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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도 - 부처님생애 극적인 8장면
 
 
  팔상도 - 유성출가상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유성출가상 - 성을 넘어 대자유의 도정에 나서시다




유성출가상 - 성을 넘어 출가하시다


태자가 결혼한 후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스물 아홉 살이 되었다. 이 때에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란 사실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문출유의 이야기는 파알리어 성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이야기는 과거불(過去佛, 석존 이전의 부처님) 비팟신과 관련된 이야기로서 나타나 있다.
즉 이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아직 왕자일 때, 수레를 타고 궁전 밖으로 나와 유원(遊園)으로 가는 도중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보도 심각한 반성을 하여 그 수레를 끌고 가던 차부(車夫)와 대담(對談)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후세에는 정형화(定型化)하여 사문출유의 전설이 되었다. 그 전설에 의하면 태자(太子)는 왕성(王城)의 네 개의 문으로부터 출유(出遊)하여 각각 노인(老人), 병자(病者), 죽은 사람, 그리고 수도자(修道者)를 만났다는 것이며, 또 벌레나 새가 서로 먹고 먹히는 광경을 보고, 세상이 비참하고 의지할 바 못됨을 통감(痛感)하고 머지않아 출가를 하게 되는 동기(動機)가 되었다는 것이다.
왕성의 동쪽 문을 나섰을 때, 태자는 백발(白髮)을 늘이고, 허리는 굽고, 간신히 지팡이를 짚고 걷는, 다 죽어 가는 노인을 보았다. 차부(車夫)에게 태자는 나도 저렇게 될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물론 늙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고 대답하자, 태자는 이 말을 듣고 슬픈 마음이 생겨 출유(出遊)를 단념하고 왕성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 서쪽 문으로 나갔을 때에는 병자(病者)를 보았고, 남문(南門)으로 나갔을 때에는 장례(葬禮)의 행렬에 부딪쳤다. 그럴 때마다 태자는 수레를 뒤로 돌려 궁전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부왕(父王) 숫도다나는 초조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태자가 출가하고자 하는 것을 막으려고 태자에게 여러 가지로 충고와 책망을 되풀이했다.
"이 나라의 법(法)에, 아들을 낳고, 가사(家事)나 국사(國事)를 맡길 수 있게 된 이후에 출가수도(出家修道)에 전념(專念)하는 것은 허락이 되지만, 젊어서 세상을 버리고 가사나 국사를 돌보지 않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제발 마음을 돌려서 이 나라, 이 가문(家門)의 일을 걱정하도록 해 주기 바란다."
이렇게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나 태자는 도리어 "왕으로서 만약에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이별이 없다는 이 네 가지 조건을 보장(保障)해 주시면, 출가할 마음을 단념하겠습니다. 아니 후세에 도 다시 생을 얻는 일이 없다는 한 가지 조건만 보장해 주실 수 있다면, 출가는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여러 가지 불전(佛傳)에는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부자간(父子間)의 실제상 대화는 아닐 것이라고 보고, 이러한 대화를 비유(比喩)로 해서 부처님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세간을 생각하는 마음과 세간을 초월한 마음[出世間心] 사이의 싸움을 그린 것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깊이 있는 생각이라고 할 것이다.
태자는 마지막으로 북문(北門)으로부터 출유하였다. 이번에는 길가에서 한 사람의 사문(沙門, 수도자)을 만났다. 퇴색한 옷에 몸을 담고, 위의(威儀)가 바르며 행동이 단정한 스님이다. 태자는 이 수도자의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이것이 내가 갈 길이라고 최후의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 날은 기꺼이 놀이터에 들어가 화려한 옷을 입고, 하루를 즐기었다. 아미 이것이 이 세상일을 마지막으로 결말짓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취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놀이가 끝나고 피곤하여 태자가 망가라 못가의 의자에 기대고 있을 때, 야쇼다라妃가 왕자를 낳았다는 소식이 왔다.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장애(障碍)가 생겼군, 계박(繫縛)이 생겼어." 이렇게 말하였으므로, 사신(使臣)은 왕궁에 가서 그렇게 말씀을 드렸고, 그때부터 이 갓난 왕자의 이름을 '라훌라(羅?羅)'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이 사문출유는 씌어진 이야기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일들이 있기는 있었을 터이지만, 그보다도 더 태자의 인생관을 묘출(描出)하려는 의도(意圖)에서 이와 같이 각색(脚色)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태자가 출가하기 직전에 왕자가 탄생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史實)일 것이다. 태자는 실로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도의 관습으로는 아들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가계(家系)가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종교적으로도 죄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라훌라(장애물)가 생겼군"한 말은 다르게 말하면 "출가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생겼군"하는 말이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심은 이미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태자는 궁성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 길가에 왔을 때, 한 높은 누상(樓上)에서 크샤트리아족(族) 출신의 한 처녀 키사고타미(機舍喬答彌)가 태자의 행렬(行列)과 그 행렬 속의 태자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쏠리는 마음으로 얼핏 이런 노래를 불렀다.
