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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명소-실크로드여행/참선 여행
 
 
  - 이백은 아직도 술 취해 누워 있고
 
실크로드 기행
 
 
시흥 젖은 장안… 죽음도 삶도 내 몰라라
일행은 하루 종일 세미나를 여는 모양이다. 주제를 달리하여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방식인데 나그네는 어느 쪽에도 흥미가 일지 않는다. 하긴 서울을 떠날 때 초면이 대부분인 교수들의 학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온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세미나가 진행되는 여원주점(驪苑酒店)을 빠져 나와 모처럼 개인행동을 취해본다. 일탈이란 까까머리 학생시절이나 사십대 후반이 된 지금이나 변함없이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세미나가 주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니 웬 술타령이냐고 오해할 사람도 있을지 몰라 간략하게 밝힌다. 중국에서는 숙박시설을 반점(飯店)이나 주점(酒店) 혹은 주가(酒家), 빈관(賓館)이라고 한다. "반(飯) 자가 붙어 있다고 해서 음식점, 주(酒) 자를 우리 식으로 해석해서 술집으로 알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모두 다 여관이나 호텔의 중국식 단어이다. 규모가 크면 반점이나 주점 앞에 대(大) 자가 붙기도 한다. 나그네는 대학시절 장안이야말로 "시의 도성"이라고 두시언해를 강의하시던 은사님에게 귀가 닳도록 들은 적이 있다. 시의 신선인 이백(李白,701-762)이 장안에서 3년을 살았고, 시의 성인인 두보(杜甫, 712-770)가 장안에서 10년을 살면서 200여 편의 시를 지었고, 시의 부처인 왕유(王維,699-759)가 장안에서 35년을 살면서 많은 선시(禪詩)를 남겼다고 들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백거이(白居易), 유종원(柳宗元), 이하(李賀), 이상은(李商隱) 같은 대시인들이 절창의 시로서 장안을 빛냈다고도 들었다.

장안은 대시인이 사는 시의 도성


이들의 시들도 장안 밖 구릉지대의 황사처럼 실크로드를 통한 서쪽으로는 돈황으로, 동으로는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됐던 것이다. 서쪽 사람이건 동쪽 사람이건 누각에서 이들의 시 한 수 정도는 흥얼거릴 정도는 돼야 요즘말로 하자면 앞서가는 문화인이었던 것이다. 서안의 거리를 모르니 다 돌아볼 수는 없고, 나그네는 조선족 가이드를 불러 먼저 이백취와상(李白醉臥像)이 있다는 흥경궁공원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무당벌레처럼 빨갛게 생긴 택시를 불러 타고 가는데, 하나같이 다 운전석을 중심으로 쇠창살로 막아 두른 것이 살벌해 보인다. 운전자를 보호하는 장치이겠으나 그만큼 서안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쇠창살이어서 조금은 위축되는 느낌이다. 가이드가 기분을 전환시켜주느라고 그런지 많은 이야기를 한다. 연변에서 서안까지 기차를 타면 60여 시간이 걸린다는 둥, 연변에서는 맞았던 신발이 서안에 도착해 보면 다리가 부어서 들어가지 않는다는 둥, 중국에서 유일하게 연변의 택시만 쇠창살이 없다는 등등의 이야기다. 두보가 살았던 곳까지는 너무 멀어 하루 일정은 잡아야 한다기에 포기하고 대신 나그네가 즐겨 읊조리던 왕유의 시 한편을 떠올려 본다.

현종이 술·꽃·가무 즐긴 흥경궁
봄풀 깔고 선정에 들면
솔바람 소리는 그대로 범패
티끌 하나 날아들지 못하는 이곳
죽음도 삶도 내 몰라라

물론 시차는 있겠지만 왕유는 이런 선시의 경지에서 노닐었고, 현종은 흥경궁(興慶宮)을 짓고 못 가에 침향정(沈香亭)을 세웠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연회를 위한 궁(宮)과 정(亭)이었다. 양귀비를 얻게 된 현종은 봄이 되면 아예 이곳에 눌러 앉는다.

