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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열, 최거, 최조, 최감
 트루판은 위구르어로 '파인 땅'이란 뜻이다. 한자어로 토노번(吐魯番)이라 불리는 트루판에는 실제로 바다의 수면보다 낮은 해저 280미터가 되는 지역도 있다. 지구상에서 사해(死海) 다음으로 낮은 지역인데, 이곳 역시도 실크로드를 연결짓는 수많은 오아시스 도시들 중에 하나다. 위구르인들은 트루판을 가리켜 최열(最熱), 최저(最低), 최조(最早), 최감(最甘)의 도시라고 요약해서 설명한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최고 온도가 섭씨 50도에 이르고 그런 날 지표면 온도는 70도에 다다라 땅 위에 놓은 계란이 익어버릴 정도이니 최열이고, 최저는 해면보다 낮은 곳이기 때문이고, 최조는 습도가 낮아 서 몹시 건조하다는 것이고, 최감은 햇볕을 잘 받은 포도의 단맛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일행이 투루판 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6시 20분으로 역 주위에는 아직도 어둑한 기운이 돈다. 짐을 차에 옮겨 정리하다 보니 역사 시계탑의 시계가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트루판 역시도 돈황처럼 역과 시가지가 멀리 떨어져 있는 모양이다. 2시간 정도 달려야 트루판 시가지가 나온다고 하니 적어도 100km 이상은 될 것 같다. 트루판은 전한(前漢) 시대에는 차사전국(車師前國)이란 나라였다. 유목민 터키족과 농경민 아리아족이 섞여 흉노족에게 조공을 바치며 우루무치까지 영토를 넓히며 살았었다. 그러다가 한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와 흉노를 멀리 몰아내자 한에 복속된다. 이후 흉노가 다시 한을 밀어내자, 차사는 자신의 땅을 흉노에게 내어주고 트루판 서북쪽으로 옮겨가 살게 된다. 그때 차사전국의 도읍은 교하성(交河城, 야르호토)이었고, 한은 동남쪽 카라호토에 둔전병을 두어 세력을 넓히려 하였으며 그들은 트루판을 고창(高昌) 혹은 호토라 불렀다. 차사전국이 멸망한 것은 북량왕의 동생인 흉노족 출신의 저거씨(沮渠氏)가 422년에 트루판 땅으로 망명해 와 고창국(高昌國)을 세우면서였다. 차사전국은 450년에 완전히 멸망하고, 이후 고창국은 북위 효문제 때(497년) 한인(漢人)에 의한 국씨(麴氏) 왕조가 막을 올린다. 바로 이 왕조가 '국씨 고창국'인데 640년 당에게 멸망할 때까지 160년간 번성하였다. 이후 위구르인들은 천산산맥이 가까운 서역으로 가 살게 되는데, 지금도 그곳을 튜르케스탄(위구르인의 땅이란 뜻)이라 부르고 있다.
위구르인들의 지난날 6시 50분이 되니 누런 황무지 저편 천산산맥 너머로 일출의 장관이 펼쳐지고 있다. 차를 잠시 세워두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일행 모두가 일출의 장관에 숙연해진다. 차문을 열고 나가고 싶지만 고속도로이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가지로 접어드니 빵처럼 생긴 모자를 즐겨 쓰고 다니는 위구르인들의 모습이 트루판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돈황에서도 보았지만 위구르인들의 얼굴은 한족과 많이 다르다. 쌍꺼풀의 깊은 눈과 오똑한 코에다 얼굴은 동방계 유럽인인 터키인과 비슷하다. 사실 위구르인은 일찍이 몽골 고원에서 살았던 튜르크의 후손들로 중국인들은 그들을 회홀 혹은 회골로 불렀다. 그들은 744년에 몽골 북부의 오르콘 강가에 위구르국을 세우고 돌궐문자를 사용하며 마니교를 국교를 삼는 등 날로 번영하다가 9세기로 접어들어 가문의 분열과 토번(티베트)과 카를루크(천산산맥의 북쪽의 투르그계 부족)의 잦은 침략, 그리고 840년에 키르키즈(예니세이강 상류의 수렵민 부족)의 대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나라를 잃은 위구르인들은 하서주랑의 감주와 숙주, 그리고 돈황으로 내려가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다가 서하(西夏)에 합병되었고, 일부는 천산산맥 기슭으로 올라가 위구르 왕국을 재건하여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믿다가 차츰 이슬람화 되었는데 이때 위구르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처럼 중국화 되지 않고 천산산맥이 가까운 서역을 무대로 주인 노릇을 하다가 1209년 징기스칸에 의해 복속되고, 1759년에는 청에게 넘어가 이때부터 '새로운 강토'란 뜻의 신강(新疆)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일행이 묵을 토노번빈관(吐魯番賓館) 앞으로 난 거리도 포도넝쿨이 무성하다. 햇볕을 차단할 목적으로 포도넝쿨을 이용하여 터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승용차와 작은 마차가 포도넝쿨 그늘을 이용하여 다니는데 돈황과 또 다른 이국적인 풍경이다. 거리의 건축물도 이란이나 인도 풍의 서역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한마디로 중국 땅이 아닌 것 같다. 거리에 부착된 글씨도 한자와 위구르어를 병기하고 있다. 냉정하게 보자면 중국이 분리시켜 독립을 시켜주어야 할 땅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는 중국정부가 너그럽게 허락할 리가 없다. 티베트를 보면 알 수 있다. 티베트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트루판보다 더욱 비중국적인데도 무력으로 침공하여 중국의 지배를 받게 하고 있지 않은가. 빈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일행은 고창고성으로 향한다. 밤 열차를 타고 오느라 지친 사람도 있지만 더워지면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트루판의 기후 때문이다.
