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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불교도 실크로드 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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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초타라오르' 백제불교 고향


실크로드를 통한 불교의 전래를 이야기할 때 백제 불교는 별로 거론되지 않는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백제에 불교를 전래했다는 마라난타에 관한 이야기도 <삼국유사>에 단 몇 줄 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을 뿐이다. <백제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년(384)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니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년(385)에 새로운 수도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짓고 승려 열 명을 허락하였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초다. 호승이라면 서역승이다. 그렇다면 그도 역시 실크로드를 거쳐 양자강 이남의 동진에 이르고 다시 동진과 외교가 있었던 백제로 건너왔을 것이다. 마라난타가 천산북로로 왔건 천산남로로 왔건 두 교역로가 만나는 지점이 돈황이므로 그 역시도 돈황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해볼 수 있다. 마라난타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마라난타는 동진에 12년간 머물면서 효무제의 전술 참모가 되어 조언해주기도 한다. 당시 동진은 오호 십육국의 난으로 중원을 잃고 양자강 이남의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에 도읍을 정했으나 날로 강성해지는 북위와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을 하는 데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북조(北朝)는 각국의 포로들을 끓어들인 오합지졸이지만 동진의 군사는 훈련이 잘 된 병사들로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당시의 고승은 국민을 통합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중앙집권국가로 도약하기를 바랐던 제왕들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고승을 유치하려 했던 것이다. 쿠차국 출신의 고승 구마라집이 그 대표적인 예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마라난타의 입국은 나라의 틀을 다져가던 백제로서는 개국 이래 최대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서기 384년에 마라난타는 배편으로 전남 영광 법성포(法聖浦)로 들어와 불갑사를 창건하고 다음해 백제의 수도인 한산주로 올라가 침류왕을 예방하고 나라에서 절을 짓게 조언한 뒤 백성 중에 열 명을 선발하여 출가케 한다. 여기서 법성포(法聖浦)란 지명에 잠시 눈을 돌리자면 "불법이 들어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불갑사를 창건한 마라난타와의 인연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슬람나라서 발굴되는 불교유적 아무튼 마라난타가 백제를 선택하여 온 것은 백제가 동진에 조공하는 등 교류가 빈번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마라난타가 돈황을 떠나 동진과 적대적인 낙양에 도읍을 둔 북위로 먼저 들어갔다면 그는 고구려로 갔을지도 모른다. 동진과 북위는 지정학적으로 양자강을 사이에 둔 경쟁 국가로서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동진은 백제와 북위는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마라난타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불행하게도 이것뿐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몇 줄의 사료와 불갑사의 창건기를 가지고 유추해낸 상상은 이 정도로 빈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몇 년 후에는 한 노학자의 집념에 의해 마라난타가 서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경로가 확실하게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 노학자가 프랑스에 유학을 간 것은 1959년이었다. 그는 불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떠났지만 강의실에서 만난 교수의 권유에 의해 고국의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 파리의 각 도서관에는 그들이 탈취해 간 동양의 고서적들이 많았고, 그만큼 연구도 활발한 상황이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서적을 뒤적이는 동안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은 구절이 나왔다.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의 고향이 쵸타 라오르"라는 구절이었다. 그는 유학생활이 끝날 때까지 그 구절을 잊지 않았다. 1964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는 배편으로 파키스탄을 찾아갔다. 쵸타 라오르를 답사해보고 싶어서였다. 이후 대학 강단에 선 이후로는 갈 수 없었다. 그가 다시 그곳을 찾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정년퇴직하고 난 1998년부터였다. 그곳은 프랑스나 영국, 인도 등에서 문화재를 수만 점 탈취해 갔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예전의 지진으로 인해 마라난타가 살았던 때의 불교 문화재가 땅속에 매장되어 있는 마을이었다. 민희식 교수 불교 서역 유윤입로 추적 쵸타 라오르 도시는 현재 이슬람 문화권이므로 그곳 사람들의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은 전무했다. 그러나 그가 자료를 가지고 설득하자 땅을 파보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문화재가 발굴되자 그 지방 신문에 연일 대서특필되고, 파키스탄 주재 일본대사관에서는 3억 엔을 기부했다. 그곳이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의 고향이라면 백제불교를 고향으로 여기는 그들로서도 연고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쵸타 라오르 도시 안의 갈리 마을에서는 마라난타라는 고승이 아주 옛날에 살았으며 그가 한국으로 갔다고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발굴되고 있는 문화재에서 마라난타에 관한 명문(銘文)이 아직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확신하는 데는 어느 정도 근거는 충분했다. 지역 주민들의 마라나탄에 대한 구전과 단편적인 자료와 4세기의 불교문화재가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가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물었다.
"지원을 해주는 기관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퇴직금을 쓰고 있습니다. 뜻을 세우고도 돈이 없어 일을 못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못합니다. 아쉬운 것은 제가 파키스탄에 문제 제기를 하여 발굴이 시작됐는데, 새로 건립될 박물관에 보관되는 문화재에 일장기가 붙는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비용을 대고 있으니까요. 하기는 누구나 다 감상할 수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나라 기가 붙든 상관없을 뜻도 싶습니다만." 나그네가 "노학자"로 혹은 "그"라고 삼인칭으로 서술한 이는 머리카락이 허연, 어찌 보면 중국의 기인 한산(寒山)을 연상시키는 풍모의 불문학자 민희식 교수이다. 학자가 하나의 뜻을 세워서 자신의 전 인생을 거는 모습이야말로 선승이 화두를 드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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