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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고굴의 두 가지 미스터리
 
실크로드 기행 - 막고굴 벽화
 
 
미륵부처님을 크게 모신 뜻

숙소로 돌아온 나그네는 마침내 코피를 흘렸다. 입안이 찝찔하여 침을 뱉어보았는데 피가 묻어 나왔다. 티슈를 코에 갖다 대니 진홍색의 피가 먹물처럼 듬뿍 묻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번 터진 실핏줄은 몇 장의 티슈를 더 버리고서야 멎는다. 돈황이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이자 사막의 건조한 기후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막고굴과의 격렬한 만남에서 온 탈진 현상이 아닌가 싶다. 일행 중에서 코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나그네뿐이다. 그렇다. 나그네는 막고굴의 벽화들과 밀애를 즐겼다. 눈으로 간음하고, 손으로 애무하고, 몸으로 성교를 한 느낌이다. 5호 16국에서부터 시작하여 청에 이르기까지의 벽화들은 컴컴한 석굴 깊숙한 곳에서 온갖 기교로 나그네를 흡입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미답으로 남은 벽화가 많다. 송, 원, 청나라의 작품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애석하게도 당보다 못하다. 당에서 만개하였다면 그것들은 떨어진 꽃에 불과하다. 당을 보고 나서 그 작품들을 보면 안타까움과 아쉬움만 더 남는다. 누가 뭐라 하여도 불교문화의 정점은 중당과 성당이라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만당만 하여도 벌써 어딘가 허허로움이 스며 있다. 그러니 그 이후의 불교문화를 말하여 무엇하리. 숙소에서 막고굴을 떠올려보니 다시 두 가지의 의혹이 인다. 누가 얘기해 준 것이 아니다. 한족 출신의 이신 씨의 설명에도 없는 얘기이다. 막고굴의 중심 동굴인 96굴에는 미륵불이 안치되어 있다. 초당 때 만들어진 이 미륵불은 35미터의 크기로 막고굴의 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당 때는 키가 3층으로 된 동굴이었지만 청 때 5층으로 높아지면서 벽화가 그려졌고, 다시 중화시대에 7층으로 개축되었다. 또 하나의 대형 미륵불이 있다. 성당 때 29년 동안에 걸쳐서 만들어진 130굴의 26미터 크기의 미륵불이다. 이곳의 천장에는 석굴에 나타난 것 중에서 가장 큰 2미터 크기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벽화는 불상이 만들어진 이후에 그려진 만당 때의 것이란다. 손도 너무 크기 때문에 한쪽이 파손되어 있는데, 왼손은 당 때 것이지만 오른손은 청 때 다시 만들어진 재현품이다. 이렇게 큰 불상을 만들려면 이목구비도 많은 양의 진흙이 필요하였겠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지혜를 발휘하였다. 주름 부분은 짚을 넣고 곡선을 만들어 그 위에 진흙을 덧씌운 것이다. 현재는 벌레들이 짚을 다 먹어버려 주름 속은 텅 비어 있는 상태이다.

미래에 대한 간절한 희망 그런데 막고의 불상 중에서 가장 큰 불상이 왜 미륵불인 것일까. 이것이 나그네에게는 떨쳐버릴 수 없는 하나의 의혹이다. 서역만 해도 석가여래불상에 이어 관음보살상이 많다. 그러나 돈황에서는 빼어난 관음보살상을 볼 수 없다. 초기 굴에서 보았던 두 다리를 교차해서 앉은 교각보살상도 미륵이었을 뿐이다. 그 시대를 나타내는 상징의 강도는 조형물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돈황의 막고굴에서 가장 강조된 불상은 미륵불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석굴들의 한 중심에 있고, 가장 큰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미륵불은 현재의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가 아니라 앞으로 좋은 세상을 펼쳐 보여 줄 미래의 부처이다. 지극히 현세적인 중국인들의 기질에 맞지 않는 부처일 법도 한데, 야구로 치자면 4번 타자처럼 그들은 왜 미륵불을 중심 축으로 생각하고 조성하였을까. 잦은 전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의 황폐해진 마음을 다독이고자 미륵불을 조성한 정치적인 목적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전시 효과적인 그런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혹시 황제가 중생들이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미륵불의 존재를 닮아보려고 조성하였던 것은 아닐까. 자신을 살아 있는 미륵불로 불리어지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미륵불과의 동일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황제의 절대 권력은 백성을 압도하며 그것은 크기로 나타난다. 그래서 미륵불은 다른 불상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커졌던 것은 아닐까. 또 하나의 의혹은 16굴 입구에 있는 17굴의 비밀스런 역사이다. 17굴은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리기도 한다. 거기에서 수많은 고문서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17굴은 신라의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되어 오다 프랑스인 펠리오에 의해 탈취당한 석굴이기도 하다. 원래 16굴이 만들어진 것은 돈황이 토번의 지배에서 벗어난 당 선종 때(848년)이다. 당시 돈황의 유력가인 한족 출신의 장의조(張議潮)가 토번으로부터 돈황을 수복하고 귀의군절도사가 되어 평소 가까이 지내던 고승 홍변의 자문을 받아 개굴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17굴은 장의조가 홍변을 위해 개굴한 일종의 승방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홍변의 상이 16굴에 오랫동안 안치되어 오다가 다시 17굴로 간 것은 제 자리를 찾은 셈이다. 이런 역사적인 유추 말고도 17굴 벽 정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보리수 아래선 풍만한 느낌의 시녀인 공양상과 커다란 부채를 든 시자상이 그려져 있다. 나무 가지에는 또 좌우로 가방과 정병이 걸려 있다. 이 벽화를 보면 무언가를 보좌하는 협시상이 분명하므로 당시 하서지방의 도승통이었던 홍변의 상이 정말 제 자리를 찾아들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나그네의 의혹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경을 보관해 오던 17굴을 어떤 이유로 언제 봉쇄해버렸을까 하는 의문이다. 돈황문물연구소 소장은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한다. 그 한 가지는 11세기초(1034-1035) 서하가 돈황을 공격해 온다고 하니까 승려들이 불경과 고문서들을 보관하기 위해 17굴 입구를 막아버렸을 것이라는 설이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17굴에서 발견된 고문서들 중에는 11세기초 이후의 것은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승려들이 서하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갔다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더욱이 서하는 불교를 신봉하는 국가였고, 그들이 돌아왔더라면 17굴은 분명 다시 개방되었을 것이 아닌가.

장경동의 비밀스런 역사 또 하나는 10세기말 카쉬가르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를 믿는 카라칸 왕조가 동진해 오자 서하가 거기에 대비해서 돈황의 귀중한 고문서를 17굴에 보관케 하고 굴을 막아 그 위에 위장술로 벽화를 그리게 했을 거라는 설이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16굴의 벽화가 서하 시대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설도 서하가 돈황에서 연호를 사용하는 등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시기가 1072년 이후이므로 카라칸 왕조의 공격에 의한 굴의 봉쇄설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굴의 봉쇄가 11세기초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 진실은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겠는가. 막고굴의 미륵불과 장경동이라 불리는 17굴의 의혹은 언젠가 환히 밝혀지리라 믿는다. 17굴에서 보았던 보리수 잎들이 새삼 떠오른다. 비록 벽화지만 햇볕을 받는 빛의 양까지 그려진 나뭇잎들은 아직도 푸르게 팔랑거리는 듯 하였다. 그 순간 나그네는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강>이란 그림에 나오는 나뭇잎을 다시 보는 것 같은 기쁨이 일었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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