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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슬픔 속의 꽃
 트루판에서 낮에 어디를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늘만 벗어나면 마치 화재 현장 곁에 있는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확확 끼친다. 지형이 솥처럼 오목하기 때문에 복사열이 들끓는다. 그러니까 낮에 거리를 나선다는 것은 뜨거운 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그네도 빈관의 별관 숙소에서 본관 로비로 가는데, 불과 2,3분의 거리지만 화재 현장을 탈출하듯 뛰었다. 오죽 더운 곳이면 트루판을 한때 '불의 고장'인 화주(火州)라 불렀을까. 유적지를 가려면 오후 5시가 넘어야 한다. 그 전에는 빈관에서 빈둥거리거나 찾아갈 유적지의 안내도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나그네가 오늘 가려는 곳은 교하고성(交河故城)이다. 나그네는 교하고성에 관심이 많다. 당나라 때 그곳을 배경으로 하여 창작된 시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원전 250년부터 차사전국의 도읍이었던 교하성은 한나라와 흉노의 지배를 받다가 당나라 때 도독부가 설치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였다. 커다란 냇물이 교차해서 만나는 지점으로 천연의 요새인 교하성은 후한의 장수 반초(班超,32-102)가 와 있을 때나 당대(唐代)에도 야전군인 둔전병을 두어 서역인을 통치한 곳이다. 그러나 장안에서 교하성까지는 몇 만리의 먼 길로 병역의무를 치르는 젊은 군병들이나 처자를 떼어놓고 온 장수들의 외로움은 항수병을 깊게 하였을 것이다. 우리 같이 조그만 땅덩어리에서도 전방과 후방이 갈리는데, 황량한 고비사막을 건너 수 만리 변방인 서역 땅으로 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고 희생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문학이란 인간의 고난과 슬픔 속에서 꽃을 피워왔다. 당의 전쟁시인이라 불리는 이기(李 , 690-751)와 장삼이 절창의 시를 남기고 있다. 모두 교하성을 소재로 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기의 <고종군행(古從軍行)>이란 시는 이렇다. 낮에는 산에 올라 봉화를 바라보고 해질녘에는 교하에서 말에 물을 먹이네. 행인의 밥솥에는 모래바람이 짙고 공주의 비파 소리에는 원한이 깊다. 야영하는 만리에는 성곽 하나 없고 눈비 분분하게 대사막에 연이었네. 북쪽의 기러기 슬피 울며 밤마다 날면 오랑캐 아이 눈물은 두 줄기로 떨어진다. 듣건대 옥문관은 아직 막혀 있다는데 마땅히 목숨 걸고 경차를 따라갈까. 해마다 병사들의 뼈는 황량한 사막에 묻히는데 포도만 부질없이 한나라로 들어오네. 해마다 병사들의 뼈가 사막에 묻혔다고 한 것을 보면 변방으로 나간 젊은이들이 전쟁으로 죽기도 하지만 병들어 숨을 거두기도 했던 모양이다. 시인 이기는 <고종군행>이란 시에서 반갑게 돌아오는 병사보다 장안에 사는 한인들에게 보내오는 서역의 특산품인 포도만 눈에 띤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잠삼도 '봉대부에게 주는 시'에서 봉상청(封常淸)이란 대부를 칭송하는 시에서 교하성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교하성의 풍경이 나오는 시의 일부만 보자. 오랑캐 예속 따라 명멸을 받고, 새벽에 윤대를 떠났다. 저녁에 교하성에 닿을 때 화염산은 뻘겋게 치솟고 구월에도 빰이 뻘뻘 열풍은 모래를 날린다. 무슨 음양의 조화이기로 비도 눈도 내리지 않은가. 9월인데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모래바람의 열풍이 분다 하고, 훗날 <서유기>의 무대가 되고 있는 화염산(火焰山)을 불길이 치솟는 형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폭염의 땅 트루판을 사실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더욱이 고창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당시 역사(驛舍)의 장부에서는 잠삼의 외상 기록이 나와 변방으로 돌면서 궁핍해진 그의 고달팠던 삶을 추측케도 한다.
대승불교의 길목
나그네가 교하고성에 도착한 것은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지는 석양 무렵이다. 교하(交河)라는 글자대로 교하성은 두 줄기의 물이 합수되는 가운데 삼각지처럼 자리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만든 성이 아니라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에 그만인 30미터 높이의 절벽에 자리한 요새이다. 남북으로 1600m, 동서로 330m인 성안은 입구를 조금 지나면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망루가 있고, 길 끝에는 광장과 사원 터가 있다. 모두가 진흙벽돌로 쌓은 건축물들이다. 사원으로 가는 길가에 소소초(蘇蘇草) 혹은 낙타가 잘 먹는다 하여 낙타초라 불리는 로우타우차우가 풀숲을 군데군데 이루고 있다. 건조한 사막에서 자라는 로우타우차우에는 가시가 달려 있기 때문에 낙타에게 통째로 먹히지 않고 생존하는 모양이다. 로우타우초우를 먹는 낙타는 입안이 피투성이가 된다는데, 사막에서 생존하는 식물과 동물의 눈물겨운 존재방식이 아닐 수 없다. 마침 모래알처럼 작은 로우타우차우의 꽃들이 붉게 피어 있는데 낙타가 흘린 피처럼 저녁 햇살을 받아 선연하다. 사원의 이름은 대승사다. 이름만 보아서도 대승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절의 가람배치도 실크로드르를 타고 우리에게 전해졌을 터인즉 우리 눈에 낯익다. 입구를 지나면 좌우에 북을 두었던 고루와 종을 두었던 종루가 있고, 법당인 대전(大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승방이 배치되어 있다. 다만 대전 안은 우리와 다르다. 돈황의 초기 석굴에서 보았던 것처럼 서역 풍으로 사각기둥의 감실마다 불상이 안치되어 참배자들이 빙빙 돌면서 기도를 하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교하성 역시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 관청도 있고, 그 건너편에는 죄인을 다스리는 감옥도 있고, 당시 성안에서 상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 우물도 여러 개나 있다. 천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감옥으로 텅 빈 진흙방이지만 고개를 들이대보니 목덜미가 으스스해진다. 어느 신문에선가 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이 부족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교하성에 사람이 넘치는 그때도 그랬을까. 예부터 지금까지 감옥이 사라지고 없는 그런 이상적인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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