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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후원으로 도약한 막고굴
다 알다시피 수나라는 북위의 재상 양견(楊堅)이 장안에 도읍을 정하여 세운 나라이다. 양견은 수나라의 고조인 문제(文帝)로서 열렬한 불교신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북주를 무너뜨린 것도 불은(佛恩)을 입어 가능했다고 믿을 정도로 불교를 크게 신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의 영향은 제 2대 양제(楊帝)에게도 이어졌다. 양제는 한나라 이후 하서주랑의 지배자가 자주 바뀌는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보내 변방 도시인 무위를 탈환하기도 하였다. 당시 하서주랑은 중원이 혼란한 틈을 타 토욕혼(吐浴渾)이 들어와 지배하고 있었는데, 양제의 군사가 일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퇴시켰던 것이다. 무위가 예전처럼 활기를 되찾자, 가까운 곳에 있는 돈황도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과 승려들로 붐비기 시작하였다.
문제와 양제의 불교를 장려하는 정책에 힘입어 막고굴도 이때에 79개나 개굴되었다. 37년 동안의 단명 왕조로서 79개나 개굴한 사실은 수나라의 호불(好佛)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수 왕조가 몰락한 것은 양제의 무모한 고구려 원정이 참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강성한 고구려에 패한 이후 민심이 흉흉해져 마침내 태원 유수(留守) 이연(李淵)에게 수 왕조는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수나라 시대의 막고굴 석굴을 보면 서역에서 동점한 불교가 이제 중국에서 튼튼히 뿌리내리고 막 꽃을 피우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그네가 먼저 들어간 수나라의 석굴은 427굴이다. 손전등 불빛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감상하는 것이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감동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전실은 목조이고 주실은 서역풍의 흔적인 승원굴,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탑묘굴 양식이다. 앞장에서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사각의 큰 기둥(方柱)에 예배의 대상인 불보살을 안치하고 기도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양식이다. 그런데 이런 승원굴 양식은 수나라에서 끝나고 당대(唐代)로 가면 저절로 사라지고 만다.
아침 햇살에 찬란했을 천불의 감동 정면인 서쪽 벽면은 삼존입상이, 삼면은 각각 감실을 파서 삼존좌상을 안치하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삼존불이 수나라 시대에 유독 많이 보이는데, 이것도 역시 천불 사상에 이어 대승불교의 이해가 깊어진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석가모니불이나 미륵불 외에 다른 부처와 보살들도 무대의 주인공처럼 자신 있게 등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삼존불의 크기도 매우 커졌다. 본존불이 5미터이고, 좌우 협시상은 4.5미터이다. 이만한 거인의 키라면 예배자들이 절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본존불이 시무외인이나 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두려움을 없애주고 소원을 다 들어줄 것만 같은 친근한 삼존불이다.
천장에는 108 비천이 힘차게 날아다니고 있다. 벽면도 아름다운데 금분으로 그려진 천불들이 훼손되어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러시아 병사들이 내전 때 이곳까지 도망쳐 와 금분을 죄다 긁어 갔다고 한다. 금분이 입혀진 몇 분 천불을 보니 수나라 시절에는 아침 햇살이 들면 황금빛으로 찬란했을 듯싶다.
한편, 북주 시대에 만들어진 스티커형의 천불은 수나라에 들어와서는 사라져버린 듯하다. 벽화로 그려진 천불이 일반화되어 유행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이처럼 간단한 이치도 왕조가 바뀌어야 변하는 것을 보면 문화의 적응이라는 것이 얼마나 느린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전쟁을 하듯 응전에 이어 수용과 순응, 그리고 깊은 이해의 단계를 거쳐 자기화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전제가 허용된다면 삼존불이 출현한 수나라 시대는 불교문화를 비로소 깊이 이해했던 시기가 아닐까. 아무튼 삼존불에 이어 칠존상이 등장하는 시기는 수나라 시대이다. 초기 단계인 듯한 칠존상이 305굴에 보이고, 완성에 가까운 칠존상이 420굴에 나타난다. 420굴의 칠존상은 서쪽 정면의 감실에 안치되어 있고, 천불이 그려진 남북의 벽면 가운데의 감실에는 삼존좌상이 각각 봉안되어 있다. 누구라도 이 420굴을 보면 427굴이 발전된 형태라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변상도의 출현, 불교문화 황금기 예고 칠존상은 가운데에 본존불인 석가모니불, 그 왼쪽에 10대 제자인 가섭, 오른쪽에 역시 10대 제자인 아난, 이들 옆에 서 있는 보살들, 그리고 감실 바깥쪽에는 불보살을 수호하는 역사(力士)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런 칠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민중들 사이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들과 보살과 역사에 얽힌 얘기들이 상당히 퍼져 있었고,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다 알다시피 가섭은 10대 제자 중에 철저하게 무소유를 지키며 수행한 두타제일(頭陀第一)의 제자이자, 석가모니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보였을 때 미소로서 대답한 승려이다. 반면에 아난은 부처님의 비서실장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제일 많이 들었던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제자였고,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밖으로 나와 사라쌍수를 붙들고 가장 슬피 울었던 승려이다. 이런 사연을 당시 돈황의 수행자나 민초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칠존불의 출현을 보아서 나그네는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420굴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사실은 불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어설픈 수준이지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천장에는 법화경변상도, 서쪽 벽 위에는 유마경변상도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돈황 에까지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한 <법화경>과, 재가불자인 유마힐이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문답한 <유마경>의 세계가 차츰 알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초기 굴에서는 석가모니불의 전생 이야기를 다룬 본생담 등 불전화(佛傳畵)가 그려졌지만 200년이 지난 이제는 그 수준을 높여 경전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회화의 수준이 아직 어수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수준이 바탕이 되어 초당(初唐), 중당(中唐)을 거쳐 성당(盛唐)에는 불교문화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예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문화에는 비약이 없는 법이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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