저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행복하겠네,
저런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행복하겠네,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
받드는 부인은 행복하겠네.
노랫소리를 들은 태자는 그 처녀를 바라다 보며, 자기의 반지를 빼 주었다. 태자의 마음을 끈 것은 그 노래 속의 '행복하겠네'(Nibuta)란 말이었으며, 이 말은 태자가 늘 구해 마지않던 열반(涅槃)과 관련이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태자는 궁성에 돌아가자 그 거실(居室)로 들었다. 채녀(?女)는 악기를 들고 노래하며 춤추고 태자의 마음을 위로하려 한다. 그러나 태자의 마음이 그런 것쯤에 동요되거나 유혹 당할 리는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잠이 들었다. 채녀(?女)들도 피로하여 그대로 깊은 잠에 들어갔다. 태자가 얼마 후 잠을 깨어보니 그 잠든 광경이 난잡하고 처량하기란 이루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다. 악기를 든 채 잠든 사람도 있고, 악기를 껴안고 잠든 자도 있었다. 태자는 그 광경을 보고 '마치 무덤과 같다'고 느끼고 출가의 첫 걸음을 내 디뎠다고 전한다.
이러한 묘사는 흔히 불전문학(佛傳文學)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으로서 유명한 것이지만, 그것이 사실 그대로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 단순한 판단일 것이다. 태자에게 이제 이 광경(光景)을 보기 전부터 벌써 몇백 번 '무덤과 같다'고 느낀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여튼 출가의 동기를 뚜렷하게 그려보고자 한 그 의도는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날 밤 태자는 조용히 밤이 깊어 가는 것을 기다렸다. 사랑하는 처와 갓난 왕자에게 무언(無言)의 작별(作別)을 하기 위해 태자비(太子妃)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밤이 깊어지자 태자는 마부(馬夫) 챤나(車匿)에게 사랑하는 말 칸타카(건척, ?陟)에 안장을 얹게 하고 이 말을 타고 몰래 성(城)을 빠져 나왔다. 불전작자들은 이 대목에서도 과장된 표현을 하기를 좋아했다. 애마(愛馬) 칸타카가 태자를 따라 그 거룩한 출가에 동반할 수 있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발을 구르며 소리를 내자 신(神)들은 그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며, 신들은 또 성문을 여는 요란한 소리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주었다는 것이다.
성문을 나와 동쪽으로 향하여 갈 때, 악마는 "태자, 돌아가시오" 하고 유혹을 해왔다.
태자는 "악마는 물러가라, 내게 지상(地上)의 것은 필요가 없다" 고 책망했다.
악마는
"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군" 이렇게 두려워하며,
"그러나 언젠가는 이 사람에게도 마음의 틈이 생길 것이다. 그 때야 말로 내가 그 틈을 탈 때다" 이렇게 생각하며 이때부터 악마는 그림자처럼 태자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자는 밤길을 서둘러 아누피아(阿奴比耶) 읍(邑) 근처에 있는 아노마(阿奴摩)강을 건너, 새벽에 강가에 서서 보석으로 장식된 왕자의 옷을 벗고 걸식사문(乞食沙門)의 옷으로 갈아 입고, 긴 머리칼을 자르며 그 밖의 모든 장식을 다 버리고 말았다. 마부 챤나는 계속해서 태자를 따라가기를 원했으나 태자는 왕자의 의복을 그에게 맡겨 왕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애마(愛馬) 칸다카는 이별의 슬픔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고 전한다.
태자는 이제는 한낱 사문(沙門)이다. 이날부터 그는 육신을 살리기 위해 바리를 들고 걸식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집 저집에서 얻어 모아온 음식이 목구멍을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토하려고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출가란 당시의 풍조(風潮)라고도 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성실하게 인생에 고민을 가진 젊은 사람들은 모두 이 출가의 길을 취해 수도(修道)의 생활에 나섰다. 나중에 불제자(佛弟子)가 된 사람들 중 태자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출가한 사람에 사리풋타(舍利弗)와 목갈라나(目連)가 있다. 마하카삽파(大迦葉)도 부처님을 만나기 전에 출가했었다. 야사(耶舍)나 라다와라(賴?恕羅)도 사치스럽던 그 생활에 고민을 품고 출가했다. 출가가 도대체 수도에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경전에는 이러한 설명이 실려 있다.
"재가의 생활은 장애 많은 먼지의 길이다. 출가의 생활은 큰 하늘과 같은 것이다. 정해진 대로 모두 원만하게 청정한 행을 하고자 하면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알맞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염을 밀고 머리칼을 잘라 없애고, 누런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사문이 되는 것이다."
재가의 생활에 장애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출가의 생활이 성질상 금욕적(禁欲的)인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유리한 조건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출가가 반드시 증오(證悟)의 필연적 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누차 석가도 말한 일이다. 석가는 자주 "재가도 출가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석가의 참 뜻으로 말하면 출가의 의미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捨], 출리(出離)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처자의 은애(恩愛)와 패반(?絆)을 끊고 지위, 명예, 재산의 속박(束縛)을 다 버리고 한 뜻으로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희생적 생활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태자가 출가한 나이에 관해서는 19세 설(說)과 29세 설의 두 가지가 있으나 문헌상으로도 29세 설이 오래 되었으므로 지금은 19세 납비(納妃), 29세 출가설(出家說)을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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