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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명소-실크로드여행/참선 여행
 
 
  - 그들은 탐험가인가, 약탈자인가
 
실크로드 기행 - 막고굴
 
 
탈취유물 찾아헤맨 사막의 하이에나


탐험가란 목숨을 위협하는 오지에서 지리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백지도(白地圖)를 채우기 위해 답사하거나, 고고학자들이 공백으로 남겨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탐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오지의 유물을 "보호와 연구"라는 미명하에 탈취해 간 약탈자도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의 펠리오에 의해 돈황의 막고굴을 빠져나가 현재 파리의 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도 한 예이다. 이럴 때 그들은 자신이 뭐라고 변명해도 약탈자가 분명하다. 실크로드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었다. 다분히 서양인의 시각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의 비단이 서양으로 건너간 "비단의 길"이란 뜻이다. 그러나 동서 교역의 상품은 비단만이 아니라 의식주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도 리히트 호펜 이후의 탐험가들 모두가 실크로드란 말을 계속 사용하여 지금은 낯익은 단어가 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탐험가는 스웨덴의 스밴 헤딘과 오렐 스타인이다. 헤딘은 타림분지 안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고대 도시 누란(樓蘭)을, 스타인은 돈황 막고굴의 존재를 유럽의 학계에 알려 돈황학(敦煌學)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일확천금 노리고 험한 탐험길 나서 엄밀한 의미에서 탐험가들은 학자와 다르다. 그들은 학문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이다. 헤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에 묻힌 고대 도시를 동경했고, 그 사라진 도시 속에는 보물이 가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곳의 전설 같은 일화에 감동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지고 쫓기다가 자살할 마음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들어갔다가 금덩이를 발견하고는 부자가 되어 나왔다는 이야기도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타클라마칸이란 "돌아올 수 없는 땅"이란 뜻으로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은 많으나 돌아온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돌아오더라도 그곳에서 발견한 유물은 단 한 가지도 가져오지 못하고 목숨만 겨우 건져 올뿐이었다. 헤딘도 첫 번째 탐험에는 그랬다. 1895년 2월 17일 30세 되던 생일에 그는 카쉬가르를 떠났다. 사막의 지리를 잘 안다는 고용한 대원 몇 명과 낙타 여덟 마리, 경비견 두 마리, 양 세 마리, 암탉 열 마리, 수탉 한 마리를 데리고 사막으로 출발한 것이다. 사막을 횡단하여 티베트에 도착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떠난 지 15일부터 식수난에 부딪혔다. 식수가 이틀 분밖에 남지 않았다. 고용한 대원들은 이틀 후면 강을 만날 것이라고 말했으나 헤딘은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출발지로 되돌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헤딘은 대원들이 마시는 물의 양을 최소로 제한했다. 낙타에게는 물을 주지 않고 강행군을 했다.
모래폭풍 덕에 고대도시 누란발굴 닷새가 지나자 낙타가 먼저 쓰러지기 시작했다. 대원 중에는 비축한 물을 몰래 다 훔쳐 마셔버린 배신자도 나왔다. 물 대신 닭의 피를 마시지만 대원들과 낙타들이 차례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마지막에는 헤딘과 고용한 한 사람의 대원만 남았다. 결국 그들은 구사일생으로 강을 발견했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경험을 쌓은 헤딘은 마침내 1899년 9월의 타클라마칸 사막 탐험 때 생애 최대의 고고학적 위업을 이룬다. 고대에 번성했던 오아시스 도시 누란(樓蘭)을 발견한 것이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야르칸트 강과 타림 강을 따라가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염호(鹽湖)로 가는 중이었다. 사막에서 이동하는 것 같은 염호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한 뒤 티베트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야르칸트 강변의 라일릭 마을을 출발한 지 22일만이었다. 강변 근처에 고대 가옥이 몇 채가 보였다. 조사해 보니 고대 중국의 동전과 철제 도끼, 사람 형상의 조각 몇 점이 나왔다. 헤딘은 발굴한 유물을 낙타에 실어 타림 강변의 임시 숙소로 돌아왔다. 물을 얻기 위해 그들은 모래를 파려고 했다. 그런데 헤딘은 가지고 다니던 유일한 삽을 고대 가옥에 놓아두고 온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삽질을 담당한 대원에게 자신의 말을 내어주며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삽을 가지고 돌아왔다. 