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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바람 같은 춤
간밤에 포도넝쿨이 하늘을 가린 공터에서 무희들을 보았는데, 잊혀지지 않는 춤이 하나 있다. 한 다리를 들고 또 다른 다리를 이용해서 팽이처럼 도는 춤이다. 현대 무용에서 많이 보는 아크로바트와 같은 격렬한 동작으로써 원래 중국에는 빠른 동작의 춤이 없었고,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서역의 춤이라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당나라 때에 그런 춤을 '서역에서 온 빠른 춤'이라 하여 호선무(胡旋舞)라 하였고, 무희를 호선녀(胡旋女)라 하였다. 돈항 막고굴 112굴의 아미타정토경변상도에도 호선무를 추는 호선녀가 등장하고 있다. 112굴이 당나라 때의 벽화임을 감안해 보면 수도 장안에는 호선무가 유행하여 귀족들의 넋을 빼앗았을 것 같다. 당 시인 백거이의 <호선녀>라는 시에도 다음과 같이 춤의 빠른 동작을 인상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호선녀, 호선녀, 마음은 비파소리에 감응하고 손을 북소리에 따라 움직인다. 비파소리, 북소리 하나가 되면 날렵하게 양 소매를 올려 감으며 바람에 눈 날리듯 광야에 쑥 흐트러지듯 죄로 돌고 우로 돌아도 지칠 줄 모르고 수만 번 돌면서 그칠 줄 모른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비할 것 없이 달리는 차바퀴도 회오리바람도 이보다 느리구나. 어제 보았던 위구르인 무희 동작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위구르 악사들의 현악기와 타악기 소리에 맞추어 바람에 눈 날리듯 광야에 쑥 흐트러지듯 달리는 차바퀴보다 빠르게 좌우로 빙빙 돌면서 춤을 추었던 것이다. 돈황의 석굴에서 보았던 호선무를 다시 트루판의 거리에서 보다니 나그네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다만, 무희들이 마지막에 인본인들을 위해 엔카를 부르는데, 그렇다고 옹졸하게 일어설 수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자리를 지켰던 것이 씁쓸할 뿐이었다. 조용필이 부른 <서울, 서울, 서울> 같은 대중가요가 나왔더라면 흥을 내어 합창을 했을 텐데. 죽음은 휴식의 기간  나그네는 아침 일찍 빈관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소공탑(蘇公塔)으로 가본다. 1779년 트루판의 군왕이었던 소래만(蘇來滿)이 아버지 액민화탁(額敏和卓)의 공적을 기려 청나라 황제의 도움을 받아 세운 44미터 높이의 탑이다. 액민화탁 군왕은 청나라 건륭년간에 트루판의 반란군을 진압하여 청 황제로부터 환심을 산 듯하다. 못을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고 다이아몬드무늬와 체크무늬, 꽃무늬와 빗무늬 등 14가지 무늬를 이용하여 쌓은 이슬람 건축 양식인데, 옆에 붙은 회교사원 예배당은 입구가 서쪽을 향해 있다. 회교성지 메카가 있는 방향이 서쪽이기 때문이다. 이곳 회교도들은 닭이 울기 전에 시작하여 달이 뜰 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하루에 5번 절을 하고, 예배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아랍어로 쓴 코란을 먼저 외우고 두 번째는 위구루어로 쓴 코란을 외운다고 안내인이 설명해 준다. 죽기 전에 아랍의 메카에 다녀오는 것이 회교도들의 평생 소원인데, 다녀온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그 표시로 흰 모자를 쓴단다. 돈이 있다고 모든 사람이 메카를 가는 것이 아니라 빈부를 떠나 각 가족 중에서 선발하여 보내진다고 하는데, 다녀오게 되면 남자는 하지, 여자는 하라로 불려지며 스승처럼 받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일행은 더 더워지기 전에 아스타나 고분으로 향한다. 아스타나 고분은 화염산을 마주보고 있고,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란다.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이 5백년간 사용한 공동묘지인데 당시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죽음을 생의 끝으로 보지 않고, 휴식의 기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 죽음이란 영원 속에서 잠시 쉬는 휴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세관이 고분을 화려하고 정성껏 장식하는 고분 미술을 낳았을 터이다. 아스타나 고분에 도착하자 폭염이 벌써 기승을 부린다. 