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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를 두는 돈황의 거리
 
실크로드 기행 - 돈황의 거리
 
 
2천여년간 흥망성쇠 거듭한 실크로드

돈황인가, 뚠황인가, 둔황인가. 나그네가 돈황공항에서 들은 첫 현지 음은 "뚠-황-"이었다. 공항 직원의 안내방송이었으니 표준 발음이 분명하다. ㄸ의 된소리가 거칠게 들릴 법도 하지만 우리말과 달리 대단히 부드러운 소리였다. 특히 "뚠" 소리에 물 흐르듯 연결되는 "황"은 우아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그네는 "돈황"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서안"이 중국 현지 음으로는 "시안"이지만 서안으로 표기한 원칙과 마찬가지다. 돈황(敦煌)은 그곳의 옛 언어로 "타오르는 횃불"이란다. 한자의 돈(敦)은 크다란 뜻이고, 황(煌)은 성하다란 뜻이다. 기원전 111년에 한(漢)이 군(郡)을 설치한 것으로 보나 실제의 기록인 한평제(漢平帝) 때 돈황군의 인구가 3만 8천, 호구가 6천3백여 호에 이르렀다니 실크로드에서 마지막으로 먹을 것과 물을 챙겨 가는 오아시스 도시로서 돈황은 글자 뜻대로 크고 번성하였지 않나 싶다. 돈황은 옛말로 '타오르는 횃불' 현재의 돈황 인구는 15만 정도이다. "타오르는 횃불"이라 불리던 예전의 명성에는 걸맞지 않지만 그래도 거리는 활기가 느껴진다. 도시 중심에는 조각작품 <비파를 켜는 여인>이 서 있고, 백화점과 전화국, 극장, 상설 시장 등이 몰려 있다. 비파를 켜는 여인은 돈황의 막고굴 벽화를 참고하여 재현한 것인데, 비파를 머리 뒤로 돌려 신나게 켜는 모습이다. 요즘도 장발의 로커들이 절정에 이르면 기타를 머리 뒤로 들어 연주하여 청중들을 흥분시키곤 하는데, 그 옛날에도 뮤지션들은 자신의 황홀감을 그렇게 표현했나 보다. 극장 앞에는 우리들이 60년대에 보았던 것처럼 변사가 행인들을 향해 "기대하시라, 고대하시라"를 외치고 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악사들이 북을 치고 트럼펫을 불고 있다. 제복을 입어 복장은 통일하고 있지만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모자 밑으로 삐어져 나온 머리카락은 기름때로 번들거린다. 그래도 그 옛날 서커스단의 악단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다. 나그네가 아는 어떤 기자는 돈황에 왔을 때 이 광경만 보았다고 한다. 돈황 하면 막고굴인데 이 극장을 찾아오곤 하였다니 그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우리들이 잊고 지냈던 기억의 필름 한 토막이 <시네마 천국>이란 영화처럼 여기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도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나선 재래시장의 분위기와 똑같다. 입구에는 과일 행상들이 진을 치고 있고, 상가 양쪽으로는 양고기를 구워 젓가락에 꼬치처럼 꿰어 파는 좌판들이 늘어서 있다. 회족(回族)들이 먹는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들도 즐기는 간식거리라고 한다.