현장스님의 체취 느껴지는 듯 고창성은 현장과 고창국왕의 사연이 얽힌 곳이다. 현장이 구사일생으로 이오국(伊吾國, 현재의 하미)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고창국의 사자가 와 있었는데, 그는 현장의 인품에 반했다. 사자가 고창국으로 돌아가 열렬한 불교신자인 고창국왕 국문태(麴文泰)에게 보고하자, 왕은 준마 수십 필과 마차를 딸려 환영사절을 보냈다. 현장은 원래 고창국을 거치지 않고 서역으로 가려고 했으나 고창국왕의 간절한 원을 뿌리칠 수 없어 고창으로 향하였다. 지금 나그네가 가고 있는 곳은 현장이 불심 깊은 왕의 환대를 받았던 현장이기도 하다. 고창고성은 트루판 시가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데, 입구에는 고성까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물론 약간의 사례를 해야 하지만 날씨가 더워 차양이 드리워진 마차를 타지 않을 수 없다. 돈황과 달리 낙타 대신에 노새 같은 작은 말들이 운송 수당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색다른 유목민 문화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젊은 마부가 "츄워, 춰!" 하고 소리 지르자 말은 딸랑딸랑 방울 소리를 내며 달린다. 멀리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고성 안의 집들과 사원이 보인다. 흙의 건축물들이 천년이 넘도록 무너지지 않고 남은 것은 건조한 기후 때문이리라. 현장을 뜨겁게 환영하는 인파가 마차가 달리는 양쪽에 도열해 있는 것 같다. 고창국왕은 현장의 설법을 듣고는 존경해 마지않는다. 현장의 설법을 들었던 장소인 사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지붕이 둥그런 돔형으로 돈황에서 볼 수 없었던 완연한 서역 풍이다. 고창국왕은 현장의 설법을 계속 듣기 위해 그의 천축행을 만류한다. 입축을 하지 말고 고창국의 국사(國師)가 되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왕의 진심이 어떠했는지는 설법을 들을 때 그의 행동을 보면 짐작이 된다. 사원의 바닥에 붉은 카페트를 깔고 왕이 설법단 앞에 엎드리면 현장이 왕의 등을 밟고 올라갔던 것이다. 사원 안의 자리 배치도 현장이 맨 앞에 그 다음은 왕이, 그 다음은 승려가, 그리고 신하와 백성 순서로 앉았다. 이러한 예는 실크로드 어느 나라에도 없던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현장은 입축의 구법의지를 단식으로 나타냈다. 왕이 허락할 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고비 사막을 지나 올 때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도 몇 날 며칠을 견딘 적이 있는 현장이었다. 할 수 없이 왕은 현장에게 세 가지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왕과 형제의 의리를 맺는 것이고, 둘째는 떠나기 전에 1개월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해 달라는 것이고, 셋째는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돌아오는 길에 3년간 공양을 받아 달라는 것이었다. 고창국의 멸망 현장이 약속을 하자 왕은 한 달 후, 4명의 종자와 가사 30벌, 황금 100량과 은전 30,000매(枚), 능견(綾絹) 500필, 말 30두, 일꾼 25명을 선사하였다. 뿐만 아니었다. 왕은 신하 환신(歡信)에게 능견 500필과 과일 2차와 함께 현장을 잘 안내해 달라는 의뢰장을 지참시켜 서역에서 가장 강성한 서돌궐국 왕 통엽호카간에게 보냈다. 환신이 통엽호카간과 인척이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24국의 왕들에게 능견 1필과 의뢰장을 보냈다. 이러한 배려로 현장은 무사히 서역을 통과하여 천축에 이를 수 있었다. 고창국왕의 이러한 후원이 없었다면 현장의 입축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7년 후 드디어 현장은 귀국길에 오른다. 그는 고창국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쉬운 바닷길보다는 목숨이 위태로운 험난한 육로를 택한다. 그러나 이미 고창국은 당에 멸망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겠기에 현장은 천산남로를 택하여 장안으로 무사히 돌아온다. 고창국은 현장이 천축에 가 있는 동안 당의 6만 군사에 의해 멸망했는데, 그때 고창국왕은 놀라서 급사를 하였고, 두 왕자는 투항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원 안의 벽에는 등불을 놓은 감실이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본 감실의 모양이나 기능이 흡사하다. 부처는 <중아함경>에서 말했다. 지금이나 여래가 죽은 후에나 진리를 등불 삼아 의지하라고 했다. 진리를 등불 삼아 살려고 한 고창국왕의 삶이 천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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