일행 중 어떤 이는 우산을 쓰고 있다. 섭씨 40도라면 지표면 온도는 더할 것이다. 현재 400여기가 발굴되었고, 그 숫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아스타나란 단어가 '휴식의 장소'인데 반해 무덤을 발굴한다는 것은 사자(死者)의 휴식을 방해하는 무례한 행위라는 생각도 든다. 무덤 속 벽화의 감동 분묘형식은 지하 묘로써 땅속으로 들어가는 묘도(墓道)와 묘도 좌우로 부장품을 넣는 이실(耳室), 묘입구문과 묘실로 되어 있다. 특히 나그네가 본 고분 중에서 관심이 가는 것은 상인의 묘다. 그의 출신지가 어딘지는 불분명하지만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트루판에 없는 동물과 식물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아스타나에 묘를 쓴 것을 보면 돈 많은 상인으로 짐작되는데,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으면 자신의 묘에 고향의 풍경을 그려달라고 했을까. 벽에 그려진 새는 원앙새와 제비 등이고, 식물은 특이하게 수련이 그려져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출신의 상인이라는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 같다. 또 하나의 묘는 부부 합장묘인데, 미이라가 유리관 속에 전시되고 있다. 남자는 베개를 베고 있고, 여자는 베개가 없다. 당시의 풍습인지 알 길은 없으나 부부의 인연이 사후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풍속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있다. 천년 이상을 함께 하고 있는 그들 부부를 보고도 가슴이 찡하지 않는다면 가슴속의 사랑이 메마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일이다. 이러한 벽화도 가슴에 감동으로 남는다. 어린이와 청년, 중년과 노년이 그려진 일종의 인생도(人生圖)이다. 차분하게 뜯어보면 대단히 교훈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는 귀엽고 순수하다는 것이고, 청년은 입을 가리고 있다. 입을 가린다는 것은 말을 조심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중년 몸에는 석(石) 자가 쓰여 있다. 돌처럼 굳세고 강단 있게 일하라는 상징이 아닐까. 끝으로 노년의 몸에는 백(白)자가 쓰여 있다. 노년은 남이 자신을 평가하는 공백(空白)의 시기라는 뜻이다. 열정을 앞세워 호기 있게 말을 함부로 내뱉는 청년에게 입을 조심하라는 것은 고금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고분에서 출토된 관용문서들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드시 지니고 여행해야 하는 과소(過所)라는 통행증이 나왔고, 관인이 찍힌 고소장도 출토되었다. 우차에 치여 배상해달라는 고소장인데, 사불나의 아들 금아(金兒)와 조설창의 딸 강실분이 우차에 치였다는 내용의 고소장인 것이다. 관용문서가 아닌 사문서도 나오고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서진 태시(西晋 泰始) 9년(273년)의 문서인데, 적강녀라는 여인이 명주 20필을 주고 목관을 산다는 매매계약서다. 그런가 하면 탄원서도 있다. 장식현(張式玄)이라는 병사가 징집되어 간 뒤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그의 누이동생인 아모(阿毛)라는 처녀가 관청에 올린 탄원서이다. 총명하여 글을 익힌 아모가 애간장을 태우는 부모를 대신해서 관청에 올린 "오라비가 군역에 들어가 교하거방(交河車坊)에 배속되었으나 오늘날까지 돌아오지 않고 생사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군역에 전역된 모양이오나 집안 일도 난처하게 되었으니 아무쪼록 처녀인 저를 붙들어다 오빠와 교대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효심이 지극한 내용이다. 처녀 아모의 마음이 순수하고 아름답다. 동생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고달픈 군역을 하겠다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이 있을까. 총명하고 효성 깊은 아모는 위구르인이었을까, 한족이었을까.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모 같은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싶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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