장기는 본래 인도 수도승 놀이 조금 더 골목으로 들어가니 자장면을 파는 식당도 보인다. 벽에 흰 페인트로 식당(食堂)이라고 쓴 가게의 문에 메뉴가 적혀 있음이다. 한자로 작장면(炸醬麵)이라고 적혀 있지만 우리말로는 자장면, 중국말로는 "자지앙미엔"이다. 작장(炸醬)은 중국 된장이고, 면(麵)은 국수이니 그것을 비벼 섞은 것이 "자지앙미엔"인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는 중국 자장면을 먹지는 못했다. 일행이 저만큼 앞서 가고 있고, 돈황대주점에서 점심으로 회족(回族)의 별미 요리인 "양러우파오머(羊肉泡 )"라는 양고기 수제비를 맛있게 먹고 나선 길이기 때문이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길거리 한 쪽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가 두는 방식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장기도 역시 실크로드를 통하여 들어온 놀이문화의 하나다. 원래 인도에서 수도승들이 코끼리를 상징하는 장기알을 만들어 상희(象戱)라 하여 즐겼던 것인데, 중국으로 들어와 게임의 방식이 차(車)와 포(砲), 마(馬) 등이 전투하는 전쟁놀이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돈황의 이 거리가 바로 실크로드인 천산 남로와 중로, 그리고 북로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란다. 그러니 기원전부터 이민족들끼리 돈황의 쟁탈전도 그만큼 치열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돈황을 지배했던 족속은 흉노족이었다. 흉노는 몽골어로 "풀이 자라지 않는 땅"이라는 고비 북쪽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거친 민족이었다. 고비사막 안의 오아시스 소국들을 기원전 2세기까지 지배한 민족도 그들이었다. 끊임없이 침략을 당한 중국은 흉노를 좋게 기록해 주지 않는다.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은 이렇다. 흉노족이 돈황 최초로 정벌 "어린아이들도 양을 잘 타며 활을 쏘아 새와 쥐를 잡는다. 좀더 자라면 여우를 잡아먹으며, 사내아이는 활을 잡아당길 만하면 무장한 기병이 된다.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전황이 유리하면 전진하고 불리하면 후퇴하는데, 도망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선우(單于,왕) 이하 모든 사람들이 짐승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젊은이들은 맛좋은 살코기를 먹고 늙은이들은 그들이 남긴 것을 먹으며 힘있는 자를 귀하게 여기고 약한 자를 천하게 여긴다. 아버지가 죽으면 생모가 아닌 경우 그 미망인을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형제의 부인을 아내로 삼는다." 흉노족이 가장 강했던 것은 믁돌(冒頓) 선우 때였는데, 마침내 노상(老上) 선우는 기원전 177년 감숙지방의 돈황과 기련산맥을 무대로 세력을 펼치던 월지(月氏)를 공격하여 왕을 죽인 뒤 그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전승을 자축하였는데, 돈황은 그때 흉노의 지배권에 들어갔다. 이어 흉노는 중국과 타림분지를 잇는 실크로드의 목에 해당하는 누란국(樓蘭國)을 정복하고, 타림분지 안의 오아시스 소국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한동안 세금을 바치게 하였다. 이에 한무제는 흉노에게 쫓겨 서방으로 멀리 달아난 대월지와 협공작전을 펼칠 계책으로 장건(張 )을 서역으로 보내나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한무제는 기원전 121년에 다시 장군 곽거병에게 군사를 주어 흉노를 정벌케 한 결과 하서주랑의 그들을 모두 소탕하고 무위와 주천 2군을, 기원전 111년에는 장액과 돈황에 2군을 더 설치하여 이른바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완성하니 비로소 돈황은 둔전군(屯田軍)이 주둔하는 변경 도시로 편입되고, 대상들이 마음놓고 쉬어 가는 교역의 도시가 된 것이다. 지배 왕·수장 대부분 불교 믿어 이 무렵에 불교가 돈황을 거쳐 중국에 전파되어 우리 나라에 들어왔고, 4세기 중엽에는 석굴사원인 막고굴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5호 16국 시대에는 돈황이 한족 국가인 서량국(西 國,400-421)의 수도가 되었다. 서량이 멸망한 후에도 돈황은 북량(北 ), 북위(北魏), 수를 거쳐 당에 이르러 사주(沙州)로 개명되면서 가장 화려하게 번성한다. 그러다가 780년 티베트족인 토번(吐蕃)에 점령되었다가 9세기부터 다시 당의 귀의군절도사가 설치된다. 잠시 금산국(金山國)으로 독립하기도 하였으나 중국 송나라 때인 1034년 서하(西夏)에 지배되고, 1278년 원세조(元世祖)가 공격하여 사주로총관부를, 명성조(明成祖)가 1405년에 사주위를 두었다가 주민들을 주천으로 옮기고 관문인 가욕관(嘉 關)을 폐쇄시키는 바람에 돈황은 변방의 버려진 유목지가 되고 만다. "타오르는 횃불"이 여기서 꺼져버리고 더불어 불교문화도 동면에 들어가 버리는데, 청초(淸初)에 "옛 돈황"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당하(當河)의 동쪽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돈황이 환생한 것이다. 2천년 동안 벌어진 돈황의 전생 이야기를 짧게 간추려 보았는데, 도시가 흥망성쇠하는 가운데서도 참으로 다행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서하의 침략 전까지 돈황을 지배했던 왕이나 지방 수장들이 대부분 불교를 믿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천불동이라고도 불리는 막고굴의 불교문화를 수 백년 동안 계속해서 꽃 피우게 한 바탕인 바,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건 간에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 같다. 돈황대주점으로 돌아오니 내일 아침에 돈황막고굴로 간다고 알려준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막연히 와보고 싶었던 실크로드, 그중에서도 돈황막고굴이다. 나그네의 작은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나그네는 분명 <뚠-황->에 와 있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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