오다가 모래폭풍을 만나 길을 잃고 헤맨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요한 정보를 하나 가져왔다. 헤매다가 우연히 유적을 하나 보았는데, 그곳에 목조상 몇 개가 있다는 것이었다. 헤딘은 다른 대원을 그에게 붙여 그 목조상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가져온 목조상을 눈으로 확인한 헤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헤딘은 물이 이틀 분밖에 없었으므로 그곳을 떠나 티베트로 향해야 했다. 헤딘이 다시 와서 발견한 그곳이 바로 고대 도시 누란이었다. 모래에 묻혀버린 지 1천 5백년도 더 지난 고대 도시였다. 명문이 새겨진 유물들이 쏟아졌다. 중국 문자가 쓰인 고대 지편(紙片)과 목간(木簡) 120편과 만(卍)자가 박히고 색상이 선명한 융단도 발견되었다. 목간의 글자를 해독하여 보니 영화를 누렸던 누란의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은 3세기까지 관청, 학교, 의원, 식당, 역관, 상점 등 도시 기능을 갖추어 번영을 누리었던 것이다.
타림분지 유물 줄줄이 英박물관행 헤딘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개척자라면 스타인은 사막의 유물 탐사가이다. 유물 탐사에 관한 한 스타인을 뛰어넘을 사람은 없었다. 16년 동안 그는 타림분지 안의 사막 유물을 약탈하여 영국 대영박물관으로 나르기도 했다. 스타인이 타림분지를 탐험한 동기는 소년 시절의 영웅심리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악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매료되어 대왕이 동점(東漸)했던 그 길을 자신도 걷고 싶었던 것이다. 26세에 그는 항가리를 떠나 인도로 갔다. 그곳에서 불교미술을 접한 그는 10여 년 후, 1900년 5월 드디어 타클라마칸 사막에 첫발을 내딛는다. 카쉬가르에서 하루에 15킬로미터 정도씩 나아가다 그해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에 8세기말에 사막화된 고대 도시 단단윌릭에 도착했다. 이미 도굴꾼들이 거쳐간 흔적이 역력했지만 스타인은 사구에 묻힌 유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스타인의 예감은 적중했다. 모래를 파들어 가자 벽화 등의 유물이 줄줄이 쏟아졌다. 일차로 150점을 대영박물관에 보내려고 조심스럽게 포장을 하였다. 이후 스타인은 크리스마스 때 사막의 선물처럼 모래 속에 묻힌 사원들을 발견하였고, 두루말이 문서나 지편, 회화 등 귀중한 유물들이 나와 그것들도 역시 영국으로 보냈다. 3주 동안 단단윌릭에서 머물면서 스타인은 열네 채의 건물과, 관개 수로 및 과수원, 포플러 가로수 길의 흔적도 발견하였다. 다시 오아시스 도시 케리야에서 머물다가 니야로 출발했다. 고대 도시 니야에서도 단단윌릭 못지 않게 수많은 유물을 발굴하였다.
'왕오천축국전'도 도굴꾼 손에 파리로 이어서 2차 탐험에 나선 스타인은 드디어 1907년 3월 12일 돈황에 도착하였다. 그때만 해도 스타인은 생애 최대의 발견이 돈황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돈황에 도착해서 스타인은 우룸치 출신의 한 상인에게 돈황의 막고굴에 방대한 양의 고문서가 있고, 그 고문서를 왕원록(王圓 )이라는 도사가 지키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영리한 스타인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다음날부터 스타인은 왕원록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제 17호 석굴에서 나온 고문서들 중에서 사경류(寫經類) 24상자 분과 회화류(繪畵類) 5상자 분을 선별하여 대영박물관에 보냈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 출신 펠리오가 쿠차에서 8개월 동안의 발굴을 마치고 돈황으로 진출하여 막고굴의 17호 동굴에 쌓인 고문서들을 조사했다. 펠리오는 스타인이 돈황에 3일밖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막고굴을 찾았다. 과연 17호 굴에는 1만5천에서 2만부에 이르는 사경류가 두루말이 형식으로 쌓여 있었는데, 그것만도 자세히 파악하려면 적어도 6개월이 걸리는 분량이었다. 펠리오도 역시 왕원록에게 뇌물을 주고 필요한 문서와 미술품을 구입하여 배편으로 파리로 날랐다. 그가 가져간 유물 중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있었다. 펠리오가 다녀간 뒤에는 이제 순수한 탐험가라기보다는 스파이 냄새를 풍기는 러시아인과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가 타림분지로 들어왔고, 미국인 랭던 위너까지 막고굴의 벽화를 뜯어내기 위해 풀통을 들고서 돈황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막차를 탄 셈이었다. 늦은 각성이지만 이제 중국인들은 문화의 골수와 뼈를 탈취해 가는 그들을 곱게 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서양의 귀신, 양귀자(洋鬼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막의 하이에나가 더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 속에서 유물이란 먹이를 찾아 헤맸던 하이에나 같은 연상(聯想)을 지울 수 없음이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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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연락처 E-Mail : namo80@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