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관리자
중국 불교명소-실크로드여행/참선 여행
 
 
  - 개화기에 접어든 석굴의 불교문화
 
실크로드 기행 - 석굴 사원
 
 
나그네의 피로 풀어 준 두 상징



석굴들을 흥분 상태에서 접하다 보니 피로가 엄습해 온다. 컴컴한 굴 안에 들어섰을 때는 불상과 벽화의 흡입력으로 환타지아 상태로 빠져들지만 다른 석굴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는 힘이 소진되어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고 사막의 강렬한 햇볕 때문에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벌써 일행 중에 고향 친구이자 문학평론가인 아주대학교 송현호 교수는 백양나무 숲 그늘에 앉아 있다. 볼 수 있는 석굴들이 더 있는데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그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한중인문과학회의 실무를 보고 있는 그 친구 덕분이다. 몇 년 전부터 매년 중국에서 세미나를 개최하고 유적지를 탐방하니 동행하자고 권유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학회를 따라와 보니 일장일단이 있다. 단체의 일원이므로 학회가 정한 일정에 따라야 한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장점은 이미 짜여진 계획에 따라 움직이므로 교통편이나 숙소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더 가보고 싶은 유적이 있으나 그냥 지나친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돈황에서 머무는 3일도 나그네에게는 짧기만 하다. 그러니 나그네는 백양나무 그늘에 앉아 쉴 수가 없다. 다시 들어간 석굴은 323굴이다. 초당(初唐) 때 개굴한 323굴은 두 가지의 상징적인 사건이 공존하는 굴이다. 그 하나는 서역의 세계를 중국에 최초로 알린 장건(張騫)이 그려진 벽화 "장건출사서역국(張騫出使西域國)"이다. 또 하나는 미국인 위너가 굴의 남쪽 벽에 있는 "아소카왕 금상출현전설도(金像出現傳說圖)"의 중앙 부분을 훔쳐가 버린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장건이 위대한 선조라면 위너는 서양의 약탈자라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건이 한 무제 때 서역으로 가게 된 사연은 흉노의 빈번한 침략 때문이었다. 전투에 강한 흉노는 진시황제의 공격을 받아 고비사막 북쪽으로 일단 후퇴했지만 진말한초의 혼란기를 틈타 다시 시황제가 진흙으로 쌓은 만리장성을 넘어 타림분지를 장악하였다. 이에 한 고조는 정벌을 위한 대군을 보냈지만 백등(白登)이란 곳에서 7일 간이나 포위되는 등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흉노 왕에게 비단과 공주를 보낸 뒤에야 그들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조에 이어 황제가 된 무제는 다시 흉노의 정벌을 계획하였다. 마침 무제는 흉노인 포로를 심문하던 중에 솔깃한 정보를 하나 얻어냈다. 30여 년 전, 하서주랑을 지배하던 월지국이 흉노에게 쫓겨 지금은 이리지방으로 도망가 있지만 언젠가 복수하려 한다는 정보였다.

