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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선정 수행의 모습은 기후 적인 이유도 있지만 樹下石上 에서 結跏趺坐하는 正身端坐였다. 특히 고요하고 시원한 적정처를 택하여 호흡을 관찰하면 서 마음의 흐름을 점검하는 數息觀과 자신의 몸의 행위를 하나하나 잊지 않고 관찰하면서 심경의 변화를 직관하는 방법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중국에 와서는 사뭇 그 양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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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禅修(좌선) | | 변하 였다. 우선 선정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먼저 그 목표의 설정과 장소와 때의 적절한 선택을 중요시하였다. 天台智 의 小止觀을 비롯하여 摩訶止觀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곧 선정 에 드는 것이 단순한 깨달음에 드는 것만이 아니라 일체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발할 것을 강 조한다. 선정 방법에 있어서도 止觀의 雙修를 내세워 안팎으로 치우침이 없게 하였다. 이것이 慧能에 있어서는 坐禪에 대해서도 안으로 마음에 흔들림이 없고 밖으로 경계에 끄 달리지 않을 것을 말하여 禪定과 坐禪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한 정의를 내세웠다. 무엇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 걸림이 없어 밖으로는 일체 선악의 경계에 대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坐라 하고, 안으로는 자성이 부동함을 보는 것이 禪이다. 선지식 들이여, 무엇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는 相을 여윈 것을 禪이라 하고, 안으로는 어지럽지 않은 것을 定이라 한다. 만약에 밖으로 相에 집착하면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고, 만약에 밖으 로 相을 여의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그래서 본성이 본래 청정하고 본래 定한 것인 데 다만 경계를 보고 경계를 생각하기 때문에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경계를 보더 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이 참된 定이다. 선지식들이여, 밖으로 相을 여의면 곧 禪 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곧 定이다. 그러니 밖의 禪과 안의 定이 禪定이다.
{宗寶本壇經}, (大正藏48, p.353中) "何名坐禪 此法門中 無障無 外於一切善惡境界 心念不起爲 坐 內見自性不動爲禪 善知識 何名禪定 外雜相爲禪 內不亂爲定 外若著相心卽亂 外若離相心卽 不亂 本性自淨自定 只爲見境界思境卽亂 若見諸境心不亂者 是眞定也 善知識 外離相卽禪 內不 亂卽定 外禪內定 是爲禪定" 더욱이 宋代에 이르러서는 公案을 드는 看話禪法과 자신이 본래 깨친 존재라는 것을 자각 하는 默照禪法 내지 禪問答을 통한 제자의 心地啓發에 있어서 다양한 機關의 개발과 禪理 등이 모색되었다. 심지어는 念佛과 禪을 雙修 禪淨雙修는 東晉의 竺僧顯을 비롯하여 廬山의 慧遠 . 僧叡 . 禪宗의 四祖道信 . 無相 . 承遠 . 法照 . 法持 . 永明延壽 등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하는 방법까지 나타나 크게 유행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우선 깨달음의 전 단계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으로 話頭라는 것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 話頭의 원형은 인도의 리그베다 에서 말하는 一者 혹은 唯一者로서 무엇인가 신비로운 것으로서 존재도 비 존재도 아니며 死도 不死도 아닌 것이었다. 우빠니샤드에서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 사유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형태[色]와 이름[名]의 전개는 一者의 개별화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훗날 아뜨만이 나 브라흐만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 우면서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도 하였다. 一者는 설명만으로는 모자라고 또한 알려질 성질의 것도 아닌 것으로서 직접 체험을 통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tad-eka 이 초기불교에 와서 三昧 혹은 不可思議 . 稀有 . 涅槃 등으로 그 명칭과 의미가 바뀌어 불리웠다. 더욱이 대승불교에서는 阿 多羅三 三菩提 혹은 般若波羅蜜 등으로 불리 우면서 의미도 더욱 다양하였다. 깨달음이란 正 . 反 . 合 이라는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각자가 실제 수행을 통한 체험적인 각성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는 한계는 깨달음의 전 단계로서 깨달음을 촉발시키게 하는 상황[機緣] 이고, 다른 하나는 깨달음을 통하여 드러난 각성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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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어사 | | 부처님의 경우 見明星悟道라는 기연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반면 六祖慧能은 {金剛經}의 [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구절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 상황은 선종의 한 획 을 긋는 중요한 轉機가 되고 있다. 慧能은 五祖弘忍의 衣鉢을 받아 南宗의 宗祖가 되지 않 았던가. 땔나무를 시장에 내다 팔아 끼니를 연명하면서 살던 盧氏 총각은 문자공부를 별로 하지 않아 경전의 글자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慧能에게 독경 소리는 내용보다는 하나의 소리로 와 닿았던 것이다. 역대조사들의 경우를 보면 소리로써 機緣을 만나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소리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의사 전달의 수단이요 매개체였다. 곧 觀世音이라는 용어도 그런 의미에서 등장한 말이었다.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선종의 가풍 가운데 주장자를 곧잘 사용하고 있는 조실 스님들 이 있다. 선사들은 이 주장자를 들어 보이기도 하고 주장자로 상대방을 후려치기도 하며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반어법으로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열고자 하기 때문이다. 미혹한 대중은 소리를 듣거나 물질이나 상황을 봄으로써 미 망의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깨달음의 機緣을 만나라는 老婆心과 같은 친절한 가르침을 보이 는데 주장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구법의 행각에 나섰던 싯다르타 태자는 많은 스승들을 만 나게 된다. 그 스승을 리쉬(Rishi)라고 하였다. 이 말은 '보는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의 뜻으 로 보아 당시 수행자들에게 최소한 道는 보아서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을 알 수 있 다. 이렇게 출발한 인도의 수행의 길잡이는 중국에 유입되면서 선은 깨닫는 방법을 보는 것 보다는 소리로써 기연을 만나 '깨닫는다'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곧 靑原惟信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30년 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는 산을 보니 산이요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여 무언가 알고 보니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 그 런데 지금 깨닫고 보니 산은 의연히 산이요 물은 의연히 물이더라.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五燈會元} 卷17, (卍續藏138, p.670上) "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及至後來 親 見知識 有箇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箇休歇處 依前見山祇是山 見水祇是水 大衆 這 三般見解是同是別" 여기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實相을 여실하게 볼 수 있다. 실로 깨달음이라는 것은 조그마 한 차이 인식에 있다. 이처럼 話頭는 깨달음에 필요충분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하찮은 티끌 에 불과할 수도 있다. 전자가 미혹한 중생에게 필요하다면 후자의 경우는 미혹을 소로시 떨 구어 낸 참 나를 찾은 경우일 것이다. 다만 화두의 가치는 깨달음이라는 것과 결부될 경우 에 더욱 빛이 나고 화두 자체가 더 이상 화두에 머물지 않고 깨달음이 되었을 경우이다.
글; 박성배(미국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출처; 옛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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