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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명소-실크로드여행/참선 여행
 
 
  - 양관을 나서면 적막강산 아닌가
 
중국불교성지 - 실크로드기행
 
 
돈황의 살림살이 엿보기


오후가 되면 돈황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 돈황고성과 양관을 들러 볼 모양이다. 돈황 시가지를 빠져 나와 사막 가운데에 있는 돈황고성(敦煌古城)을 먼저 둘러본다. 돈황을 사주(沙州)라 부르던 당나라 때의 성을 일본인들이 영화를 찍기 위해 재현한 것이어서 별 감흥이 일지 않지만 고증만큼은 철저하게 거쳤다고 한다. 실제의 고성지는 돈황의 서대가(西大街) 끝 변두리, 백양나무 숲이 울창한 곳에 있지만 중국인들이 사막 가운데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성을 재현케 한 것은 현명한 일이다. 비록 볼품없는 초라한 유적지라도 한번 파괴되면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도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두고 논란이 많은 백제의 풍납토성이나 신라와 가야의 유적지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보호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때가 되면 복원시켜야 한다. 한번의 무관심과 실수로 역사의 현장이 사라져버린다고 가정해 보라.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고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무슨 행사 때마다 반만년 역사와 단일민족을 운운하는 것은 부끄럽고 낯간지러운 일이다. 중일 합작의 <돈황>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고성은 천년 전의 돈황 거리를 떠올리게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나그네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본 것은 상점의 이름들이다. 요즘의 여관은 역관(驛 )이고, 쌀집은 미점(米店), 식당은 그때도 식당이고, 술집은 주관(酒館)이다. 요즘의 행정관청은 귀의군 절도부(歸義軍 節度府)고, 당시에는 마약 복용이 사회적으로 별 문제가 없었던지 놀랍게도 마약을 하는 가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승용차를 대여하는 렌트카 회사처럼 당시의 마구간에서는 말을 빌려주기도 하였고, 사막을 가려면 모래바람에 눈을 보호해야 하므로 얇은 철판에다 미세한 구멍을 무수히 뚫어놓은 안경을 가게에서 팔기도 하였는데, 눈을 보호하는 요즘의 선글라스와 다를 바 없다.

사막에 누워 계신 부처님? 고성을 나오면 명사산 방향의 사막 끝에 설산이 하나 보인다. 아스라하게 보이는 산이지만 해발 5천 미터가 넘는 고산이며, 그곳에서 녹은 물이 돈황 시가지까지 흘러와 식수와 농수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돈황의 식수가 미끌미끌하고 찝찝한 맛을 내는 까닭을 알겠다. 물줄기가 끝없는 사막을 거치면서 철분이나 염분이 배어 든 결과이다. 이따금 한나라 때 조성한 만리장성의 잔해가 보인다. 물론 돌이 없는 사막에서는 석성이 아닌 토성이다. 오아시스의 진흙을 퍼 날라다 쌓은 성인 것이다. 사막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도 물이 아닌 무서운 회오리바람이라 한다. 지금 듬성듬성 보이는 만리장성은 사막의 회오리바람이 삼키다 만 잔해인 셈이다. "저 길다란 산이 와불 같지 않습니까? 돈황 사람들은 저 산을 와불산이라 부릅니다." 돈황 석굴에서 보았던 와불과 흡사한 모습이다.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삭막한 사막에서 와불산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니 가슴에 물기가 적셔지는 느낌이다. 사실 사막이 주는 무료함이란 정신을 혼곤케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일행의 대부분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차창으로 모래구릉밖에 볼 것이 없으니 눈을 감게 되고 얕은 수면 상태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돈황에 낮잠을 자러 온 것도 아니어서 애써 눈을 떠 봐도 픙경은 달라질 기색이 없다. 비몽사몽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쓰는 말이 분명하다. 시간이 더 지속되면 육신과 정신이 분리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돌아올 수 없는 땅 차는 돈황에서 70km 떨어진 양관(陽關)으로 접어들고 있다. 돈황 끝에 있는 이관(二關) 중 하나가 양관인데, 이관이라 함은 양관과 옥문관(玉門關)을 가리킨다. 이관을 거쳐 더 가면 '돌아올 수 없는 땅'이라 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들어가면 죽고 만다는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다. 양관과 옥문관은 생사의 경계에 있는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중음(中陰)의 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나라 시인 왕유는 오죽하면 양관으로 떠나는 친구를 전송하면서 부른 <위성곡>에서 양관 너머를 적막강산이라 하였을까. 위성 당 아침비 살짝 뿌린 뒤
주막집 버들빛 한결 새로워
여보게 한 잔만 더 들게나
서쪽 양관을 지나면 적막강산 아닌가.

그런가 하면 왕지환(王之渙)은 자신의 시 <출새(出塞)>에서 '옥문관 밖에는 봄바람조차 넘지 못한다(春風不度玉門關)'고 하였다. 옥문관 밖을 봄바람조차 스러지고 마는 황량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법현이 지은 여행기인 <불국기>에도 양관을 지나 선선국( 善國)으로 가는 동안 열사의 사막이 다음과 같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하(沙河)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막하고 가야 활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가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오직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 준다.' 죽음을 무릅쓴 구법의 길 왕유가 이별의 슬픔을 더 비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양관을 끌어들이고, 왕지환이 죽음의 땅을 강조하기 위하여 옥문관을 시적 소재로 차용하였다면 실제로 사막을 횡단한 법현은 생생한 체험을 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양관 너머의 사막을 마치 이승길이 아닌 저승길처럼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다'라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장삿길에 오른 대상이나 천축을 오가는 입축승들은 그런 죽음의 땅을 넘나들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들에 의해서 문물과 불법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결코 사막의 기후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양관이 천산남로의 관문이라면, 옥문관은 천산북로의 관문 역할을 해온 까닭이다. 그러고 보면 사막은 대상과 입축승들이 사투를 벌인 투쟁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들의 고혼이 떠도는 처절한 중음(中陰)의 땅인 것이다. 현재는 양관에 봉화대 하나가 덜렁 서 있을 뿐이다. 건축물도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합쳐 서너 채에 불과하다. 주거용 집은 회족들이 사는지 원형 천막인 빠오다. 명사산에서 보았던 낙타들이 양관에도 몇 마리가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회족의 여인이 자꾸 낙타를 타라고 간청한다. 나그네는 명사산에서부터 낙타를 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삭막한 양관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아들 딸 낳고 살아가는 그녀의 간청에 지고 만다. 그녀의 조상들 중 어떤 이도 천년 전에는 대상이나 입축승들에게 낙타를 빌려주거나 사막의 길을 안내하며 살았으리라. 낙타의 눈을 보니 짠한 생각이 든다. 녀석도 돈황의 시가지에서 살지 못하고 변두리인 양관까지 밀려난 놈일 터이다. 눈에는 눈곱이 끼어 있고, 가끔 기침을 하듯 쉰 소리를 지른다. 일찍이 부처가 말했던가.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가 병들고 늙어가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슬픔을 뿌리칠 수 없는 존재라고. 낙타의 등이 나무등걸처럼 너무 딱딱하다. 녀석이 뚜벅뚜벅 걸을 때마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나그네의 엉덩이뼈 속으로 파고든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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