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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의 방향도 심오한 의미담아
막고굴은 모두 동향이다. 예전 수도승들은 굴 안의 부처님께 먼저 예배하고 난 뒤, 사막 저 멀리 벌겋게 뜨는 해를 보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일광보살"을 외면서 하루를 시작했는지 모른다. 굴의 위치만 보아서는 그런 정경이 떠오른다. 따라서 굴 문의 맞은편은 서쪽이 되고 왼편은 남쪽, 오른편은 북쪽인 셈이다. 대개 불상은 서쪽에 위치해 있고, 좌우나 천정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도 기막힌 배치이다. 불가에서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이 서쪽에 있다고 믿어 "서방정토"라고 하지 않은가. 막고굴의 동향이 갖는 지형적 장점을 하나 들라 한다면 가장 상서로운 서쪽에 석가모니불이나 미륵불 등의 불상이 배치되어 있는 구도인 것이다. 굴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형식으로 개굴되어 있다. 하나는 승원굴이고, 또 하나는 예배굴이다. 승원굴은 복합굴로서 전실과 주실 등 예배굴과 스님들이 좌선할 수 있도록 좌우로 작은 감실을 만든 굴이며, 예배굴은 불보살에게 예배를 드리는 기능만 갖는 말 그대로 단독굴이다. 막고굴의 초기 굴이라고 말할 때 보통 5호 16국에서 수나라 이전의 북주(北周) 시대까지 약 2백년간, 그러니까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판 굴을 뜻한다. 이때는 중국에 불교가 들어와 알려지는 시대로서 중국인들에게는 아직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기였다. 요즘 말로 하자면 서역에서 들어온 불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불상이나 벽화 등에도 서역풍이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독특한 앉음새의 교각미륵보살 나그네가 먼저 간 굴은 초기 굴 중에서도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인 275굴이다. 시대는 5세기 초 북량 때의 굴로서 가로 3미터, 세로 5미터의 장방형으로 비교적 작은 규모의 예배굴이다. 서쪽의 벽에 있는 본존은 교각미륵보살로 서역풍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솔직히 나그네로서는 처음 보는 이국적인 보살이다. 위엄 있는 사자대좌에 다리를 교차해서 앉은 교각(交脚)의 자세 때문이다. 교각의 자세는 중국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그야말로 독특한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서역의 그런 자세를 호좌(胡坐)라 했나 보다. 장엄물은 아직 정교하지 못하여 단순하다. 머리에 쓴 작은 관의 응신불(應身佛)이나 얼굴 뒤의 광배도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목에 건 영락도 그렇고 상반신에 걸친 옷도 양팔에 녹색의 옷을 조금 걸치고 있을 뿐이다. 좌우에서 포효하는 사자도 어설픈 모방에 불과한 것 같은데, 얼굴만은 서역풍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서역 불상의 얼굴을 보면 입술이 두툼하고 콧대가 높고 눈이 큰데 비하여 교각미륵보살은 나그네가 보아도 이질감이 덜 느껴진다. 그리고 눈은 반개(半開)한 모습의 오묘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눈동자를 검은 안료로 도장 찍듯 하여 친근감이 든다. 교각미륵보살의 서역풍의 특징을 또 하나 든다면 하반신에 밀착시킨 음각된 옷의 주름들과 어깨가 드러나도록 걸친 망사처럼 얇은 녹색의 옷이다. 표현하기가 좀 미안하지만 밤무대의 무희들이 입는 옷처럼 섹시하여 성과 속이 어우러진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싫지만은 않다. 다리를 교차한 교각의 의미를 성(聖)과 속(俗)이 하나 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나그네의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교각미륵보살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부처님 전생 그림으로 표현 남북 양쪽의 진흙으로 빚은 처마를 한 작은 감실에도 교각미륵보살이 두 구씩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초기 굴의 특징을 나타내는 석가모니불의 본생담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우리에게 낯익은 "시바왕 이야기"가 중앙에 보인다. 