장건의 충성심과 벽화 무제는 즉시 대월지국에 보낼 사자를 구하였다. 대월지국과 한이 동시에 협공한다면 제 아무리 전투를 잘하는 흉노라 하더라도 필승하리란 계책에서였다. 이때 사자로 나선 사람이 장건이었다. 기원 전 139년에 장건은 노예 출신의 호인 감보(甘父)와 하인 100여 명을 데리고 하서주랑, 즉 감숙지방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감숙지방에 이르러 장건 일행은 흉노 군사에게 붙잡히고 만다. 장건은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장건은 자신의 풍모에 반한 흉노 왕의 회유책에 의해 흉노인 처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이후 장건은 십여 년 동안 흉노인 여자와 가정을 이루며 산다. 살다 보니 자식도 생겼다. 자연 흉노인들의 감시도 소홀해지게 되었는데, 이때 장건은 아내와 부하들을 모아 서쪽에 있는 대월지국으로 탈출하였다. 수일만에 도달한 곳은 대원국(大宛國;현 페르가나 지방)이었고, 대원은 한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나라였으므로 장건 일행에게 호의를 보이며 강거국(康居國; 시르다리아 지방)까지 안내인을 붙여주었다. 대원국의 부탁을 받은 강거국은 다시 장건 일행을 월지국으로 안내해주었다. 감숙에서 쫓겨간 대월지국은 대하국(大夏國)을 복속시키고 비옥한 땅을 발판 삼아 인구 40만의 큰 유목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한이나 흉노와도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말 그대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대월지국 왕은 한과 협공하여 흉노를 공격하자는 장건의 집요한 설득에도 마이동풍일 뿐이었다. 1년 동안이나 왕을 설득했지만 수포로 돌아가자, 장건은 할수없이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굳힌다. 그러나 그가 흉노를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타림분지가 모두 흉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건은 감시망이 허술할 것으로 믿었던 호탄을 경유하는 타림분지의 남로(南路)를 택하여 나아갔지만 결국 잡히고 말았는데, 흉노국의 후계자 문제로 암투가 벌어진 사이에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흉노인 아내와 100여 명이었던 하인이 단 두 명밖에 살아 남지 못했다. 그가 장안을 떠난 지 13년에 걸친 서역국 여행이었다. 장건이 보고 온 서역의 이야기는 한 무제를 더욱 자극하였다. 소국들에 대한 정보와 그곳의 특산물, 예컨대 수박과 포도, 쌀과 보리 그리고 한혈마(汗血馬)란 명마에 대한 이야기는 정복왕인 한 무제를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서역국의 정보를 가지고 돌아온 장건의 충성심은 두고두고 중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장건출사서역국"이 벽화에 그려진 이유는 서역을 지배하고 있던 한족들이 자신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지와도 무관치 않을 듯싶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듯 장건 역시 서역을 발견한 공로가 있으니 한족이 서역을 지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도둑 맞은 벽화속의 황금선박 323굴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은 아소카왕금상출현전설도에 관한 이야기다. 아소카왕의 금상이 물 속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구제하게 될 터인데, 그 금상을 옮겨 실은 배 부분이 사라져 허옇게 변해버린 것이다. 스타인과 펠리오에 이어 돈황으로 달려온 미국인 위너가 바로 그 부분에 끈끈한 접착제를 바른 천을 씌웠다가 굳은 후 벽화의 표면을 훔쳐가 버렸기 때문이다. 위너는 이것 말고도 328굴의 보살 등 5일 동안 막고굴에 머물면서 벽화를 훼손하고 그 일부를 훔치어 갔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외국인도 아닌 중국인 스스로 323굴 입구에 있는 두 개의 동굴을 문화혁명 때 파괴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너 등의 약탈자에게 "보호와 연구"라는 억지의 구실을 주고도 있는지 모른다. 나그네가 세미나에 참석한 중국의 교수들을 만나 들은 얘기지만 문화혁명이 중국의 문화를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했는지 지금도 그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유물 파괴뿐만 아니라 대학 사회의 학문적 깊이도 문화혁명 이전보다 경박해졌고 일반 사람들의 심성까지 황폐해졌다는 것이다. 충성심 하나로 서역 만리를 오고간 너무나도 인간적인 장건의 얘기가 길어져 초당의 석굴 감상을 짧게 끝내 수밖에 없지만 아무튼 323굴을 비롯하여 초당의 대표적인 굴은 320굴, 321굴, 324굴, 329굴, 57굴 등이다. 그중에서도 320굴은 수나라 때 보이기 시작한 변상도가 좀더 세련되게 승화된 아미타경변상도가, 321굴에서는 초기 굴에서부터 보인 천녀와 비천상이 무르익은 기법으로 천장을 날고 있고, 322굴에서는 두 그루 보리수에 걸려진 일산 아래서 부처님이 설법을 하고 있는 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57굴에서는 보살의 목에 보인 영락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고, 329굴에서는 초기 굴에서부터 시작한 말각조정 복두형의 천장에 그려진 벽화가 비로소 예술적으로 완성된 느낌이다. 한 마디로 초당의 석굴들에 그려진 벽화와 불상은 이제야 중국의 불교문화가 개화기에 접어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다. 꽃봉오리가 막 피어나려는 개화기의 꽃에서 그 꽃의 혼을 본다는 시인도 있다. 그렇다. 개화기에 접한 초당의 석굴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지순한 불심이 절로 감지된다. 나그네가 지금 만나고 있는 불상과 벽화라는 것도 신앙심이 빚은 순수한 혼의 결정체가 아니겠는가.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1
 
 
     
 
주인장 연락처 E-Mail : namo80@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