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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귀로 중생 고난 들으시는 듯
6세기 중엽의 북주 시대에 만들어진 428굴에 들어서자,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승려, 보살 등이 점점 신비화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실제를 모방하려는 초기의 모습과 다르게 한결같이 귀가 축 늘어져 보일 만큼 커져 있다. 커진 귀를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중생의 소원을 다 들어주려면 저 정도는 커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초기 석굴의 불보살과 비교해 볼 때 이목구비 중에서 가장 먼저 귀가 변해 있다. 귀의 크기를 보는 것도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어느새 손의 위치와 손가락의 모양도 다양화되고 있는데, 이 역시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서역에서 발생한 수인(手印)의 손 모양도 정확히 모방하고 있는 바, 그만큼 불교의 이해가 깊어졌다는 반증이다. 428굴에서 불(佛)의 손 모양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이 굴의 색다른 맛이다. 지금 보는 428굴의 석가모니 부처 수인은 오른손바닥을 펴서 밖으로 보이게 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이다. 왼손은 파손이 되어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원을 만든 설법인(說法印)인지, 아니면 오른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내린 여원인(與願印)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한자의 풀이대로 시무외인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수인이고, 여원인은 중생의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수인이다. 설법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배하러 온 중생에게 설법하는 수인이고. 서역이나 돈황 막고굴, 우리나라 할 것 없이 시무외인이나 여원인의 수인이 가장 흔한 것을 보면 상징성이 크다. 어느 민족이건 간에 예나 지금이나 자연재해나 전쟁, 병고와 죽음 등의 두려움이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고, 그런 두려움의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한복판에 종교가 자리해 왔던 것이다. 막고굴의 초기 시대가 마감되는 서위, 북주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 나라에도 본격적으로 불교가 동점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보아서 알듯 신라나 백제의 초기 불상들을 보면 이 무렵의 막고굴 불상처럼 대부분 귀가 큰 것이다. 귀의 크기와 미소, 혹은 수인으로서 불교의 동점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림으로 서까래 도안 천정은 완전히 중국식이다. 맞배지붕 형식에다 서까래가 그려져 있다. 5세기의 초기 굴에서도 이런 형식의 천정을 보긴 했지만 세련미에 있어서 차원이 다르다. 5세기초에 만들어진 275굴 천정에서는 서까래를 진흙으로 빚어 모양을 냈지만 지금 보고 있는 428굴에서는 서까래를 그림으로 도안화시키고 있다. 힘을 덜 들이고도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진일보한 방법이 어느새 벽화에 나타나고 있음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서역풍의 그림자가 짙다.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에 그려진 벽화도 운간법의 화법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감실을 만들어 부처님을 봉안한 형태도 좋은 예이다. 특히 인도의 아잔타 석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원형의 기둥에 사리탑을 설치하여 빙빙 돌면서 예배케 하는 방식은 428굴도 마찬가지다. 원형이 아닌 사각의 큰 기둥(方柱)에다, 사리탑이 아닌 부처님을 사면에 각각 봉안한 형태는 다르지만 돌면서 예배하는 방식은 같기 때문이다. 막고굴 연구원 이신 씨의 설명에 의하면 돈황에서는 "사면을 한 바퀴 돌면 재앙이 물리쳐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우리네 탑돌이도 뿌리를 캐어보면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나 짐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탑돌이는 원래 달이 뜨는 밤에 동네 사람들끼리 흥겹게 놀면서 소원을 비는 놀이의 성격이 강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당시의 불교는 대승불교가 명백하다. 예배굴인 428굴 벽면 상단에 보이는 천불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천불의 천(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한다면 중생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이상을 상징하는 무한의 수이다. 만불의 만(萬)도 그렇게 보면 틀림없다. 혼자만 성불하여 일불(一佛)이 되겠다는 소승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진흙으로 빚은 천불의 의미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진흙으로 천불을 만들어 사방 벽면에 스티커처럼 붙인 기법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떤 천불은 떨어져 없어진 것도 있다. 벽화처럼 그릴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진흙으로 만들어 붙였을까. 지붕은 도안화시켰으면서도 왜 천불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대승불교의 핵심 중에 하나인 천불 사상에 대한 이해가 늦어 그랬을 가능성이 많지만 더 연구해 볼일이다. 천불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또 하나의 굴을 든다면 서위 시대의 431굴이다. 굴의 형식도 예배굴로서 428굴과 같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사각의 큰 기둥 사면을 돌면서 예배를 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면을 장식한 색조는 그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8굴은 붉은 색조가 강한 반면에 431굴은 청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원색을 좋아하는 중국인 기질로 볼 때, 붉은 색조의 428굴이 보다 더 중국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푸른 색조가 짙은 431굴은 어딘지 서역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285굴도 푸른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푸른색이 강한 서위 시대가 붉은 색조의 북주 시대보다 덜 주체적이었던 것일까. 색조를 비교하여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이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428굴과 431굴은 비슷한 형태의 굴이지만 색조만 놓고 볼 때, 차이가 크게 나므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괴수 '도철' 천장 네귀퉁이에 표현 서위 시대의 285굴은 앞에서 본 굴들과 달리 예배와 수도의 기능을 갖춘 승원굴이다. 서쪽 벽의 본존불 좌우로 남쪽과 북쪽의 벽면에 수도승들이 좌선할 수 있게끔 감실들이 만들어 있는 것이다. 특히 285굴의 천장에는 중국의 고대 신화가 그려져 있는데, 천장의 네 귀퉁이에 도철( )의 모습이 눈에 띈다. 머리만 있고 몸은 없는 모양의 검은 괴수, 도철은 무엇이든 마구 삼켜 먹으려고 달려드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285굴의 천장의 네 귀퉁이에 무서운 도철을 그려 놓았을까. 마치 우리네 절 지붕에 귀면(鬼面) 기와를 얹어 놓은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우리의 귀면과 중국의 도철은 기능이 다르다. 우리의 귀면은 삿된 무리들이 미리 겁먹고 도망치게 하는 나름대로의 자비가 있고, 중국의 도철은 무엇이나 먹어 삼키는 무도하고 무자비한 괴수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도철을 보았으니 그것의 잔상을 지울 겸 북위 시대의 259굴로 가본다. 북위 시대는 5호 16국의 전쟁이 끝나고 막고굴의 역사로 보아서도 초기 석굴의 시기가 막을 내리는 시대이다. 불상에 있어서도 소국들을 평정한 북위의 힘이 느껴진다. 그 힘에서 연유하는 자신감이 불상에도 감돌고 있고, 좌우 한치의 오차 없이 대칭되는 본존불의 소상(塑像)은 안정감에다 편안함까지 배어 있다. 특히 석굴 문의 입구에서 미소짓고 있는 보살은 "돈황의 모나리자"로 불릴 만큼 아름답다. 이 역시도 소국들을 제패한 뒤에 생긴 북위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북위의 막강한 군사력이 아니라 북위 사람들의 집단 활력이랄까, 생기가 넘쳐흐르는 시대적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니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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