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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一考
 
 
  3-2. 깨달음의 보편성
 
깨달음의 보편성
 
 
이러한 선 수행의 방식에 대한 다양한 발전은 필연적으로 깨달음에 대해서도 그 의미가 보편화 되어 갔다. 인도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은 의미가 더욱 확대되었다. 久遠劫의 숱한 수행을 통하 여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인도적(?)인 깨달음이 중국에 와서는 일체중생의 불성은 언제라 도 현성되고 심지어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까지 하였다. 1700공안의 하나 하나가 모두 깨달음 내 지 깨달음의 행태와 관련된 것들이다. 깨달음을 표현하는 용어에 있어서도 인도에서의 覺이나 證 ( )으로부터 悟 . 會 . 省 . 契 . 道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 상황에 따라서는 깨달음에 대한 상 징적인 용어 내지 수식어 등이 다투어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깨달음에 대한 보편성은 선이 하나의 종파로서 등장하여 각각
표충사
의 종풍을 특색 있게 擧揚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깨달음에 대한 일반인 내지 禪子들의 다양한 요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一回性의 깨달음이 깨달음의 반복이라는 多回性의 과정으로 전개되어간다. 앞서 언급했듯이 慧能도 처음 [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 었다. 이후 弘忍에게 {金剛經}에 대하여 처음부터 가르침을 듣다가 다시 弘忍이 {金剛經}을 설하 여 [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부분에 이르러서 慧能은 言下에 일체만법이 자성을 여의지 않는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가 하면 고려의 普照知訥도 3회에 걸쳐 누차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깨달음은 어떤 차제적인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완전한 깨달음이면서 각각 깨달 음의 경우마다 새롭게 아니면 그 의미를 다져 가는 것이었다.
그 多回性의 유형에도 각각 천차만별이다. 阿難尊者는 摩訶迦葉의 찰간대를 꺾어 버려라 는 소 리를 듣고 용맹정진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 靈祐志勤은 복사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蘇東坡는 계곡의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고, 香嚴智閑은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寶壽和尙은 두 사람이 싸우다 화해 하면서 [面目이 없네그려]라는 소리를 듣고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의 의미를 깨달았다. 뿐만 아 니라 인연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지기도 한다. 玄則은 [丙丁童子來求火]처럼 靑峰과 法眼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으나 누구한테 그리고 어느 때와 같이 그 상황에 따라서 깨닫지 못 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일이 있다. 臨濟는 睦州의 지시를 받고 黃檗에게 참문 했으 나 얻어맞기만 하였다. 그래서 다시 睦州의 지시를 따라 大愚를 찾아갔다가 거기에서 黃檗의 깊 은 뜻을 깨달았다. 이처럼 경전과 조사어록을 읽다가 혹은 일상의 잡무속에서 등등 온갖 것들 이 깨달음의 기연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보편성 만큼 이나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데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각각의 根氣에 맞는 修行 내지 方便이 깨달음의 경우 만 큼 이나 요구되기 때문이다.
법주사
그러나 단순한 하나의 機緣이 깨달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 간의 인과관계 내 지는 그 순간의 심경의 상태가 각각의 기연을 만나 표출되었을 뿐이다. 곧 啄同時의 기연을 만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이처럼 외적인 기연이 있어야만 깨달음이 가능한 것일까. 또한 일체중생은 다 불성을 소유한자라고 하는데, 왜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그런 가 하면 그 깨닫는 과정에 있어서도 우리의 감각적인 인식기능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生盲 등과 같은 八難의 소유자라면 내적인 깨달음의 機緣이 무르익었다 하더라도 외적인 機緣이 닿을 수 없 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기약이 없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내지 깨달음의 형식을 다른 측면에서 찾아보 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어느 특수한 자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특권이 아니기 때문 이다. 적어도 大乘的인 下化衆生의 입장에서 본다면 극락을 거쳐서 깨달음에 이르건 단박에 깨닫 건 간에 궁극적으로는 깨달아야 하고 또한 반드시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에 대 하여 우선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기준에 대한 출발 과 함께 깨달음의 現成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선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가설해 보기로 한다. 보통 깨달음이란 수행을 통한 결과로 서 얻는 자신의 내적 외적인 변화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 말은 깨달음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수행을 통한 결과로 이해한다면 수행에 대한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 수행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신체적 정신적 행위를 말 한다. 그러면 수행은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전 단계적인 방편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수행에 대 한 어설픈 이해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기본적으로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하려면 수행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바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기존의 입장인 수행을 통한 깨 달음이라는 말을 일단 부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행을 통한 깨달음으로 이해하면 수행은 어디까지나 수행이고 깨달음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일 뿐이지 수행이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행을 버리고 깨달음에 다가간다거나 깨달음은 수행을 딛고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구 조는 근본적인 붇다의 교설에 어긋나고 만다. 붇다는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본 데서부터 그의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고 보리수 아래에서 관찰해보니 일체중생이 본래 깨달음의 智慧와 德相 을 구비하고 있건만 단지 번뇌망상에 뒤덮혀 있어 깨치지 못하고 있음을 먼저 간파하였다고 한 다. 이것은 본래 깨달음의 智慧와 德相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는 本覺思想 위에서 출발하고 있 는 불교의 성격에 부합되는 말이다. 그런데도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것이 얻어지는 것처럼 수행과 깨달음을 따로 보는 것은 바른 견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라는 정 의는 일단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이제 수행과 깨달음의 관계를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조는 수행이 곧 깨달음의 행위이고 깨달음은 수행의 현성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깨달 음과 수행이 과정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모든 과정 모든 결과에서 동시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곧 修證一致 내지 證上의 修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수행은 모든 깨달음이고 모든 깨달음은 모든 수행이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보는 修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修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곧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경우의 修는 作修여서 아직 명확한 견해를 갖기 이전의 모색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無明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깨달음이 곧 수행이요 수행이 곧 깨달음이라는 修는 本修 내지 妙修로서 깨달음의 현성 내지 깨달음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修에 대한 가설을 세움으로 써 깨달음과 수행은 결국 동전의 양면으로서 본각의 體와 用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 함으로써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붇다의 가르침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 八難으로 인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거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문제는 그 극복의 길을 열어 갈 수가 있을 것이다.


글; 박성배(미국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출처; 옛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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