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관리자
중국 불교명소-실크로드여행/참선 여행
 
 
  - 만두 힘으로 박물관에 가다
 
실크로드 기행 / 비단길 여행
 
 
서안의 碑林은 돈황가는 간이역 여행이 순탄하려면 "먹는 일"과 "자는 일"과 "속 비우는 일"이 우선 잘 해결되어야 한다. 다행히 나그네는 어디에서나 불을 끄면 몇 분 이내에 잠에 빠지는 습관이 있고, 음식은 나라에 따라 사정이 조금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적응하는 편이다. 특히 중국은 나그네와 궁합이 잘 맞는 면 요리가 대중적인 음식이므로 어느 지역을 가나 "먹는 일"이 가볍고 편하다. 면 요리를 중국에서는 교자(餃子)라고 부른다. 송나라 때는 교자를 각자(角子), 각아(角兒)라 불렀고, 명나라 때는 분자(粉子), 교자(交子)라고 하였다. 교(交)자는 묵은해와 새해가 교차한다는 뜻인 바, 교자는 중국 북방 지방을 중심으로 춘절(春節)에 먹는 풍속적인 음식물로 자리잡아 왔던 것이고, 현재의 교자(餃子)는 명나라 때의 교자(交子)에서 유래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가죽처럼 질긴 중국만두 다만 교자의 재료가 양자강 북방은 면, 남방은 곡물(쌀)인 것이 다른데, 교자를 먹는 식문화는 중국 어디를 가나 바뀌지 않고 있으니 나그네로서는 "먹는 일"에 관한 한 행운아다. 아침에도 나그네는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또 중국말로 만터우라고 부르는 만두를 다섯 개나 먹었다. 만터우가 너무 질겼으므로 먹었다기보다는 뜯어먹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고, 우리가 먹는 조선 만두와는 달랐다. 우리 것에는 잘게 썬 고기가 들어 있는데, 중국 것에는 속이 빈 밀가루뿐이다. 그러나 나중에 들어 안 상식이지만 중국에서도 빠오즈(包子)라 하여 고기가 든 만두를 교자 가게에서 파는 모양이다.
"만터우가 가죽처럼 질깁니다."
"그게 최상품입니다." 서안만두 종류만 3백가지 부풀리지 않고 많이 다져서 만든 만터우이기 때문에 질길 수밖에 없단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침에 먹은 만두보다 조금 더 질긴 것이었으면 되새김동물처럼 우물우물 씹다가 그만 질려버렸을 것이다. 이러한 만두가 서안의 명물이라고 한다. 만두의 종류가 무려 300여 가지가 된다고 하니 식문화 사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에도 실크로드를 거쳐온 서역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가볍게 하는 데, 비단과 옥 그리고 서안의 만두도 일조했을 것 같다. 돈 많은 대상들을 유혹하는 수단으로 눈요기를 위해 개발한 온갖 만두의 종류도 한몫 거들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현재도 서안에는 다양한 만두를 가지고 성업중인 음식점이 많다. 실제로 300여 가지를 하는 곳은 없지만 풀 코스로 18가지가 나오는 음식점은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18가지라는 말에 기가 질릴 법도 하지만 만두 크기가 손톱만큼 작은 것도 있고 하여 어느 종류 하나 남길 염려는 없고, 18가지의 순서를 기다리면서 그 모양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에 외국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고 있다. 이런 음식 문화에 대한 호기심은 실크로드 상인들이 드나들던 그때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만두의 종류가 무려 300여 가지나 개발되었는지도 모른다. 담과 문을 좋아하는 중국인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섬서성박물관(陝西省博物館).
제비 몇 마리가 허공을 날고 있다. 비록 공해가 심한 서안이지만 서울에서 이미 사라진 제비를 보니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박물관 입구 돌다리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몇 겹의 담과 문을 거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중국 사람들은 유독 담과 문을 선호하는 것 같다. 담을 좋아한다는 것은 외부 세계를 차단하는 방어적인 문화와 기질이 체질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런 문화 속에서 문은 열려 있기보다는 닫혀 있는 기능의 장치이리라. 중국인을 일컬어 의심이 많다고 하는데 겹겹의 담을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번 믿으면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이 또한 중국인이다. 