면 물걸리 사람이다. 그뿐인가. 물걸리 동창마을은 동학혁명당시 북접(北接)의 주역이었던 농민군 800여명이 이곳을 무대로 개벽을 꿈꾸다가 못다한 한을 후세에 전했고, 3·1만세 운동시에는 낫과 호미로 무장한 팔렬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자주독립을 외치던 곳이다. 태백산맥을 넘은 운무의 정기가 집중된, 예사롭지 않은 풍수를 지닌 마을이다.
인제 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을 지나 북한강 청평호와 몸을 섞기 위해 150㎞를 쉬지않고 흘러내리는 홍천강의 옛 이름은 화양강(華陽江). 이 유장한 물길이 있었기에 예로부터 홍천강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수운(水運)이었으며, 그 탓에 내촌면에는 거대한 나루터와 나라의 곡물보관 창고인 동창(東倉)이 있어서 횡성과 더불어 도내에서 가장 물물교환이 번성했던 곳이다. 모름지기 제대로 된 답사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쫓기듯 유적지 한 두 곳만 훌쩍 둘러 볼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내력을 꼼꼼히 챙겨보아야 한다. 유적지 탐사는 관광이 아니라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여행이고 그 시대 민중들의 삶과 정신을 만나는 전생체험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홍천 일원 역시 이름없는 옛 절터 하나만을 불쑥 찾는 것은 쑥스럽기만 하고 그 절터에 스민 역사의 숨결과 토질을 찬찬히 살필 필요가 있다.
횡성군 둔내면에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있고, 홍천군 북방면에는 5~10만년 전 것으로 보이는 중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 북진의 발판으로 삼았기에 서라벌의 불심을 이 곳에 옮겨 희망리 삼층석탑(보물 제79호), 괘석리 4사자삼층석탑(보물 제540호), 희망리 당간지주(보물 제80호)등 불교 유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온 이곳 물걸리에 석조여래조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제 542호), 불대좌(보물 제543호) 불대좌 및 광배(보물 제 544호), 물걸리 삼층석탑(보물 제 545호) 등 ‘성보 자연박물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홍천 지역의 폐사지를 일일이 탐험하기에는 알려진것만을 찾기에도 3~4일은 족할 것이나 홍천 지역 대표적 폐사지이며 한 눈에 사지 탐험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물걸리 절터를 만난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강원도 기념물 47호로 지정된 물걸리 절터는 통일시대 시대의 홍양사(洪陽寺) 터로 추정될뿐 명문이 출토된 바 없어 정확한 사명(寺名)도, 사원의 내력도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따서 ‘홍천 물걸리 절터’라 부르는 것이다. 이름 모를 절터 치고는 그 발굴된 유적들의 규모나 수준면에서 더할수 없는 애증을 불러 일으키기에 물걸리 절터의 한없는 매력을 느낀다. 물걸리 절터야 말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나 깊이 있고 소박한 강원도의 인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물걸리 절터는 발견된 문화재의 규모나 주변 산세로 보아 당대에는 홍천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대찰로 보여진다. 1967년 민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과 1971년 발굴조사에 나온 5점의 보물급 유적들은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이뤘던 통일신라 것 답게 그 규모나 기법면에서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다. 특히 전각으로 옮겨진 4점의 성보들은 하나같이 크기와 규모가 압도적일 뿐 아니라 그 조각솜씨 또한 빼어나 산중에서 이런 장중한 보물들을 만나는데 대해 답사 여행의 포만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큼직한 뽕나무가 유달리 많은 옛 절 터. 망가진 뒤에도 절 살림은 남부럽지가 않아 보인다. 절 터 옆, 몇 줄기 모를 꽂아놓은 무논은 옛날에는 연꽃이 벙글고 수월관음(水月觀音)이 달빛 수의를 끌던 연못이었을성 싶고, 알알이 청포도 익어가는 마을 뒷산은 옛스님네들 108염주 목에 두르고 탁발을 나가는 뒷모습인 듯 싶다. 사지와 사잇길 하나로 경계를 지은 민가 외양간에는 큰 눈을 슴벅이는 농우(農牛)가 빈 집을 지키며 절 터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이 절터에서 유일하게 본래의 절터에서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은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상태가 좋지 않아 1975년 보수를 했는데, 탑재가 화강석임에도 탑 전체가 풍상에 그을린 듯 검푸른 이끼가 올라 있어 오석(烏石)인가 착각할 정도이다. 삼층석탑은 3층의 굽받침 숫자가 4개로 감소하는 것과 증충기단의 탱주가 1개로 감소되고 지붕돌에 반전이 있어 아마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보호각 안에 있는 4점의 유물 역시 석불과 대좌들이 같은 조각 수법으로 조성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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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감국사부도 | | 보아 같은 시기인 9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보호각 안에는 오른쪽부터 불대좌 및 광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조여래좌상, 불대좌가 차례로 안치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노출되었듯 얼굴부분의 윤곽도 나발의 머리칼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다. 그러나 아직도 살결이 두툼하고 결가부좌가 당당한 석불들의 표정을 요모조모 뜯어보면 희미하게나마 도리천을 가르는 가르빙가의 날개짓을 느낄 수가 있다. 누구일까. 시계꽃 한 줌을 뜯어 비로자나불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꽃은 이미 시들었으나 그 향기는 전각 안에 은근히 배어 시들 줄을 모른다. 홍천 물걸리 절터는 현재 대승사(大乘寺)라는 작은 절이 야산 옆에 세워져 보살핌을 받고 있다. 이름도 밝힐 수 없거니와 더 이상 사지가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듯 사지 관리를 전담하는 사원이 조성되어 끊어진 향화도 밝히고 유물도 안전하게 보전하는 것이 바람직한 관리 방법인 것 같다. 얼마 전 다녀온 여주 고달사 터의 원감국사부도(국보 제4호)가 도굴범들에 의해 보개가 훼손되고 탑신도 기울어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소식이다. 마침 성원스님(강화 선원사 주지)이 국회에 폐사지 관리대책 입법을 청원 중이라는데, 조속히 이 법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전국의 유수한 폐사지 성보들의 안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의 얼과 역사가 깃든 문화재들을 동네 이장이나 관계부처 지방공무원에게 맡기는 방식으로는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고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글: 장지현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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