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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황은 실크로드 유목민의 후예
 
실크로드 기행 - 진시황릉
 
 
농부가 우물파다 발견한 세계 8대 기적

이삼십 년 전만 해도 농사를 짓고 사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문화재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물론 식자층에서는 발굴되는 유물 유적에 아주 오래 전 왕조시대부터 관심을 기울였지만 무지렁이 농부들은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만도 고달팠던 것이다. 그러니 고대 황제의 능(陵)도 그들에게는 유적이란 개념보다는 유실수를 심어 과일을 수확하는 구릉 땅의 가치밖에 없었다. 실제로 중국의 한 고고학자가 어느 농가에 들렀다가 고대의 귀중한 유물이 개밥그릇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놀란 일화가 있다. 농부의 눈에는 개밥그릇으로 보였지만 학자의 눈에는 당시의 풍속을 가늠할 수 있고 예술적 가치가 풍부한 소중한 유물이었다. 학자는 그 유물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개밥그릇을 사려고 하면 오해를 할 것이고, 그렇다고 포기한다면 그 유물은 개발에 치여 언젠가는 깨어져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학자는 계책을 하나 꾸몄다. "여보, 주인장. 그 개를 나에게 팔 수 없소?"
"잘 됐습니다. 개밥 주기도 귀찮았던 참인데 잘 됐습니다."
개를 건네 받은 학자는 비로소 심중의 말을 꺼냈다.
"돈을 더 붙여 주겠으니 개밥그릇까지 주지 않겠소?"
"개를 사시는 분이니 개밥그릇은 거저 주겠소."

개밥그릇으로 쓰였던 고대유물
이렇게 해서 사라질 뻔한 유물이 현재도 잘 보존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나그네가 가고 있는 병마용(兵馬俑) 발굴 갱도 한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물론 진흙으로 빚어 구운 이 병마용들은 진시황릉을 수호하는 군단이다. 1974년 봄이었다. 임동현 서양촌(西楊村)의 농민 양지발(楊志發) 씨가 우물을 파고 있었다. 흙을 두레박으로 퍼 올리고 있었는데, 두레박에 이상한 물건이 하나 따라 올라왔다. 진흙으로 빚은 병사의 두상이었다. 도용(陶俑)의 출현은 양지발 씨를 충격 속으로 빠트렸다. 양지발 씨는 악귀가 아닌가 싶어 망치로 두드려 깨어버리거나 다시 그 자리에 묻고도 싶었다. 그는 우물을 파던 일꾼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집 부근의 풀밭에 소를 매어놓고 풀을 뜯기던 어린 자식까지 달려와 놀랐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임동현 인민청에 신고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소정의 상금과 상장을 받았다. 고고학자들이 논의한 결과 그것은 진시황릉과 관련된 도용으로 매우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8대 기적의 하나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된 지하 5미터에 직립한 자세로 늘어선 병마용은 이렇게 한 농부의 두레박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다. 그 두레박이야말로 2천2백년 전 진시황제의 역사를 보여준 타임머신이 아닐 수 없다. 유방(劉邦)이 거느린 군사가 초(楚)를 무너뜨리자, 항우(項羽)의 약탈군들이 몰려와 횃불을 놓아 석 달 동안이나 불길에 휩싸였다가 그나마 남은 병마용이긴 하지만.

병마 호위병 군단 '눈 부릅뜨고' 능 수호
나그네의 눈에 비친 병마용갱은 거대한 체육관이나 식물 온상 같다. 아직도 발굴이 진행중이어서 도용도마(陶俑陶馬)를 보호하기 위해 돔형의 유리로 된 전시장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전시장은 제1, 2, 3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지금도 발굴중이다. 1호갱에는 수천 명의 보병과 1백여 대의 전차로 형성된 군단, 2호갱에는 목제 전차 89량과 말이 끄는 전차 356대, 전차병 261명과 기병 116명, 보병 562명과 대형 금속병기가 발굴되었고, 3호갱에는 장수의 군지휘부와 호위병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드러났다. 인형처럼 작은 것이 아니라 모두 실물 크기에다 부릅뜬 눈의 표정, 위엄 있는 수염, 틀어 올린 머리카락, 불끈 쥔 주먹, 갑옷의 무늬 등등 사실적으로 빚어놓아 갱의 분위기를 긴장시키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병마용갱의 말을 보니 아침에 보았던 여원주점 로비에 있던 동거마(銅車馬) 복제품이 떠오른다. 두 곳의 말들이 다 비슷한 모형이다. 당시 전장을 누볐던 전투용의 병마들이었으리라. 일행 중 한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마차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를 내어 달렸다고 한다. 여러 마리의 말이 수레를 끌게 되면 수레가 땅에 닿지 않고 달리게 되는데 그때 최고의 속도를 낸다는 것이다. 초고속으로 달리는 열차처럼 바퀴가 레일에 닿지 않고 뜨는 부상(浮上)의 원리가 아닐까 싶다. 제 1, 2갱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바로 저분이 양지발 노인이라고 한다. 그는 병마용을 발견한 공로로 이곳에 근무하는 형식의 예우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긴 담뱃대와 우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백발이어서 그런지 담뱃진에 찌든 치아가 더욱 검게 보인다. 그러나 이 거대한 병마용을 발굴하고 있는 것은 다 "내 덕분일세" 하는 듯한 천진한 득의(得意)가 얼굴에 가득하다. 나그네 개인적으로는 진시황제가 조성한 병마용보다 양지발 노인을 만난 것이 더 흐뭇하다. 2천 2백년 전 진나라의 역사를 만나게 해준 타임머신의 선장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긴 담뱃대를 뻑뻑 빨아대는 시골 할아버지 모습 그대로이다. 이제는 글자도 쓸 줄 안단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달려와 사인을 해달라고 졸라대니 뒤늦게 글자를 배웠단다. 악의가 한 점 없는 농부 출신의 이 노인이야말로 인간의 밝은 빛인 선(善)이다.