그들의 밑바탕 정서는 "의리와 복수"인 것이다. 섬서성박물관은 원래 비림(碑林)이라 하였다. 글자 그대로 서안의 비들을 숲처럼 모아 놓은 곳이라 하여 비림이라 했던 것이다. 박물관 건물 입구 각(閣)의 현판도 비림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비림 이전에는 공자묘(公子廟)였었다. 송나라의 여대충(呂大忠)과 명, 청대의 문사들이 서안에 흩어져 있던 비들을 공자묘 뒤로 옮겨온 이후 비림이라 부르다가 1954년에 이르러 섬서성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섬서성박물관의 백미 효경비 솔직히 말해서 나그네는 한문에 조예가 깊지 못하므로 비를 보고서도 무덤덤한 느낌이다. 그러나 1실로 들어가는 입구, 비림의 비 중에서 가장 큰 효경비(孝經碑)를 보자 묘한 기분이 든다. 현종이 효경에 대해서 어주(御註)를 한 비인데, 효경(孝經)이란 무엇인가. 공자와 증자가 효도와 관해서 문답한 것을 기록한 유교의 경전 중의 하나가 아닌가. 과연 현종이 무슨 생각으로 효경을 어주했던 했을까. 물론 치국의 근본이 효(孝)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적어도 현종은 효를 말하기 이전에 자식의 아내를 가로챈 임금이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이었다. 그리고 양옥환은 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의 아내였다. 양옥환에게 반한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효도란 부모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하는 것이다."
전제군주의 말은 법이자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칼이다. 현종의 많은 자식끼리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 자신의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 그러니 아내라도 바쳐서 효도라는 미명하에 목숨을 부지하여야 한다. 이게 궁궐에서 살아가는 문법이다. 도덕이란 전제군주의 절대가치가 아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전제군주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니 민중의 눈으로 보면 천하의 불상놈이지만 그는 도덕을 초월한 제왕이다. 아들의 아내를 뺏은 절대군주 수왕은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아내를 바친다. 그러나 그는 효자도 아니고 아내와 사랑을 나눈 지아비의 자격도 없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으로 가장 괴로워했던 인물이 아닐까도 싶다. 결국 그는 변방으로 쫓겨나고, 현종과 양귀비는 황음의 늪에 빠진다. 1실에는 주역, 시경, 논어, 효경, 상서,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이아(爾雅) 등이 석경(石經)으로 새겨져 보관되어 있고, 2실은 구양순, 안진경, 구양통, 저수량, 유공권 등 당(唐) 대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 특징이다. 서체 전시실인 3실에는 예서체로 한(漢)의 조전비(曹全碑), 해서체로 당(唐)의 곽가비(郭家碑), 행서체로 당의 혜견선사비(慧堅禪師碑), 초서체로 당 회소(懷素)의 천자문(千字文), 전서체로 송(宋)의 전서목록편방자원(篆書目錄偏旁字源) 등이 있는데, 그것들 사이에 나그네의 눈에 띄는 것은 대나무 그림이 검은 바위에 음각되어 있는 비이다. 대나무가 알려준 관우의 지조 하나는 곧추선 대나무이고 또 하나는 굽은 대나무인데, 관우가 조조에게 잡혀 있을 때 유비에게 보내려고 그린 그림이다. 비록 지금은 조조에게 굽은 대나무처럼 굽히고 있지만 마음은 곧추선 대나무처럼 그렇지 않다는 자신의 지조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런데 조조는 관우의 그림을 휘하의 군사들이 뺏으려 하자 "그까짓 그림을 가지고 무얼 그러느냐"고 유비에게 보내주라고 지시했다고 하며, 대나무 그림을 받아본 유비는 곧 관우의 굽지 않은 마음을 알았다고 전해진다. 여기까지 보는 데도 진이 빠진다. 아침 일찍 만두를 먹고 충전한 에너지가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이다. 사실 실크로드를 거쳐온 문화를 보려면 다음 전시실인 불교조각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북위와 수나라 당나라의 불상들이 전시된 이곳이야말로 돈황의 막고굴로 가기 위한 간이역인 셈이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1
 
 
     
 
주인장 연락처 E-Mail : namo80@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