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
|
|
|
|
| |
|
|
|
|
|
|
| |
|
반짝이는 금빛보고 낙준스님 처음 굴파
 아침 일찍 막고굴로 가고 있는 일행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마저 감돈다. 차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뚫고 달린다. 이따금 모래 봉분이 나타나곤 하는데, 그것은 주로 청나라 시대의 무덤들이라고 한다. 건조한 사막의 기후이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 가끔 수백년 된 미이라가 발견되는 모양이다. 모래 봉분이 있는가 하면 음푹 파인 곳도 있다. 홍수가 할퀸 흔적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래폭풍이 일었던 자리라고 돈황막고굴 연구원 이신 씨가 설명해 준다. 포크레인이 모래를 퍼 간 것처럼 사막이 군데군데 꺼져 있다. 사막의 지형에 변화를 주는 것은 물이 아니라 바람이라는 사실이 실감된다. 차창 밖 멀리 사막 끝에 하나의 물줄기가 보인다. 그러나 에머랄드 빛깔의 그 푸른 물줄기는 실제의 물이 아니라 신기루이다. 오아시스라면 나무와 숲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서역으로 가는 옛 고승들은 신기루를 가리켜 목숨을 앗아가는 귀신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목마른 스님들이 신기루에 홀린 뒤 대열에서 이탈하여 쫓아갔다가는 돌아오지 않곤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물을 외치면서 지열이 이글거리는 사막 속으로 사라져 갔을까. 그러나 지금 보이는 저 신기루는 허공에서 무지개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사막의 뜨거운 지열과 지평선이 만들어낸 빛의 굴절 현상이 아닌가 짐작된다. 목숨 앗아가는 귀신 '사막의 신기루' 숙소에서 돈황 막고굴까지 차로 30여 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주차장은 기념품 가게들과 붙어 있고, 진입로 왼편에는 큰 규모의 돈황 막고굴 연구소 건물이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지어져 있다. 그리고 매표소 입구에는 길쭉한 고깔 모양의 사막 지방 특유의 탑들이 복원되어 있고, 화단에 핀 접시꽃들이 나그네를 반긴다. 돈황 막고굴 앞에서 접시꽃을 보다니 매우 뜻밖이다. 저 접시꽃도 실크로드를 따라 나그네의 고향집 뜰까지 이동해온 하나의 정겨운 상징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실크로드는 우리네 식탁에 오르는 포도나 수박 같은 과일이 들어온 길이기도 하지만 꽃의 길이었던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돈황에서는 접시꽃을 만두화(饅頭花)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또한 우리 시인들에게는 접시꽃이 "소박한 사랑"을 비유하는 시어로 사용되지만, 돈황에서는 꽃의 형상이 무덤처럼 생겼다 하여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할 때나 모양이 여자유방 같다 하여 "바람 난 여자"를 말할 때 "만두화 같다"고 한단다. 같은 꽃이지만 땅이 다르고 천년 세월이 흐르면서 의미가 달라져버린 예가 아닐 수 없다. 막고굴도 작은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다. 막고굴이 있는 산밑으로 나무숲이 있고, 물이 흐르는 내(川)가 있는 것이다. 물이 말라붙어 냇물이 흐른다고 하기에는 빈약하지만 다리를 건너자, 일주문처럼 생긴 누각이 보인다. 누각의 붉은 현판에는 금색으로 막고굴(莫高窟)이라고 쓰여 있지만 원래는 "사막의 높은 곳에 위치한 굴"이라 하여 막고굴(漠高窟)이라 하였음직하다. 막고굴 가장 큰 불상은 '미륵대불' 이곳에 와서 최초로 굴을 판 승려는 낙준(樂尊)이다. 서기 366년 낙준은 돈황을 찾아와 머물면서 수행처를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석양 무렵에 바로 이 부근에서 반짝거리는 금빛을 보았던 것이다. 상서로운 예감에 사로잡힌 낙준은 즉시 이곳 명사산으로 걸어와 개굴(開掘)하였다. 이로부터 굴이 하나 둘씩 더 만들어져 동굴 사원이 되고 벽화가 그려지고 승려들이 승방으로 사용하면서 막고굴은 돈황 주민이나 대상들의 신앙의 성지로 변모하였다. 막고굴이 신앙의 성지로 빠르게 유명해 진 것은 당시의 불안정한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국들이 각축하는 동안 세상이 흉흉하니까 내세를 신앙하는 불교가 더욱 빨리 사람들 마음속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막고굴에 가장 큰 불상이 미륵대불이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미륵불이란 다가오는 세상의 부처가 아닌가. 