불로초 찾던 일행은 인디언의 시조(?)
그러나 무한 권력을 누렸던 진시황(기원전 259-210)에 대한 평가는 영웅과 폭군 두 갈래이다. 실크로드 서북쪽 고원의 유목민족이 세운 진나라. 진시황제는 그 유목민족의 후예다. 그렇다면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한 세력은 실크로드의 서북 고원지대에 살던 말 젖을 짜서 마시던 유목민족인 셈이다. 소년 시절 이름이 영정( 政)이었던 그는 출생부터 복잡하다. 진왕의 손자인 자초(子楚)는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동안 자신에게 금괴를 뇌물로 바치던 거상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이를 하나 갖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훗날 진시황이 되는 영정이다. 장양왕(莊襄王) 자초가 죽자, 영정이 왕위에 오르고 그때 그의 나이는 13세였다. 자초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들인 영정은 처음에는 여불위의 도움을 받다가 자신의 생모(한때는 여불위의 애첩)와 여불위의 간통이 수그러들지 않자 그를 실각시키고 독재군주가 된다. 그는 한(韓)을 멸망시키고 이어서 연(燕), 초(楚), 위(魏) 제(齊) 나라를 차례로 제압하여 즉위 26년(서기전 221년)만에 명실공히 천하를 통일하고 스스로 "처음의 황제"라 하여 시황(始皇)이라 하였다. "짐"이나 "폐하"란 호칭도 그가 만든 말이다. 기원전 215년 원정길에 오른 그는 북의 흉노를 물리쳐 만리장성을 쌓고, 남으로는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를 공략하여 정복군주의 위세를 떨치었다. 비로소 친(秦)이 해외 이 민족들 사이에 "지니" "차이나"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이 무렵 그는 불로장생을 위해 선술(仙術)을 닦는 서복(徐福)에게 불로초를 구해 오라 하였으나 동남동녀를 데리고 간 서복 일행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야사(野史)에는 서복 일행이 제주도로 들어와 구기자와 음양곽을 구했으나 효과가 미진하면 교살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다시 태평양으로 항해하던 중 일부는 알래스카로 가서 에스키모의 시조가 되었고, 또 일부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가 인디언족 중에서 가장 우수한 슈(Sue)족의 조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슈"는 서(徐)의 음(音)을 취한 것이라는 설이다.

미발굴 진시황능 내부 '별천지' 소문
서복 일행으로부터 소식이 없자, 진시황은 또다시 한종(韓終)을 시켜 장생불사의 약을 구해 오라고 명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생불사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고 비방하는 460명의 무리를 잔인하게 생매장한다. 또한 문사들을 증오하여 진(秦)과 무관한 서적들을 모조리 불사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태산을 비롯한 여섯 곳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우게 하고, 한편으로는 향락의 전용궁인 아방궁을 지었다. 그러나 무한 권력의 진시황도 서기전 210년에 순시중 병을 얻어 죽고 만다. 나그네가 오르고 있는 계단이 바로 진시황릉이다. 죄수 70만 명을 동원하여 37년만에 완성시켰다는 능이다. 이 능 안에는 병사한 진시황과 그의 아들 호해(胡亥)가 참살한 12형제 10자매가 묻혀 있고, 자녀가 없는 비빈들이 생매장 당해 있다. 그리고 능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 능 조성에 관여했던 장인들이 마지막에 모두 산채로 묻힌 곳이기도 하다. 능은 아직도 발굴되지 않고 있다. 낮은 동산 만한 능 위는 석류나무 과수원으로 익어 가는 석류가 향기롭다. 이 능 안이야말로 별천지라는데 볼 길이 없다. 지하궁 천장에는 별자리가, 바닥에는 수은이 흐르는 강과 바다가 있으며, 진기한 보물들이 가득 채워진 방에는 인어(人魚)의 기름불을 켜놓아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였단다. 그러나 죽은 진시황의 허락 없이 침입하는 자는 누구든 자동 발사하는 독화살에 맞아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감히 발굴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잘 드러내지 않는 중국인들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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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연락처 E-Mail : namo80@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