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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천복사… 의정스님 자취 아쉬워 현장이 육로인 실크로드를 따라서 인도를 다녀왔다면 의정(義淨)은 해로(海路)를 통한 것이 다르다. 의정 또한 많은 경전을 번역한 승려로서 현장의 대를 이었고, 지금도 불교사가들이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바닷길이 트이고 활발해지면서 훗날 사막길인 실크로드가 고립되어 갔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역사이다. 그러나 그 무렵 인도로 가는 주요 통로는 실크로드가 아닐 수 없었다. 소안탑(小雁塔)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서안의 천복사(薦福寺)다. 장안의 중심축이었던 종루(鐘樓)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성안이라면 걸어서도 갈 수 있다. 지금은 승려가 한 명도 없는 곳으로서 절의 고유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지만 당(唐) 때의 천복사는 웅장했었다. 당 고종이 운명하자 백일 후 그의 죽음을 추념하여 지은 절인데, 절의 규모가 크게 번창한 것은 중종 이후였다. 특히 의정(635-713)이 25년만에 인도를 다녀온 뒤, 이곳 역경원에서 68부 290권을 번역하여 현장의 역경 불사(佛事)를 이은 것이다. 이러한 천복사의 장엄을 기리고자 탑을 조성한 것은 의정이 입적한 지 5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천복사에도 707년에 15층의 전탑을 하나 세우고 자은사의 대안탑과 비교된다 하여 속칭 소안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여성미 풍기는 천복사 소안탑 대안탑이 건장한 남성이라면 소안탑은 넉넉한 여성 같은 느낌이다. 탑의 건축미로만 치자면 나그네는 소안탑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탑의 규모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소안탑이 결코 작지 않은 느낌인 것은 완숙함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벽돌로 쌓는 전탑의 형식미에 있어서 대안탑이 직선의 긴장감을 준다면 소안탑은 곡선의 안정감을 주고 있다. 당나라의 벽돌쌓기가 비로소 소안탑에서 완성되고 있지는 않은지 연구해 볼 일이다. 원래는 15층 50여 미터의 탑이 1557년 섬서성을 강타한 지진으로 맨 위 두 개의 층이 파괴되어 지금은 13층 38미터로 낮아진 모습이다. 아직도 두 개의 층은 복원되지 않고 지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절의 기능을 없애고 관광 상품화시킨 것도 씁쓸한 일인데, 탑 끝이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으니 빗물이 스며들게 되면 훗날 완숙한 곡선미를 보이는 저 아름다운 탑신도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나그네가 일찍이 의정을 주목하였던 것은 그가 측천무후에게 올린 <대당서역고승전> 때문이다. 거기에 입축승(入竺僧)들의 간단한 행장이 나오는데, 신라승도 몇 명 나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왕오천축국전>의 혜초만 실크로드를 걸었던 구도승으로만 아는데 그게 아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승려들이 실크로드에 목숨을 내어놓았고 인도에서 의정의 눈에 띈 몇 명의 승려만 겨우 <대당서역고승전>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대당서역고승전>에 나오는 몇 분만 먼저 만나보자. 먼저 신라 출신인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스님의 기록이 눈에 띈다. 스님은 당 태종 정관 년간(627-649)에 장안의 광협(廣脇)을 떠나 인도를 와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교유적을 순례하던 중, 특히 나란타사에서 율(律)과 논(論)을 익히고 여러 불경을 옮겨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란타사에서 칠십여 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는데 다음의 기록도 관심을 끈다. 불경번역은 값진 진리의 열매 "동쪽 끝인 계귀(鷄貴)에서 태어나 서쪽 끝인 용천(龍泉)에서 돌아가셨다.... 계귀는 인도말로 구구타의설라(矩矩 醫說羅)이며 인도 남부의 토속어인 파리어(巴利語)로는 "쿠꾸타이싸라"라고 한다. "구구타"는 닭(鷄)이며 "의설라"는 귀(貴)라는 뜻이다. 즉 고려국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나라(新羅)에서는 닭의 신(神)을 받들어 모시기에 그 날개 깃털을 꼽아 장식으로 삼는다고 한다. 나란타사에 못이 있다. 이를 용천이라 한다. 서방에서는 고려를 가리켜 "구구타의설라"라고 한다." 의정이 과문하여 고려와 신라를 혼동하고 있지만 "날개 깃털을 뽑아 장식으로 삼는다"고 한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닭의 신을 받들었던 흔적을 요즘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음이다. 예전에는 신라의 사신들이 모자에 깃털을 꼽았지만 지금은 무당들이 그들의 모자에 날짐승의 깃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대당서역고승전>에는 혜업(慧業), 현태(玄太), 현각(玄恪) 스님의 이름이 더 등장한다. 그러나 어찌 이 스님들만이 인도를 갔으랴. 의정의 눈에 띄지 않은 수많은 구법승들이 육로인 실크로드나 해로를 통해서 인도로 들어와 아리야발마 스님처럼 율과 논을 배우고 불경을 베껴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으리라. 그러나 대다수 구법승들은 인도에서 입적하였거나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실종되고 만다. '대웅보전'편액 상점간판 둔갑 그러니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와 번역한다는 의미는 천신만고 끝에 수확하는 참으로 값진 진리의 열매이다. 이러한 의정의 정신이 실종된 천복사를 배회하자니 답답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대웅보전이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차라리 "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을 떼어내라고 권유하고 싶다. 대웅보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하고 있는 법당이라는 편액이지 무슨 상점의 간판은 아니지 않은가. 착잡한 심사로 서 있는데 대웅보전의 창으로 소안탑에 걸린 삼진지광(三秦之光)이란 푸른 글씨의 편액이 절묘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러한 감각도 계산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확인할 길은 없다. 소안탑이 온전하게 복원되고 천복사에 다시 승려들이 모여 종을 치게 된다면 그때 다시 나그네는 오고 싶다. 소안탑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탁소리가 없으니 천복사는 잠에 빠진 듯 적적하기만 하다.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오갈 뿐이다. 더욱이 천복사는 혜초 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와 오대산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머물며 밀교의 교리를 후학들에게 가르쳤던 절이 아닌가. 안타깝다. 중국은 지금 자본주의에서 나타난 병폐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절이 관광상품화 되어 돈을 벌어들이는 것보다 수행 도량이 되어 인민들의 정신을 병들지 않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정책이 아닐까. 종교란 이성을 마비시키는 아편이 아니라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백신이기 때문이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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