누구라도 당시의 정경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매일 악사와 명창들이 현종과 양귀비 앞에 불려나왔을 것이고, 현종이 탐닉했던 모란꽃이 필 무렵이면 쾌락의 연회는 극에 달했을 터이다.

봄은 현종에게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마약과 같았으리라.

무르익어 가는 봄 속에서 현종은 술과 꽃, 그리고 가무에 빠진다. 그날도 현종은 연회를 시작하였다. 악사들이 좌우로 늘어서고 당대의 명창 이귀년(李龜年)이 노래하기 하기 위해 현종 앞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나섰다. 그러나 현종은 이미 수십 번을 들었던 이귀년의 노래 가사에 식상해 있었다.

"모란을 보고 귀비를 대하고 있는데, 어찌 낡은 가사를 들을까 보냐."

만취한 이태백 단숨에 시3편 지어

신하들이 아무 소리도 못하자 직접 시인을 거명하여 명하였다.

"이백을 불러들이시오."

이때 42세였던 이백은 장안의 한 주루(酒樓)에서 만취해 있었다. 주루는 동문 거리에 있었고, 마침 흥경궁도 동문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백은 이귀년에게 이끌리다시피 하여 침향정으로 올랐다. 부축을 받아 계단을 밟아 오르면서 환관 고역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라고 호령을 하였다.

정자에 오른 이백은 단숨에 세 편의 시를 지어 바쳤다. 이름하여 청평조사(淸平調詞)란 제목의 세 편이다. 그중에서 마지막 편은 이렇다.

어느 것이 사람이고 모란인지
임금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친다.
또 무슨 한이 있을 수 있으랴.
침향정엔 지금 봄이 무르익는다.

아름다움에 있어서 모란과 양귀비는 막상막하다. 몽롱한 탐닉의 순간, 그들에게 무슨 번뇌나 한이 끼여들 수 있겠는가. 이백은 양귀비를 가리켜 경국(傾國)의 여인, 한 나라가 기울만큼의 미인라는 고사까지 동원하였으니 현종은 침향정 난간에 기대어 봄바람에 옷자락을 날리고 있는 그녀가 바로 선녀라고 생각했으리라. 오늘도 이태백은 詩想을 떠올리고 흥경궁공원은 서안의 도심에 있는 휴식처이지만 평일의 낮이어서 그런지 미국인 몇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지나칠 뿐 중국인은 드물다. 입구 분수대에 몇 마리의 용들이 물을 힘차게 뿜어내고 있지만 보아주는 관객 없이 헛심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침향으로 지었다는 침향정은 분수대에서 오른쪽에 있고, 나그네가 정작 만나고 싶은 이백취와상은 침향정 측면 위쪽에 있다. 이백취와상이란 단어그대로 이백이 술에 취한 채 누워서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상(像)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백의 표정은 비록 현종 앞에 불려와 청평조사를 지어 바쳤지만 뭔가 저항하는 시인으로서 자존을 지키고 있는 느낌이다. 고역사의 모함을 받은 후, 현종이 명을 내리자 3년만에 장안을 떠났던 이백이 아니던가. 청평조사 두 번째 편에서 한(漢) 성제(成帝)의 황후가 된 조비연(趙飛燕)을 끌어들여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던 것인데, 그러나 조비연이 성제의 사랑을 잃고 비운에 죽은 여인이었던 까닭에 결국 양귀비를 저주했다며 침향정에서 수모를 당한 환관 고역사가 충동질했던 것이다. 그런 모함 말고도 통통한 양귀비는 몸이 너무 가벼워 손바닥에 올릴 정도였다는 조비연에게 질투를 내어 더욱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나그네도 언젠가 어이없이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어떤 여성에게 점잖게 몸무게를 물었다가 점잖치 못한 대접을 받고 말았는데, 어쨌든 21세기를 사는 오늘도 여성의 몸무게에 관한 그런 불문율은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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