배고픈 매에게 자신의 살을 전부 떼어준다는 시바왕의 보시 이야기인데 그 시바왕이 바로 석가모니불의 전생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한 선업으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 시바왕 본생담의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당시 5호 16국의 혼란스러운 전란 속에서 민초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마구 헷갈렸을 터이고 그래서 이 "시바왕 이야기"에 더욱 흥미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선업을 쌓으면 부처가 된다고 하니 얼마나 간단한 이치인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선행의 보상"은 분명 있다고 믿게 됐을 것이고, 더욱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막막한 미래에 저 교각미륵보살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의지하니 현재의 삶이 덜 고통스러웠을 터이다. 초기 굴로서 또 하나를 든다면 272굴이다. 이 역시 북량 때 개굴한 사방 3.5미터의 정방형 굴이다. 서쪽 감실에 석가모니불이 있고, 천정은 서역 사원에서 영향받은, 삼각형의 틀로 각을 없애가듯 쌓아올리는 말각조정(抹角藻井)에다 사각형의 우물 속 같은 격천정(格天井)이다. 또한 되를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복두형(伏斗形)인데, 이러한 형식도 초기 굴에서 나타난다. 272굴의 천장을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각조정의 복두형 격천정이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의 예술혼 망라된 걸작 서쪽 벽에는 기악천도(伎樂天圖)가 있다. 여러 가지 악기를 든 기악천(伎樂天)과 여러 모습으로 춤을 추는 비천(飛天)은 탁한 암갈색의 벽면에 운간법(天竺畵法)의 굵은 선 터치로 도발적인 느낌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런 화법 역시 서역풍이다. 당시 중국에는 굵은 선 터치의 운간법이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기악천도는 대담하고 천진하게 그려진 벽화로서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한편, 272 굴은 먼저 본 275 굴보다 북량 초기로 시대는 같지만 나그네는 272 굴이 더 오래됐다고 생각한다. 272 굴의 천장은 서역풍이지만 275 굴은 중국풍이다. 이 275 굴은 서역의 불교를 받아들인 후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중국 건축의 전통양식을 가미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275 굴의 천장은 배 밑바닥 같은 인(人)자 형상으로 서역에 없는 양식이다. 나무 대신 진흙으로 빚어 용마루와 서까래를 붙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지붕건축 양식인 것이다. 굴을 감상한 글이 현장의 감동과 달리 너무 딱딱하게 흐른 것 같다. 불교미술사가도 아니면서 아는 체를 했다. 분위기를 바꾸어 볼 겸 보살의 환한 미소를 보러 290굴로 가본다. 5호 16국 시대로부터 약 2백년의 세월이 흐른 북주 시대의 것이기는 하지만 290굴 보살의 얼굴은 교각미륵보살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예술적으로 무척 승화되어 있음을 실감케 한다. 초기 굴이 끝나갈 무렵의 작품으로서 눈은 명상에 잠긴 듯 반개하고 있고, 깨달음의 기쁨을 음미하듯 미소를 가득 머금은 두 뺨은 통통하게 부풀어올라 있다. 옷도 어느새 서역풍에서 벗어나 완연하게 중국식이다. 이처럼 수준 높은 불상이 만들어지려면 교리의 완전한 이해와 깊은 신앙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리라. 그렇다. 290굴 보살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미소는 깨달은 각자(覺者)의 미소이긴 하지만 불교의 동점(東漸)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돈황 막고굴 수행자들이 짓는 회심의 미소가 아닐까. 불보살의 미소는 일종의 문화적 상징으로서 동점해 온 불교가 뿌리내리고 싹을 틔운 다음에 피는 눈부신 우담발화 꽃으로 여겨진다. 예를 더 들것도 없이 우리네 서산 마애불의 미소나 석굴암 석가모니 부처님의 미소가 나그네의 생각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불보살의 미소는 불교에 대한 이해와 수용 능력을 암시하는 코드이기도 하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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