막막한 현생보다는 미래나 내세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부처가 있다면 미륵불이 아닐 것인가. 막고굴이 하나 둘 뚫리면서부터 미륵신앙은 이곳 돈황 지역의 대표적인 신앙이었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만큼 고대 오아시스 도시 돈황은 중국의 변방에서 소국들의 각축장이었고, 그럴수록 이곳 사람들의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현재의 삶이 막막하다면 누구라도 내세나 미래에 희망을 걸어보지 않겠는가. 그러니 미래의 세상을 구원하러 온다는 미륵불은 불안한 그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부처였겠는가. 구마라집 20년간 돈황 머물며 불경 번역 낙준이 굴을 열었을 당시는 5호16국 중 하나인 전량(前凉)이 돈황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5호16국이란 다섯 오랑캐가 세운 16국이란 뜻인즉, 그들이 지배하던 시기는 4세기초부터 대략 1백년 간이었다. 전량도 313년에 한족 장씨가 나라를 세웠다가 377년에 전진의 부견(符堅)에게 망했고, 전진은 또 티베트족인 후량(後凉)에게 망했고, 후량은 한족인 서량(西凉), 북량(北凉)으로 교체되었고, 마침내 439년 북위가 돈황을 지배하면서 16국의 난립은 막을 내리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후량의 시조 여광이 쿠차국의 구마라집을 돈황으로 데려와 20년 동안을 머물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여광은 구마라집에게 갖은 박해를 가했다고 전해진다. 전진의 서역정토군 장군이 되어 가기 싫은 서역만리 밖의 쿠차국을 멸망시킨 뒤, 고승 구마라집을 데려오라는 왕명을 받고 떠났던 출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고생했다고 생각한 여광은 날마다 구마라집에게 여인과 동침하도록 강요하였다. 만약 동침하지 않을 때는 무고한 생명을 한 사람씩 처형하겠다고 협박하였던 것이다. 이에 구마라집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동침은 하나 계율은 파계하지는 않는다. 밤마다 여광의 명에 의해 자신의 처소에 여자가 들어오나 구마라집은 결코 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여광은 구마라집을 고승으로 존경하고, 구마라집이 돈황에서 20년 동안 머물도록 하였으며 쿠차국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도록 도움을 주게 된다. 그 무렵의 사정이 이러하니 낙준과 구마라집의 감동적인 만남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둥지를 튼 낙준에게 구마라집이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물심 양면으로 격려해 주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현재 50%만 발굴… 벽화길이 22km 현재 막고굴은 남북으로 1.6킬로미터에 이르고, 1천여 개의 굴을 뚫었지만 현재 발굴된 것은 492개이다. 또한불상 등 진흙으로 빚어 안료를 바른 채소(彩塑) 작품이 2415구, 막고굴의 상징이기도 한 벽화가 총면적 4만 5천 제곱미터나 된다. 벽화를 높이 1미터로 전시하면 그 길이가 무려 22.5킬로미터나 되는데, 벽화의 유형을 학자에 따라서는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첫째는 석가모니부처, 보살, 제자 등의 불상화(佛像畵)이고, 둘째는 석가모니부처의 본생담 등 전기를 그린 불전화(佛傳畵)이고, 셋째는 불경을 민중들이 알기 쉬운 회화 형식으로 그린 경변화(經變畵)이고, 넷째는 복희, 청룡, 백호, 우인, 주작, 서왕모 등 중국 신화화(神話畵)이고, 다섯 번째는 천장, 깃발, 복식, 주단, 비천 등 장식화(裝飾畵)이고, 여섯 번째는 장건출사서역도, 손호영강승희도 등 사적화(史蹟畵)이고, 일곱 번째는 석굴을 파고 벽화를 그리도록 시주한 공양주의 초상화(肖像畵)이다. 드디어 매표소에서 관람료를 지불하자, 캄캄한 굴에서 불상과 벽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손전등을 하나씩 나누어준다. 석굴 안의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란다. 햇볕을 받으면 채색이 차츰 바랠 수 있으므로 굴마다 문을 잠가 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자신의 입김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서 벽화를 감상한다고도 한다. 벽화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라면 더한 방식으로라도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한번 훼손되면 아무리 발달한 21세기의 과학이라 해도 벽화의 원상 복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