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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학의 실천행]에 대한 논평-1 |
2006-03-16 오후 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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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호 영(충북대 철학과 교수)
Ⅰ
{운문광록}에 나타난 실천행]을 발표한 신규탁 교수는 자신을 '이제 공부를 시작하는 초학자'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독한' 겸사이다. 여기에서 지독하다고 한 것은 그가 "선어록을 가리는 안개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으로 필자는 불립문자를 꼽는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안개'라는 말은 불립문자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이해, 구체적으로는 선어록의 구어 및 속어를 알지 못하는 무식함, 그리고 이러한 무식에서 비롯되는 선의 신비화를 지적하는 우회적이면서도 '지독한' 비판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선에 아예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논평자는 안개에 안개를 덧씌우는 과오를 범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다만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태도라면 몇 가지 질문이 허용되리라고 생각한다. Ⅱ
{{{운문광록}에 나타난 실천행]에 대한 논평-1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규탁 교수는 불립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불립문자의 벽을 넘어서'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를 두 번째 절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불립문자를 선어록을 가리는 안개라고 말한다. 이러한 어법은 기본적으로는 불립문자의 참된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대중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수긍이 가는 것이지만, 자칫 불립문자 그 자체를 폄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규탁 교수 자신은 '깨달음의 체험'과 '체험을 얻게 된 상황을 전하는 이야기'를 구분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선의 체험과 선어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선어록의 가치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선어록이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언어를 강조하는 그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신규탁 교수가 불립문자를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깨달음의 체험'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 또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그 상황을 전하는 이야기'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으며 또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논평자는 잠정적으로 선의 체험을 '不立文字'로, 선어록을 '立文字'로 대비시켜 본다. 전자를 제일의제(不可言說)에 그리고 후자를 세속제(言說)에 속하는 것으로 상정함도 가능할 것이다. {{[선학의 실천행]에 대한 논평-1 }}그렇다면 문제는 상이한 차원에 속하는 주장들을 하나의 논의지평에서 함께 다룰 때 오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세속제에 제일의제의 명제를 덧씌움으로써 언어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면, 신규탁 교수는 이를 비판하는 방식에서 그 반대의 오해를 낳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속제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하여 제일의제의 명제를 배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신규탁 교수의 본뜻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논의의 전개에서 야기될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해 보았다.
Ⅲ
이에 대해 운문선사 특유의 비판이라고 하여 첫머리에 언급되고 있는 '향상비판'에 대해서는 그 설명이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신규탁 교수는 '향상'이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당연한 지적이다. 그러면 그러한 초월을 비판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신규탁 교수는 한편으로 보리니 열반이니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것 모두가 결국엔 당나귀를 잡아매는 말뚝이라는 임제 및 운문의 말을 인용한다. 보리, 열반마저 향상(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규탁 교수는 운문이 조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초월(향상)을 정형화하여 그 굴속에 빠지는' 설봉 교단의 잘못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논평자는 설봉 및 그 교단이 과연 초월을 정형화 - 정형화란 아마도 무반성적 패턴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 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따져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논평자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신규탁 교수의 글의 요지가 일차적으로 보리·열반을 초월해야 하며, 나아가 이 초월이 정형화될 때 다시 이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하는 점이다. "'말뚝'에 매여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향상'에 걸터앉아서도 안 된다"는 그의 설명이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있다. '매인다' '걸터앉는다' 모두 안주한다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미의 어휘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운문의 '향상 비판'이 이와 같이 직선적 부정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면 운문은 그의 비판정신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목적론적 사고에 젖어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비판 또는 부정이란 새로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의 여지를 없게 하는 것으로 신규탁 교수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호떡의 화두를 예로 들 수 있다. "불조를 뛰어넘는(超佛越祖) 도리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운문은 "호떡"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호떡은 초월의 초월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직선을 따라 계속 나아가는 어느 지점이 아니다. 운문에 있어 초월을 초월한다 함은 일상으로의 회귀일 것이다. 이 호떡의 화두에 바로 이어 기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은 운문의 이른바 향상비판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대는 알았다고 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조사의 뜻을 말하면 그것을 듣고는 문득 불조를 뛰어넘는 도리를 물을 것이다. 우선 무엇을 부처라 하며 무엇을 조사라 하길래 나아가서 불조를 뛰어넘는 도리를 말하는가?"밑줄 친 부분에서 우리는 불조를 뛰어넘는 도리를 운위하는 것이 부처와 조사를 문제삼음으로써 비판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뛰어넘을 대상이 없는데 무엇을 뛰어넘겠는가 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구조는 철저한 비대상적 인식, 일체의 분별의식의 타파에서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운문의 '향상비판'은 분별의식의 비판이라고 하겠다. 논평자는 신규탁 교수의 글 속에 이러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명료히 제시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Ⅳ
그러면 왜 그것이 명료히 제시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도 그의 글은 '실천행'에 주목하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 그 자체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글의 목적이지 비판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요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실천행이 근본적으로는 비판 행위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규탁 교수의 글 또한 '운문선사가 지적하는 잘못된 수행'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실천이 항상 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가? 혹 긍정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실천은 없는가? 과연 운문의 실천행은 전적으로 비판행위인가? {운문광록}을 세밀히 읽지 못한 논평자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신규탁 교수의 가르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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